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물리학
김인욱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 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펭귄 연인
정끝별
팔이 없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정끝별 시집 <은는이가>(문학동네, 2014)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 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랑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살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쉽게 사람을 포기했을 때 그랬을 때......
데미지는 오히려 자신에게 온다는 걸
회환과 한탄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걸
누군 가를 포기하고자 한다면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
- 미생 두번째 시즌(41수) 중에서
마침표 하나
-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어떤 시인이 그러더라
사랑이란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라고
빠진다는 것은 발목 하나 쯤 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양 발끝이 바닥에 닿지를 않아서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사랑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있지, 나는 너를 그만큼 사랑하진 않은 것 같아
그렇 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마음이 아팠는데
내 사랑은 무릎 정도 깊이 밖에 안 됐나 봐
언제든 일어서서 자박자박 걸어 나갈 수 있는 깊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봐주려고
그녀는 그 말과 함께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이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권미선 저 '아주, 조금 울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