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이 꺼진 자리>
불꽃이 꺼진 자리에서 각자 서로 다른 것을 찾아들고 나란히 법정에 선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다시 시작하려는 남자는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며 여자를 증인신청하고, 떠나려는 여자는 증인으로 출석한다.(현주건조물방화죄와 법인도피죄)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
헤매이는자 의 눈빛을 가진 연인들의 너무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였다.
캠핑카 야영장 숙소를 체크아웃하고서는 ‘제주의 스타벅스’ 카페에 다시 갔다. 또 커피 두 잔과 샌드위치와 핫도그를 먹고 마셨는데 이번에는 오전 할인을 받아서 금액이 만 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로 찾아도 역시 훌륭한 카페였다.
이번 여행 기간 중에 카페와 식당 수십 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우리가 두 번 찾은 곳은 아마 이 카페와 처음 서귀포시 부근에 머물 때 호텔 앞에 있던 카페, 그렇게 두 곳이 전부였지 않나 싶다. 두 곳은 규모나 분위기나 운영 방식이 상반되는 곳이었는데, 별 기대나 계획 없이 우연히 들어갔다가 예상치 못하게 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이 또한 인생의 비유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4월 셋째 금요일에 서울에 돌아오기로 했다. 주말보다는 평일에 비행기 표가 싸니까.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제주에 29일 간 머무는 셈이었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우리는 경치는 어디가 좋았다든가, 최고의 식당과 카페는 어디였다든가 하는 대화를 나눴다.
여행 전체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근사한 경험이었다고 평가했다. 조금 우습고 꽤 겸연쩍은 말이지만, 나한테는 이 여행이 내 인생의 전기가 되지 않나 생각했다. 우울증이 완전히 나았고, 앞으로 재발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디오북을 무단 발행한 회사에게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한 결심이 영향을 미쳤다.
반면 HJ는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새로 구직 활동을 시작해야 하고, 그게 잘 될지는 여전히 모른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 수는 좀처럼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고, 백신 확보도 늦어지고, 불경기도 길어질 전망이다.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나는 이 화제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퍽 놓인다고 했다.
마지막 숙소는 제주공항에서 멀지 않은 펜션이었다. 나는 썩 동의하지 않았지만 HJ의 주장에 따르면 여태까지 모든 숙소의 장점을 합친 곳이었다. 환상적인 바다 전망, 넓은 거실과 침실, 해안 산책로, 식당이나 찻집과의 근접성, 청소 서비스까지. 그리고 이 펜션에서 직접 개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옆에 커다란 정원이 있는 반려견 카페가 있었다.
마지막 숙소에서의 첫째 날에는 이호테우 해변까지 걸어갔다. 왕복 4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였는데, 해안 산책로에는 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람이 맞느라 나는 좀 힘들었는데 HJ는 씩씩했다. 유명한 조랑말 등대는 운치가 있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좀 작았다. 그리고 의외로 주변에 멋지고 호사스러운 관광객용 카페가 없었다.
해수욕장에는 서퍼 수십 명이 웻수트를 입고 파도를 타고 있었다. 저게 저렇게 재미있나? 서핑은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스포츠다. 스노보드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지만 딱 봐도 신날 것 같아 보이는데, 서핑은 고생하는 시간에 비해 즐기는 시간이 너무 짧아 보인다. 매번 물에 빠져야 하는 것도 그렇고.
HJ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와 달리 수영을 매우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그나마 기타라도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 곁으로 웻수트 차림의 서퍼들이 지나갔다.
이날 저녁에는 외도동 시내로 들어가서 멜튀김과 각재깃국을 먹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허름한 동네 식당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와 주방 아저씨의 친절하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주방 아저씨는 내가 식사를 다 하고 계산을 하러 가자 “각재깃국은 입맛에 맞았습니까?”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는데 정말로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 동네 주민이냐고 묻는 등 우리를 관광객으로 보지는 않은 듯했다.
멜은 멸치, 각재기는 전갱이의 제주 방언이다. 멜튀김은 갓 튀겼기 때문에 당연히 맛있었는데, 식으면 그렇게 맛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각재깃국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벌겋고 기름기 많은 매운탕이 나올 줄 알았는데, 배추가 듬뿍 들어간 맑고 시원한 지리였다. 굉장히 맛있었고, 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올드독의 맛있는 제주일기』에는 한 등장인물이 전갱이를 구이가 아니라 국으로 먹는다는 데 대해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도 그랬다. 그 책에 따르면 각재깃국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날리고 황교익 음식 칼럼니스트는 “맛없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우열 작가도, 정 작가의 친구도, 우리도, 모두 각재깃국을 맛나게 먹었다.
외도2동은 네모반듯하게 계획적으로 만든 주거단지였다. 그래서 동네 끄트머리에 있으면 한쪽으로는 빌딩들이, 다른 쪽으로는 벌판이 보였다. 우리는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바닷가 펜션으로 돌아갔는데, 내리막길이라 저녁 하늘과 바다를 보며 내려가는 전망이 멋졌다.
다음날 아침에는 이호테우 해수욕장 반대 방향으로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소문난 꽈배기 가게에 찾아갔는데 맛은 실망스러웠다.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서 파는 꽈배기가 훨씬 더 맛있다. 세운상가의 꽈배기 가게는 그보다 더 뛰어나고.
이날 낮에 HJ는 나의 후배이자 그녀의 동기를 다시 만났다. 나는 혼자서 글을 쓰다가 신문 칼럼 청탁을 받았다.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왔는데 뭐 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고 대답했다. 왠지 고소했다.
HJ는 친구와 금방 헤어졌고, 우리는 오후 늦게 펜션 밖으로 나가 외도 선착장에서 하천 옆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 하천에는 외도천, 월대천, 광령천 등 여러 이름이 있었는데 경치가 좋아 조선시대부터 풍류객들이 찾던 명승지라고 했다. 옛날 사람들은 수평선보다 이런 아기자기한 풍경을 좋아했나 보군.
하천을 한참 올라가다 지역 주민들이 간다는 맛집에 찾아갔다. 과연 손님이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제주 사투리가 들렸다. 여자 손님이라고는 HJ밖에 없다는 점도 특이했다. 정식 2인분을 주문했는데 족발과 옥돔구이가 나왔다. 가격으로 봐서는 진짜 옥돔이 아니라 중국산 옥두어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값이 싸고 양이 푸짐했지만 맛은 그냥 그랬다. 식당을 나오면서 내가 HJ에게 말했다. “저 식당이 왜 제주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알겠어.” 궁금해 하는 HJ에게 설명했다. “제주 남자들도 남자들이기 때문이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먹을 때 신경 쓰는 게 두 가지야. 첫째, 양이 많은가. 둘째, 고기의 양이 많은가.”
이날은 혼자서 맥주를 2.5리터 마셨다. 그렇게 마신 맥주 중에는 아워 에일도 있었다. 제주맥주 양조장에서 재고가 없어 마시지 못한 그 맥주다. 엄청나게 잘 팔려서 곳곳에서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는데, 우연히 들어간 편의점에 있는 걸 보고 냉큼 손에 들었다. 현대카드와 협업으로 만들었다는 세션 IPA다.
캔 라벨은 설문대 할망신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하고, 영귤 꽃향과 제주 보리를 첨가했다고 한다. 적당히 경쾌하고 적당히 달달쌉쌀해서, 가볍게 즐기기 좋았다. 여태까지 맛본 제주맥주 제품 중에서는 내 입맛에 제일 잘 맞는다. 해안 산책로를 걸으며 꿀꺽꿀꺽 마셨다.
저녁에는 펜션에서 HJ와 밤이 오는 모습을 한 시간가량 넋을 잃고 구경했다.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창문을 바라보게 배치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보니 점점 짙푸르게 변해가는 하늘과 그 아래 바다가 하도 아름다워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제주도 푸른 밤’이라는 표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낮은 언덕 바닷가 동네
저녁에는 생선 요리를 먹고
푸른 밤 오기를 기다리네
영혼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자살은 해도 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 앞에서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밝힌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또 좋았다. 가능성을 열어놓긴 하지만 저자는 영혼은 없고, 죽음은 나쁘며, 자살은 특정 상황에서 할 수 있고, 인생은 커다란 목표와 일상적인 목표를 혼합해서 살아야 한다고 답한다. 추론 과정이 대단히 논리적.
분위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지만 그 앞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조차 조용히 꺾게 만드는 어떤 정경, 어떤 관계.
나의 하루는 삶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다짐으로 시작된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스스로의 목숨줄을 쥐고 흥정하며 환청이 들리든 환시든 예기 같은 것을 쥐면 나는 나 자신의 일부들과 싸워 이겨야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몸도 정신도 힘의 임계점에 도달해도 내가 끊임없이 누구도 보지 않을 글을 쓰는 것은 나의 근원적인 불안과 우울, 그리고 죄책감을 덜기 위한 생의 수단이다. 세계사든 시론이든 언어든 공부를 하는 것은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고 지식에 대한 갈망이다.
그런 내가 내내 우울하게만 지낼 것 같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작은 아이, 메리의 눈에 행복을 느끼고, 펜을 들고 술술 써내려가는, 비록 퇴고를 엄청해야지만, 종이의 잉크 자국에 안도하며, 달콤한 꿀을 태운 우유와 선식을 마시며 개운하고, 특히 어제 저녁, 장강명 선배의 줌 라이브를 보며 배울 점과 선배께 드리고 싶었던 질문과 답변에 대한 공감, 그리고 소통했다는 마음이 나의 작은 빛이 이 시대의 문제를 고찰하고 관찰하며 조금이나마 이로운 방향에 놓이길, 그런 동시에 위로가 되길 바라는 나의 주치의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나의 상냥함과 친절이 강한 힘이 될 것이라, 고마운 말씀, 오늘도 새로이 작가로서 한 발자국 나아가는 느낌을 준 장강명 선배께 고마운 마음을 고이 접어 드립니다.
덧, 장맥주란 직관적 이름에 바로 알아뵀습니다. 얼른 제 이름으로 된 책을 내어 구월의 저녁 맥주와 책이 있는 푸른 가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 마리 학」, 자신의 죄와 남의 슬픔을 슬쩍 가린 이기적인 남자의 에로티시즘이 왜 이렇게 정갈해 뵈는가. 『설국』도 좀 그런 느낌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