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가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Timing(타이밍)
일과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
때로는 동시에 찾아 오기도 한다.
그래서 당황하게 만들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타이밍은 시간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였다
- ‘나이먹는 그림책’(저자 탁소) 중에서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잠시 후의 나를 위하여
김혜순 시인
내가 왼손에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켤 때는
기저귀 찬 갓난아기인 내가, 흰 칼라를
달고 선 소녀인 내가, 하이힐을 신고
기우뚱거리는 처녀인 내가, 오늘 밤
너와 욕설로 술 마시는 내가, 잠시 전
의 내가, 모든 사람인 내가, 수만 개의
내가 왼손으로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켜는 것입니다
잠시 후 내가 두 콧구멍에서 연기를 내뿜을 때도
수만 개의 콧구멍들이 두 줄기
흰 연기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다시 내가 손가락 사이에 술잔을 끼우고
벌려진 입 속으로 술을 부으면
수만 개의 손가락 사이에 술잔이 끼워지고
수만 개의 벌려진 입이 술을 마시며
수만 개의 염통이 아앗 취한다!
그 중에서도 기저귀 찬 갓난아기인 나와 잠시 후에 나의 아가에게 기저귀 채울 내가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앗 취한다!
그런 잠시 후 네가 내 뺨을 정신 차렷! 처얼썩 갈기며 일어서면
수천 수만 개의 내가, 내가내가내가내가내가
벌떡 일어나서
그 중에서도 서른 살 넘은 내가 가장 늦게 일어서서
수만 개의 입술을 벌려
수만 개의 파장을 울려
한 살짜리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곧추세워
두 살짜리, 세 살 짜리, 네 살짜리
점점 길어지고 낡아지는 손가락을 곧추세워
그 손가락에다 반지까지 끼운 손가락을 곧추세워
오직 하나인 나를 가리키며
돼지 멱 따는 목소리로
나는 나란 말이야!
─ 『어느 별의 지옥』, 문학동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대접
- 안도현
내가 아는 한 선배는 술에 취하면,
야, 내가 전방에서 밥풀때기 두 개 붙이고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적에 말이야, 우리 소대에 애새끼를 둘이나 든 나이 든 사병이 하나 있었거든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놈이었는디 좆도,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어쩌자고 지 식구들을 강원도까지 끌고 와서 부대 바로 앞에 셋방을 얻어 살게 했어야 짬밥 퍼먹으면서 저도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었겄냐, 내 참, 물어보나마나지 아닌게아니라 사내자식이 눈물은 많아가지고 외출 나갔다가 사나흘 쯤 지나면 새끼들이 보고 싶다고 내 앞에서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면서 찔찔 짜는 게 하루이틑이 아녔지 내가 어쩌겄냐,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면서 바깥출입 할 수 있도록 자주 편의를 봐줬다는 거 아냐 쓰발, 지놈이야 한번 나갔다가 지 각시 배를 몇번이나 타고 오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냐, 그때가 스물여덟 새파란 나이 아녔냐, 나는 어쨌겠냐고 말이야, 여하튼 그놈이 하루는 지네 집에 한번만 다녀가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거야, 그래 할 수 없이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놈하고 같이 그놈 식구들 사는 단칸방엘 갔는데 야, 말도 마라 말이 집이지 시멘트 벽돌 몇장 쌓고 슬레트 몇장 얹어놓은 그 시답잖은 집에 컴컴한 굴 같은 방에 그놈 식구들이 오소리같이 살다라니깐, 백 촉도 아니고 육십 촉도 아니고 전기세 아낀다고 삼십촉 알전구 달랑 하나 켜놓은 방구석에 들어섰더니 웬걸 근사하게 밥상이 차려져 있더라 집에서 닭 두마리를 키우는디 날 위해서 그중 한 마리 모가지를 콱 비틀었다는 거야 야, 그 새끼 궁상떨던 것 머릿속에서 다 사그라지고 그때는 감동이 혀끝으로 스윽 밀려오데, 앉자마자 소주 몇잔 주고받았지 목구멍에서 똥구멍까지 단번에 찌릿찌릿 기분이 끝내주더구먼, 그런디 그놈하고 머리통 굵은 그 놈 새끼 둘하고 그놈 각시하고 다섯이서 닭 한 마릴 앞에 놓았으니 숟가락이 냄비 바닥 긁는 소리 나는 건 시간 문제지 안그랬겠냐, 애새끼들은 고기, 고기 더 달라고 자꾸 보채는디 그놈 각시가 건더기 하나를 내 앞에다 터억 떠맡기듯 집어주는 거야 그게 뭐였는지 알아, 썰지도 않은 닭똥집이었다는 거 아냐, 사양해도 안 통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걸 입에 우겨넣었지 뭐냐 야, 그런데 그 닭똥집 환장하겠더라, 칼로 갈라서 모래를 털어내야 한다는 걸 몰랐나봐, 씹을수록 좁쌀인지 모래인지 버석거리고 입안에 닭똥 냄새가 고이는디 나 정말 미치겠더라 그렇다고 대접받는 처지에 뱉을 수도 없고 먹자니 속이 메슥거리고 나 원 참, 그래도 어쩌겠냐 그걸 우물우물 씹다가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겉으로는 겁나게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꿀꺽 삼켜버렸지 뭐냐, 나 그날 대접 한번 징그럽게 받았지야, 그게 70년대 중반이었다야,
하면서 오래된 소대장 시절 이야기를 몇차례나 늘어놓곤 한다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 봅시다>는 내가 출판에 뛰어들도록 깊은 인상을 준 책이며 큰 용기를 북돋아준 책이다.
오랜 경력 단절을 지나 느닷없이 직장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부터,
학교도서관에서 겪은 일, 도서관 행사와 업무, 만난 학생들, 학보모 독서회에서 읽었던 책 소개 등, 마치 다이어리 같은 한 권의 단행본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두서 없는 초고를 반겨주는 출판사가 없었다.
차라리 내돈 내산으로 출판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때에 만난 책이기도 하다.
마침내 책 출판을 염두에 둔지 3년만에 로앤오더 출판사의 브랜드 '달꽃'에서 에세이 출판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추천사를 써준 83동기 이정모와 이미혜의 우정에 기대어 2022년 12월에 출판된 <용띠 사서 다이어리>.
출판한 지 겨우 7개월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까마득한 일 같다. 게다가 두 번째 책을 또 내고 싶은 마음에 <책 한번 내 봅시다>를 다시 꺼내든다. 한 번 더 출산의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야 할지 말지? 행복한 고민 중이다. ^^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사랑의 방
유진목
언젠가 몰래 신어 본 당신의 신발은
크고 딱딱하고 무거웠다
그날은 모두가 웃고 있었고
당신은 술병을 높게 들어올렸다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헝클어진 신발들 틈에서
나는 당신의 신발을 한눈에 알아본다
어느 날은 당신이 불쑥 내 방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그냥 오기 뭐해서 귤 한 봉지를 손목에 걸고
나는 잠에서 막 깨어나
입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킨다
현관에 가지런히 벗어둔 당신
신발을 숨기려다 그냥 두었다
우리는 귤을 다 먹도록 말이 없다
그거 알지
이제 몸을 움직이면 당신 소리가 난다
언젠가 몰래 신어본 신발처럼
크고 딱딱하고 무거운 당신
그리고 당신은 노랗고 시큼한 맛이 나
우리는 좁은 방 안에서 귤 냄새를 풍기며 오래도록 누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