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가 1위를 했어야지. 묘사는 그녀와 가지마 진에 대해 그리 잘하고서는! 왕자님이 1위를 한 것은 역시 콩쿨의 현실인가? & 4위는 조성진을 묘사했다는데 뭔가 걸고 싶음^^ 흥미진진했던 국제콩쿨 파이널리스트들의 이야기. 철저한 취재로 쓰여진 온다 리쿠의 소설☆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번역서의 제목이 원제보다 나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책만큼은 <War Light>만큼이나 <기억의 빛>이라는 제목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70대 후반의 작가가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로 훌륭한 작품을 선보이고 여전히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 독자로서 엄청난 기쁨이자 선물이다.
잘 쓰인 1인칭 시점의 글들은 종종 힘들더라도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올해 읽은 책 중에선 처음으로 욕심내보게 하는 책.
page 166
현재로 무장한 채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그곳이 아무리 어두워도 결국에는 불을 밝히고 떠나게 마련이다. 어른이 된 자신의 자아를 가져가니까.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목격하는 것이다.
고즈넉이엔티 (230616~230705)
❝ 별점 : ★★★★
❝ 한줄평 : 올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여섯 편의 작품
❝ 키워드 : #장르소설
❝ 추천 : 다양한 장르의 글을 한번에 만나고 싶은 사람
<SF>
📝 (23/06/23) 김호야, 「눈밭, 자두 씨」
‘냉동인간’이라는 소재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이렇게 어두운 면을 다루는 소설은 꽤나 새로웠다. 아빠를 얼려도 될지는 자신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아빠를 해동시키는 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니. 너무 잔인하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있지만, 없는 사람인 아빠. 돈이 없어서 계속 냉동 상태로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암 치료를 계속 할 수도 없는 상황.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말이 너무나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 아빠는 돌멩이가 눈사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느티나무 아래 세워둔 눈사람은 햇살에 허물어져갔고, 발길질에 파였고, 진회색 얼룩으로 사라졌다. 눈사람이 품었던 돌멩이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땅을 파고 씨앗을 심고 흙을 덮고 기다리면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된다. 시간은 흘러야 했다. (p.38)
결국 아빠는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 아빠가 뱉었던 자두 씨앗, 그리고 물컵에 남은 물 얼룩만이 누리 곁에 남아 아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보여준다. 씨앗을 심어야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도 열매를 맺고 또다시 다른 씨앗을 남긴다.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죽음이 영영 이별은 아니라는 것’. 어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란 것, 뭐든지 자연스러운 시작과 끝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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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4) 김경락, 「이터널」
죽기 직전까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대신, 백 살이 되는 생일날 법률에 따라 영면에 들어가 내 육체는 소멸되고 내 기억은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면 당신의 선택은?
젊음을 유지하며 영생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는 설정은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이야기 속 세계에선 자연을 거슬러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대신 그 대가로 삶은 백 살 생일에 강제로 중단되고 육체는 소멸되며, 기억은 디지털 데이터화되어 디지털 파라다이스로 가게 된다. 젊음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젊음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죽음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을까?
🖋️ 꿈속에서도 나는 어린 시절의 모든 게 그리워져 눈물을 흘렸다. 자연이 주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지금 내게는 그 시절의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젊음은 영원한 듯했지만 나는 결국 혼자임을 알았다. (p.120)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노화를 맞이해 늙어가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거스른 자연은 그만큼 대가를 요구한다’는 말이 소설이 끝나갈수록 피부로 와닿는 듯했다.
존재의 소멸은 소멸이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멸을 맞이하게 된 주인공. 강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인공은 그래도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젊음을 선택하고 자연을 거스르려 했던 자신의 처음의 선택을 마지막까지 계속 후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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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5) 국술호, 「이원화」
나의 이름을 달고 나를 대체할 AI를 내가 교육해야 한다면 난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데,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 대체 불가능함이라는 게 항상 특별한 것에 붙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 같은 흐지부지한 존재에도 쓰일 수 있는 거구나, 하고 상현은 생각했다. 자신을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이드의 말에 상현은 다행스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p.167)
상현은 왜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을까? ‘나’라는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 그 누구도 나를 완벽히 대신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아쉬움을 느낀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제목은 「이원화」지만, 마지막에 도상현 AI 상담사가 ’끝을 모르고 증식하는 상담 건수‘에 대응하려 무한히 증식되는 상황을 보았을 때 나를 대체할 누군가를 만든다는 것이 단순하게 ‘이원화‘로 끝나는 게 아닐 거란 생각이 드니 섬뜩해졌다.
<미스터리, 호러, 드라마>
📝 (23/06/23) 오아린, 「조던 시카고를 신고 목을 맨 남자」 (미스터리)
제목과 글 설명만 봤을 때는 자살을 하러 간 사람이 준비를 마친 후 잠깐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죽으려고 매달아 둔 올가미에 걸린 여자를 보고 살인자로 몰릴까 봐 어떻게든 시체를 숨기려고 하는 내용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조던 시카고 1994를 ‘폼 나는 마지막’을 위해 거액을 주고 구매하면서도, 월세집에서 죽게 되면 내야 할 거액의 청소료는 아까워 돈이 들지 않는 묫자리를 찾는 박철수. 돈이라는 게 대체 뭔지. 죽음을 준비하는 데도,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좀 서글퍼지기도 했다. 「눈밭, 자두 씨」에서는 ‘희망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 더니, ‘죽음’을 선택하는 데도 돈이 든다는 게.
그가 찾아 둔 죽음을 위한 장소에는 ’낙엽이라는 죽음이 가득‘하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박철수는 마지막이라도 외롭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죽음이라는 낙엽 이불을 덮고, 일종의 죽음의 예행연습이라고도 하는 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자 살인자로 몰려 바로 경찰서 행이라니!
🖋️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이해가 안 가요. 전 그냥, 그냥 죽고 싶었을 뿐입니다.......” (…) "저는 말입니다, 갈 때만이라도 폼 나게 가고 싶었어요. 근데 그것조차 안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p.74-75)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 생각했던 박철수는 자신의 바람처럼 ‘폼 나게 가지도 못하고’ 살인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그런데 그를 도와주러 기적처럼 나타난 구독자 400만 명에 달하는 진실 TV 채널의 운영자 왕산호. 그가 박철수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진실은 따로 있었다. 문득 애드가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왜 완전범죄를 꿈꾸고 성공을 거의 눈앞에 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범행을 티 내지 못해 안달인 걸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라던 박철수의 생각은 두 번의 자살시도 후 바뀌었을까? 사실 첫 번째 자살 시도는 잠이 드는 바람에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실 난 잠도 일종의 죽음이라 했을 때 죽음을 체험한 것과 다름없다 생각하긴 했다) 또다시 자살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대로 회색 후드 올가미에 목을 매고 어둠이 찾아왔단 구절에 박철수가 죽은 줄 알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다시 깨어난 박철수의 모습에 그의 미래에도 희망이 있을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서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는 말과, ‘올가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 참 좋았다. 박철수가 죽음 또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죽기 위해 단단히 묶었던 올가미만큼 다시 살아가기 위해 조던 시카고의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세상으로 묵묵히 걸어 나가길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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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4) 정종균, 「13분 27초」
삼촌은 미쳐 버려 환영을 봤던 걸까? 아니면 이미 무간지옥에 갇혀 새로운 13분 27초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곳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해 주인공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 나도 그들이 했던 것처럼 울고, 두려워하고, 웃고, 피하고, 기도하고, 반항하면서 매번 다른 13분 27초를 완성하겠지. 거기는 그저 새로운 무대일 뿐이야. (p.151)
‘우리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무수히 많은 13분 27초를 반복하고’ 있으며, ‘결국 지옥이라는 곳은 별것 아닐지도 모르며,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게 곧 죄이고, 우리는 각자의 지옥 속에서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섬뜩하게 느껴졌다. 비디오 안에 갇힌 세 명과 그 비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삼촌. 인간 세계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지구의 많은 생물들과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잔인하게 괴롭히고 있는 삼촌 같은 존재일 지도, 그래서 정말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죄이고,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 파괴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동안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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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05) 백다도, 「그녀의 이중생활」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한심하다 여겨선 안 되는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편견을 가졌던 몇몇 기억들이 떠올라 반성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는 모두 소중한 것‘이고, 누군가는 그 마음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작가님의 말이 애틋해서 좋았다.
🖋️ 남들이 보기에는 이 사랑이 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난 이 사랑으로 기뻐하고, 순간적으로 흘러갈 행복을 감지하고 누릴 수 있게 됐다. (p.224)
누구나 주변에 ’덕질‘ 중인 친구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나에겐 누군가가 이상하게, 한심하게 여길까 봐 드러내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밝히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너무나 자랑스럽게 호시탐탐 ‘내 새끼’ 자랑 타임을 노리는 친구도 있다. 모두 너무 귀엽고 또 귀엽다. 사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이제 쉽지 않다고 느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또 대단하다 느껴진다. 모두가 당당하게 좋아하는 이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아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한겨레출판 (e-book) (230324~230702)
❝ 별점 : ★★★★
❝ 한줄평 : ‘결국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 (윤성희)
❝ 키워드 : #여자 #과거 #사과
❝ 추천 : 과거에 받은 상처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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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전엔 『다른 사람』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정말 궁금했고, ‘other’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난 후에 ‘다른’의 의미에 ‘other’도 있지만, ‘different’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윤성희 소설가의 추천의 말이 이 소설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p.50)
❝ 처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강승영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지배당할 필요가 없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과거가 끝나지 않았다면 어떨까. 아직 내가 멈춰진 시계 위를 걷고 있는 거라면. (...)
하지만 내가 단추를 잘 잠근 채 살았다고 착각한다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살았다면? 그래서 계속 단추를 어긋난 자리에 맞춰왔던 거라면? 아니면, 단추가 잘못 잠겼다는 걸 모른 척하고 살았던 거라면? (p.256-257)
❝ 이것이 나의 첫 단추다. 그것은 김동희에게서, 그리고 이진섭에게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말.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말. 나 역시 너에게 결코 하지 않았던 말. 언제나 그 말이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수진아, 그때, 널 그곳에 두고 가서 진짜 미안해.”
정말 미안해. (p.262-263)
❝ “요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간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또 말했다. 지금까지 항상 무언가를 선택해왔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건 그냥 열쇠를 들고 있다는 기분을 위해서였을 뿐이라고. 내가 들어온 문이니까, 내가 열 수 있다. 사실은 어느 문도 열 수 없는 가짜 열쇠를 들고 스스로를 위안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했다. 문은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니니까. 수진은 말했다. (p.266)
꽤 무거운 내용이라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완독한 후로 시간이 꽤나 지났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단아, 수진, 진아, 그리고 유리. 다른 사람이지만 다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여자들. 아픈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던 이들이 다시 만나 진실을 마주하려 하고, 어긋난 단추를 제대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고, 하지 못했던 사과를 하고,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 ‘이야기는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시작될 때일지도 모른다’는 말. 섬뜩하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말이다.
문학동네 (230101~230417)
❝ 별점 : ★★★★
❝ 한줄평 :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색, 흰색.
❝ 키워드 : #애도 #결핍 #필요 #인간
❝ 추천 :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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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들을 준다는 건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새것', '깨끗한 것', '순수한 것'의 느낌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그걸 다 종합하면 좋은 것만을 주고 싶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그녀는 너무 추워서 바다가 얼어 있는 풍경을 본 적 있다. 수심이 낮고 유난히 잔잔한 바다였는데 해변에서부터 파도들이 눈부시게 얼어 있었다. 켜켜이, 하얀 꽃들이 피다가 멈춘 것 같은 광경을 보며 걷자니 모래펄에 흩어진 얼어붙은 흰 비늘의 물고기들이 보였다. 그 지방의 사람들은 그런 날을 ’바다에 성에가 끼었다'고 한다고 했다. (p.47, ‘성에’)
📝 바다도 얼 수 있구나 깨닫게 해 준 구절. 추운 겨울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이 나 눈이 부시다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하늘처럼 파도도 눈부시게 얼 수 있구나 생각했다.
❝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p.54, ‘눈송이들’)
📝 '흰' 것과 '검은' 것들의 대비가 좋았던 문장.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쌓인 눈을 예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이라 표현한 것이 색달랐다. 어쩌면 나뭇가지들에게 아무리 작은 눈송이라 할지라도 그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까?
❝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에 어떤 결핍의 원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 그러므로 결핍은 충만함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초과로 이어진다. 이 초과를 위해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히게 되며 무감각해질 뿐이다. (p.164-165)
📝 아직 읽지 않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많아 문학평론가의 해설에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질문의 서사는 아쉽게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텅 빈 것 같이 보여도 다른 모든 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색, 흰색. 근본에 결핍이 있어 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인간이지만, 오히려 초과로 이어지는 결핍.
한겨레출판 (e-book) (230313~230323)
❝ 별점 : ★★★
❝ 한줄평 : 이별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야
❝ 키워드 : #이별 #사랑 #만남
❝ 추천 : 쟐 이별하고, 잘 사랑하고 싶은 사람
❝ 산다는 건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간 속을 지나간다는 건, 매 순간 우리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 우리 자신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매 순간 존재하는 단 한 번의 우리와 매 순간 이별하면서 매 순간 다음 순간의 우리로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그때 거기에 존재했었던 우리를 우리는 지나가야만 하니까, 떠나가야만 하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자이다. (p.87)
❝ 우리가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생의 어느 특별한 비의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의의 진실을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떠난 사람을 다시 그리워하는 건 그 진실을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없고 그가 가르쳐준 비의의 진실만이 혼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떠나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사랑과 세월 사이의 비극이다. (p.129)
📝
이 책을 마음 깊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궁금해졌다. 많은 부분에서 마음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참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나에게는 단순히 사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해 봤을 때 공감되는 부분들이 더 많았다.
특히 ‘산다는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 자신과 이별한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나와의 만남, 타인과의 만남과 이별을 생각했지 살아간다는 것을 나 자신과 이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만난 후 새로운 나 자신과의 만남이 과거의 나 자신과의 이별과 같은 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말은 마음에 담아두고 살려고 하는 편인데,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과 잘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느꼈다.
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좀 더 살아간 후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인상적인 구절이 또 바뀌겠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을 미래의 내가 보고 또 다른 생각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묘미인 것 같다.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할 때
- 문성해
서너 달이나 되어 전화한 내게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할 때
나는 밥보다 못한 인간이 된다
밥 앞에서 보란 듯 밥에게 밀린 인간이 된다
그래서 정말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만났을 때
우리는 난생처음 밖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무얼 먹을 것인가 숭고하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결국에는 보리밥 같은 것이나 앞에 두고
정말 밥 먹으러 나온 사람들처럼
묵묵히 입속으로 밥을 밀어넣을 때
나는 자꾸 밥이 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밥을 혀 속에 숨기고 웃어 보이는 것인데
그건 죽어도 밥에게 밀리기 싫어서기 때문
우리 앞에 휴전선처럼 놓인 밥상을 치우면 어떨까
우연히 밥을 먹고 만난 우리는
먼산바라기로 자꾸만 헛기침하고
왜 우리는 밥상이 가로놓여야 비로소 편안해지는가
너와 나 사이 더운 밥 냄새가 후광처럼 드리워져야
왜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가
으깨지고 바숴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섞여야
그제야 후끈 달아오르는가
왜 단도직입이 없고 워밍업이 필요한가
오늘은 내가 밥공기를 박박 긁으며
네게 말한다
언제 한번 또 밥이나 먹자고
꽃을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 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 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