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질 것인가.
수많은 승부를 하다 보면
돌을 던지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이미 승패에 대해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순간.
어떻게 질 것인가.
분명 돌을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못하는 것도
기사로서 수치이고,
좀 더 모색하지 않고
쉬이 돌을 던지는 것도 수치이고
승부가 끝났는데도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유도하는 것도 수치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역전의 기회를
노리지 않는 것도 수치이다.
어떻게 질 것인가.
어떻게 져야
다음 대국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져야
앞으로의 생을
계속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질 것인가.
앞으로의 삶을 계속 살아내기 위해...
- 미생 시즌2 92수 중에서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세 번을 정독해도 여전히 전체적인 줄거리는 마치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앞서의 두 번보다는 등장인물의 감정은 더욱 전달된다. 특히 첸이 바라는 허무주의적인 테러리즘은 이제 와닿기 시작한다.
첸은 무의미한 혼란에 항거하기 위해서 혁명에 투신한다. 그러나 암살과 무장봉기에 참가하면서도 그들과 동화되지 못함에 좌절한다. 그리고 혁명 또한 평범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또다른 허상이라는 것을 목도하고 쓸쓸하게 혁명이 짓밟히는 상하이로 돌아온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장제스를 암살하고자 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암살을 다시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은 죽음을 통해서만 자신의 행동과 사상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장제스가 탄 자동차 밑으로 뛰어든다.
이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에는 60년이 걸린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이 된다면 죽는 것밖에 더 할 것이 없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 앞의 문장은 그만큼 극적이지 않기에 알려지지는 않은듯하다. "인간이 그렇게 진실을 부정하고 늙어 초라하게 살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진실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이 세상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 아닌 삶을 통해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곰출판 (e-book) (230207~230209)
❝ 별점 : ★★★★★
❝ 한줄평 : 무조건 믿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
❝ 키워드 : #과학 #질서 #혼돈 #진실
❝ 추천 :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은 사람
항상 ‘질서’만이 미덕이라고 여겨왔던 나에게 ‘혼돈만이 유일한 지배자’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색다른 관점이었다. 그리고 ‘혼돈’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계속 알고 싶어졌다.
글쓴이가 파헤쳐 가는 데이비드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은 정말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훌륭한 학자였을지는 몰라도,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무질서’들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이비드의 폭군 같은 면모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결국 질서를 만들려는 노력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에서 생명을 살아남게 하는 것은 ‘질서’가 아닌 ‘변이’이기 때문이다.
우생학이 미국에서 그렇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몇몇 인간의 잘못된 확신과 믿음이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우주의 먼지 한 톨보다도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주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중요한 존재’ 일 수 있다는 믿음.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의 우주가 될 수도 있다는 믿음.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우리는 중요해요.’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왜 이 책의 제목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인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과학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이 책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이 미래에는 거짓이라고 밝혀질 수도 있는 것이고, 심지어는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꾸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말처럼 엄청난 노력과 끊임없는 투쟁이 없이는 진실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진실이 정말로 진실인지 의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믿음 안에 매몰되어 거짓된 세상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정리해 놓은 범주와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그 기준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세계에 올바른 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혼돈을 정리할 그 시대의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과학도 그러하다. 과학이 늘 옳다는 믿음을 버리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언제나 변화하고 있음을, 단지 혼돈을 정리해 놓은 틀이 있음을, 그 틀은 언제든 진실이 아님이 밝혀질 수 있기에 무조건적으로 믿어서는 안 됨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더클래식 (230104~230123)
❝ 별점 : ★★★★
❝ 한줄평 : 영원한 비밀은 없다
❝ 키워드 : #세계문학 #비밀 #두려움 #젊음 #아름다움
❝ 추천 : 영원히 숨기고 싶은 비밀을 간직한 사람
❝ 그는 사람들이 초상화를 봐도 아무것도 못 알아낼 거라는 걸 알았다. 초상화가 추하고 역겨운 얼굴 속에 그의 얼굴과 닮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 하지만 그래도 그는 두려웠다. (p.46)
📝 (23/01/07) 아름다운 얼굴 뒤에 가려진 추악한 초상화의 비밀을 언제까지나 간직할 수는 없었을 텐데. 역시 나는 죄를 저지르고는 못 살 것 같다. 죄가 밝혀질까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살다가는 먼저 미쳐버려 내 스스로 죄를 고백해 버리고 말 지도 모르니까.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결국 나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일 것이다.
❝ "맙소사! 내가 숭배한 게 저런 거라니! 저건 악마의 눈이야."
”배질,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천국과 지옥을 함께 갖고 있어요."
(…) 추악함과 혐오스러움은 분명히 그림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면의 어떤 생명체가 기괴한 모습으로 살아나면서 나병과 같은 죄악이 서서히 그림을 파먹은 것이었다. 물에 잠긴 무덤에서 썩어 버린 시체보다 더 보기 끔찍했다. (p.75)
📝 (23/01/13) 불쌍한 배질! 훌륭한 그림을 그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도리언의 초상화의 비밀을 알게 되었단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하는 결말을 맞고야 말았다.
사실 여기서는 '마음 속 천국과 지옥'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인간의 성악설을 믿는 쪽이고, 후천적으로 착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처음부터 지옥이 존재했고, 그 지옥을 밀어낼 천국의 크기를 얼마나, 어떻게 늘려갈 것인가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도리언도 분명 본성이 악했는데 헨리의 말로 각성해 그 억눌렀던 것을 초상화라는 수단 뒤에 숨어 표출하는 것뿐이다.
❝ 죄 없는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오, 그것은 절대 속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망각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결국 그는 잊어버리자고, 과거 일에 대한 기억을 몽땅 없애 버리자고, 사람을 문 살무사를 짓밟듯이 기억을 짓밟자고 다짐했다. (p.124)
📝 (23/01/20) 범죄자들이 뻔뻔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망각이 아닐까? 상처를 주거나 범죄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는 용서받지 못해도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쉽게 망각할 수 있다. 망각은 자기 위안과 합리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많은 범죄자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억상실과 망각을 핑계로 대기도 한다. 참 불공평한 일이다. 아픔을 준 사람은 그 사실을 쉽게 잊을 수 있는 반면, 아픔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잊고자 해도 잊을 수 없다니.
❝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근사한 초상화 한 점이 벽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이 초상화는 그들 주인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미모와 젊음을 간직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야회복 차림의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주름투성이에 야위고 역겨울 뿐만 아니라 흉측한 몰골이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손에 낀 반지들을 살펴본 다음에야 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p.198-199)
📝 (23/01/23) 도리언은 자신의 실체를 아는 모든 것을 없애면 안전해지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초상화와 자신의 생명의 짐을 나누어 짊어진 순간 그는 초상화와 연결되어 한 배를 타버린 것이다. 결국 초상화를 찌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리언이 초상화를 찌르자 그가 살아 있을 때와는 반대로 초상화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도리언의 시체는 그동안 그가 초상화에 떠넘기고 있던 추악함과 늙음, 흉측함을 모두 돌려받은 상태로 변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본성의 추악함과 흉측함을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230117~230119)
❝ 별점 : ★★★
❝ 한줄평 : 아직 내게는 어려운 시인
❝ 키워드 : #시 #모순 #어른 #사랑
❝ 두 줄기의 햇빛 / 두 갈래의 시간 / 두 편의 꿈 / 두 번의 돌아봄 / 두 감정 / 두 사람 / 두 단계 / 두 방향 / 두 가지 사건만이 있다 / 하나는 가능성 / 다른 하나는 무(無)
/ 「둘」
❝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 히 아픈가, (…)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 간다
/ 「삼십대」
중독
- 장기화
틈만 나면 게임한다고
중독이라 하지만
난, 학교 갔다 와서 할 뿐
난, 학원 갔다 와서 할 뿐
난, 밥 먹고 할 뿐
난, 똥 싸고 할 뿐
학교도 안 가 학원도 안 가 밥도 안 먹어 똥도 안 싸
틈도 없이 하는 게 중독이지
틈도 없이 잔소리하는
엄마가 중독이지
(강기화 동시집 '놀기 좋은 날')
배낭이 커야 해
- 박형권
집 나올 때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집을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려면 돗자리는 있어야 하니까요
지붕은 필요 없어요
별을 세다가 자야 하니까요
새벽을 위해서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반짝 열리는 인력시장에서
뭔가 단단히 준비하고 온 걸 보여야 하거든요
고달픈 인생은 우리 사이에서 계급장이지요
흔해빠진 연애사건 하나와
술자리에서 펼칠 무용담 몇 가지 여유 있게 담으려면
배낭이 커야 합니다
오늘은 양평에서 고추 따는 일이 걸렸어요
일 끝내고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는 인심을 담으려면
욕심껏 배낭이 커야 합니다
상품 안 되는 것 공원에서 팔면
피로 만든 선지국밥 한 그릇은 남길 수 있어요
아, 나는 그 선혈을 담기 위해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벌써 환갑이 코끝에 닿은 나이
내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젊었을 땐 그게 무겁지 않았어요
청춘을 담을 공간이 필요했어요
왜 집을 나왔느냐고요?
아직은 담아야 하니까요 나는 담기기 싫었습니다
그러므로 배낭은 커야 합니다
별을 향해서라도
노숙을 향해서라도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것은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