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나도 소주 다섯 병 마실 수 있다
- 최승은
새벽이 그토록 아름다웠던가
남편을 기다리는 긴긴밤을 지나
한움큼 곤청하늘이 기일게 눈을 뜬다
모르는 손님처럼
집으로 찾아드는 남편
밤이 묻어나는 술내음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
나는 술병을 딴다
소주 한 병, 두 병, 세엣, 네엣, 다섯 병
"나두 소주 다섯 병쯤은 끄떡않고 마실 수 있단 말이야 "
눈물섞인 목소리
아, 생각만으로도
정말 취한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닷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 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
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
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
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수 있
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어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
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
다고 생각 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
뭇거뭇 돝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탉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 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
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
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 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
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
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 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 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
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
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 가다가 머물러
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
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로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아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 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 김옥림
사랑하라
오늘이 그대 생애의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대의 그대가 그대를 잊지 못하도록
열정과 기쁨으로
죽도록 사랑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미치도록 사랑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늘이 무너져 내려
내일 지구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말을 속삭이며
그대가 사랑하는 이에게
최선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그대가 살아온 날 중
가장 행복한 마음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대의 맑은 혼을 담아
지금 이 순간에서 영원으로 영원히 이어지도록
목숨 바쳐 사랑하라
사랑하라
오늘이 그대의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대의 사람이 그대를 아프게 하더라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면
호흡을 늦추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대의 사랑을 용서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은 후회의 연속이라지만
후회하지 않는 그대의 사랑을 위해
오늘이 가기 전에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라
소주 한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백창우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 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버리긴 아깝고
박철
일면식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주고받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시집 『작은 산』 (실천문학사, 2013)
"여보, 인내하며 지켜 나가는 일에는 의미가 있어요"
어떤 문장들은 습관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곤은 자동적으로 응수했다.
칠천원 짜리 와인이 따라진 유리잔이 서로를 부딪치자 "쟁!"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설적인 이한솔 단편소설 '축배' 중에서
나는야 세컨드 1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 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고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꼴지
그러니까 세컨드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술타령
신천희(소야스님)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