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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김현종 시인)

                김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런 젠장 (원태연 시인)

이런 젠장

                   원태연 

 

생각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더니

이제는

술만 마시면

생각이 나네. 

여수 (서효인 시인)

여수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지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은 (채호기 시인)

사랑은

                    채호기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봄 길 (정호승 시인)

봄 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일이 어딨노 경(經) (박규리 시인)

그런 일이 어딨노 경(經)  

                               박규리  


하늘이 두 쪽 나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별이 두 번 갈라져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하, 세상이 왕창 두 동강 나도 하마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지금 이 가슴 두 쪽을 쫘악 갈라보인다 캐도

참말로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 



술 깻나 저녁묵자

유빙(流氷)(신철규 시인)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농담 (이문재 시인)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재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갈대 (신경림 시인)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김종삼 생각 (이현승 시인)

김종삼 생각

                             이현승

            

찌는 여름날

멀리까지 가서 자두를 한 상자 사 왔다.

자두 사러 나선 길은 아니었지만

겸해 돌아오는 길에 자두 한 상자를 손에 넣고 두둑해진 날 

 

수줍은 듯 시설도 하얗게 낀 붉은 자두를

오천 원 만 원 하면서 골라 담지 않고 상자째 사서 왔다.

제 주먹만 한 자두를 보고 침은 이미 한 컵씩은 삼킨 아이들이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 매달려 찔러 보는 걸

집에 가서 먹자고 매운 말로 다그치며 돌아왔는데 

 

다음 날 씻어 먹이려고 열어 본 자두는

반 이상은 썩고 그나마도 다 물러 있었다. 

 

살면서 누구든 이런 날이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썩은 과일을 정성스럽게 모셔 오는 날이,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양 업고 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자두를 골라내면서,

썩은 자두의 그 한없는 단내를 맡으며

집은 과일마다 썩은 과일이었는데,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타박을 받던 마음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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