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소련이라는 지상 최대 최악의 공산주의 국가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의 평범하지만, 현명한 한 인물의 하루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 나라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민족성을 알게 하며, 인간이 최악의 경우에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곧, 솔제니친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니, 그가 한없이 존경스러워진다.
슈호프는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할 줄 안다.
일이란 것은 마치 막대기와 같아서 양끝이 있는 법이다. 영리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신경을 써서 일을 잘해야 하지만, 멍청이들을 위해서 일을 할 때는, 그냥 하는 척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안 그랬더라면, 벌써 오래전에 완전히 뻗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ㅡpage 20
야채스프는 따뜻하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인데, 다 식어버렸으니, 오늘은 그나마도 운이 없는 날이다. 그러나 슈호프는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기 시작한다. 설사, 지붕이 불탄다고 해도, 서두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 시간 십 분,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오 분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이다. ㅡpage 23
이반 데니소비치는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내년에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위해서 모든 문제를 간수들이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아직도 형기를 마치려면 겨울을 두 번, 여름을 두 번, 그러니까 이 년은 더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벽걸이 문제가 그를 여간 초조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돈벌이가 쉽고 수입이 짭짤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모양이다. 또한 고향 친구들에게 뒤떨어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반 데니소비치는 이 벽걸이 염색일이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하자면 양심이 불량해야 할 것이고, 윗사람들에게 뇌물도 갖다줘야 할지 모른다. 슈호프는 이 세상에 태어난지 사십 년이 되었고, 이빨도 반은 빠지고 없고, 머리숱도 얼마 되지 않은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뇌물이라는 것을 쥐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다. 수용소에 들어와서도 그짓만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쉽게 번 돈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여서 번 돈이라는 실감도 나지 않는 법이다. 노동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 그른 데가 없다. 아무리 기운이 없다 해도 무슨 일이든 남보다 못하진 않는다고 자부하는 슈호프다. 세상 밖으로 나가면 하다못해 빵공장에라도 취직할 수 있고, 목공소에서 일 할 수도 있고, 땜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ㅡpage 53
슈호프는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얹는다. 한쪽 국그릇에 담긴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한번 휘저어 확인한 다음, 다른 그릇에 담긴 국도 똑같이 확인한다. 웬만큼은 들어 있다. 생선도 걸려든다. 보통, 저녁에는 아침보다 국이 더 멀겋게 마련이다. 조반을 먹이지 않으면, 죄수들을 부려먹지 못하기 때문에 아침은 좀더 먹이고, 저녁은 좀 부실하게 먹이기 일쑤다. 좀 부실하게 먹였다고 죄수들의 잠을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 우선, 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 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나, 기나긴 하루의 작업에 대해서나, 이번 주 일요일을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나,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이다. 그래, 한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줄 테지! ㅡpage 175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ㅡ page 208
독서 모임에서 책 쓰기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읽다 보니 납득됐다. 독서 모임이 어른들의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자가 허세 없이 성실한 사람이라는 게 전해진다.
표정 없는 신산(神算)은 동생과 아내, 팬들에게 고마워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돌부처라고 불린 이창호 9단은 자신을 믿지 않았고, ‘목숨 걸고 둔다’는 열혈 조치훈 9단에게는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의 기풍 변화에 대한 분석, 아내와의 만남 이야기 등이 재미있다.
홀로씨의테이블 (230801~230804)
❝ 별점: ★★★☆
❝ 한줄평: 결코 완성되지 않을 한 편의 그림인 인간의 삶
❝ 키워드: #생각 #기억 #추억 #시간 #진실 #슬픔 #타인 #미완성
❝ 추천: 나 자신을 깊이 있게 고찰해보고 싶은 사람
✨ 시작하는 말: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겠죠,
서서히 비웃다가
모두가 외면할 때까지,
📝 (23/08/04) 최근 짧은 기간 동안 너무나도 만연한 혐오와 비방, 차별을 보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을 비난하는 건 쉽고, 내가 다치는 건 싫어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사람들. 이 세상이 약간 싫어지기도 했다.
🖋️ 타인 혹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왜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어 하는 것만 알고 싶어 하는지, 왜 우리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모든 힘으로 부정하고 마는지, (…) (p.25)
🖋️ 우리는 오늘도 우리 개인의 슬픔에 몰두하느라 타인의 슬픔을 거의 모두 지나친다. (p.31)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듣고, 알고 싶은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철저히 구별해 진실을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또 우리 자신의 슬픔을 생각하느라 타인의 슬픔은 쉽게 지나치고 잊는다. 이럴 때마다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자꾸 떠오른다.
|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p.202, '깊이 있는 사람'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슬픔에 대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을 잘 모르고, 잘 모르면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꾸만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기. 그것이야말로 진실일 확률이 높다. 이 순간 내가 나를 얼마나 속이고 싶어 하는지, 나는 거짓에 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p.172)
🖋️ 그러니까 우리는 한순간의 생각을 확고히 믿는다. 영원성을 부여할 것처럼. 이 현재를 어떤 불멸하는 상자 안에 그대로 간직할 것처럼. 그러나 모든 것은 잠시 떠오르고 사라진다. 우리의 믿음과 생각도, 상상과 감정도 일어났다가 다시금 사라진다.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속성만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p.180)
사실 우리가 지금 미워하고 비난하는 모든 것들도 영원할 것 같지만 순간의 일이다. 다른 미워하고 비난할 대상이 생기면 그 전의 일은 순식간에 잊힐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믿음, 감정도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내뱉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라지고 잊힐지라도 우리가 한 순간의 선택들은 모두 우리 안의 어딘가에는 남아있을 것이기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정해진 삶의 형태는 없으며 각자의 생존법이 있을 뿐이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대입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며 나아가 볼 뿐이다. (p.24)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고, 타인의 삶은 타인의 것이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싶은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작가 자신도 이 글을 쓴 내일의 자신이 언제 이런 생각을 했었는지 의아해할 것 같다고 했는데, 나 또한 다음에 이 글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진 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평소에 딱히 관심 갖고 있는 주제는 아닌데 역자가 기존에 아주 흥미있게 읽은 <생명 가격표>의 연아람 번역가라 관심이 갔던 책이다. <생명 가격표>는 책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깔끔한 번역 또한 인상적이어서 평소에 비문학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추천했던 책.
원제인 <Hooked>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관통하는 주제라 직관적이면서도 잘 맞는 제목이라 생각되는데, <음식 중독>이라는 번역서의 제목은 뭔가 이 책의 내용을 다 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운 감이 있다.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이 책의 내용은,
"사람은 원래부터 음식에 중독되게 되어 있다. 음식에 중독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중독성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식품 회사들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내고, 그런 음식에 더 쉽고 편하게 중독되도록 하는 것이 문제다."
인데... 솔직히 와닿지는 않는다. 이 얼마나 지극히 미국스러운 발상인가;;;
책의 첫부분에도 나오는 사례지만, 맥도날드가 비만을 초래하는데 일정 책임이 있다는 내용은 아무리 나의 뇌 회로를 다양하게 변주해봐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식탐이 많지 않는 내 개인 성향 탓인건지, 뇌과학까지 들어가며 여러 사례로 설명하지만 작가의 주장에 크게 공감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품회사들이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하는 사례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음식 중독은 '좋아하는' 것이 아닌 '원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여러 사례들 중 M&M 을 어찌나 상세히 설명하던지 평소에 전혀 먹지 않던 초코렛을 참지 못하고 사버렸다. 자그마한 포장지를 여는 순간, 처음으로 책의 내용이 일부나마 이해가 됐다. 아...여러가지 알록 달록 다양한 색깔의 초코렛이 얼마나 손이 가고 싶게 보이던지. 분명 맛의 차이는 하나도 없는 걸 알면서도!! 똑같이 검정색이나 파란색이나 한가지 색으로만 가득했다면 먹고 싶은 생각이 덜할텐데, 그 다양한 색감에 무너져 버렸다. 흠... 나도 이런 식으로 그동안 낚여 왔던 거였군, Hooked..
제8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김범정 <버드캐칭>
'로맨스' 순수문학을 오랜만에 읽어본다.
평범한 젊은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악역이 없는 이야기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졌다.
7p
기억하기에 이모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늘 공평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아직 사리분별을 못할 만큼 어렸는데도 항상 내 의견을 먼저 물어봤고 내가 간혹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할 때도 그저 조용히 들어 주었다. 이모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늘 신신당부하길 말은 자유롭게 하되 자기가 한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나는 말에 일일이 책임지는 게 힘들어 그냥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64p
"열반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무'를 받아들이는 거래."
"달라이 라마가 그렇게 말했어?"
"물론 나는 달라이 라마의 법문에서 듣긴 했지. 그렇지만 이 얘기는 달라이 라마뿐만 아니라 불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무'라는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거지."
"그럼 살아갈 필요가 없는 거잫아."
"뭐 일단은 그렇지. 살고자 하는 욕망조차도 끊어 내는 거니까. 살아 있던 죽어 있든 상관없는 거지. 그런데 아무 의미가 업사는 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떤 인생도 상과없지 않을까? 내 말은, 인생이 어떤 보습이라도 괜찮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흥미로운 관점인데? 불교신자들은 그렇게 인생을 견디는 건가? 확실히 기독교랑은 다르네."
우리 집은 독실한 기독교였다. 나를 제외하고.
"응. 내세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지금 인생을 견디는 방식하고는 다르지.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는 사실 내세가 아니니까. '무'를 향해 가는 통로인 거래. 이쪽이 더 진실되어 보이지 않아?"
"그렇긴 한데 인생이 너무 재미없게 느껴지지 않을까?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고?"
"지난 3년이 그랬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고."
115p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전장이 있었다. 같이 싸울 수는 없을까? 내 싸움과 하나가 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 가자의 자리에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응원할 뿐이다. 이번엔 아버지가 이겼다고 느끼기를.
129p
"도형이는 옛날부터 생각이 많아. 가끔 그냥 눈앞에 있는 걸 가만히 지켜 봐."
135p
"이모는 뭐가 그렇게 간단해요?"
"도형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할 때가 있어. 친한 친구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 사람들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요?"
"네 인생."
"그 사람들이 곧 내 인생이에요."
"맞아. 그렇지만 아주 맞는 얘기도 아니양.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만 중요한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을 떠나거나 떠나 보내야 할 만큼 아주 중요한 일."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걸 어떻게 알죠?
"분명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고 네 삶의 모든 게 제자리를 갖추고 있지만, 네 삶이 망가지고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면 네 인생에 중요한 일이 생긴 거야."
221p
그러나 한지혜의 말대로 나는 내 역할에만 너무 충실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세현이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세현이를 여자친구라는 역할 밖에서는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지난 8년이 허상 같았다. 준영이와 함게했던 시절에는 세현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세현이의 미세한 표정을 보고 세현이가 느끼는 미묘한 슬픔을 이해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보였다. 어쩌면, 세현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 내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던 나를, 세현이를 포함해 세상에 호기심을 ㅂ이던 나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던 나를.
241p
"솔직히 우리 그때는 별로 안 친했잖아. 네 녀석이 말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기억이 안 나. 넌 그때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내가 세현이한테 하도 그 얘기를 했더니 아직까지 기억해 주고 있었나 보네. 내가 너랑 있었던 좋은 추억이라고 했거든 근데 생각해 보니까 세현이가 화낼 만하잖아. 나 대신 화내 준 거야, 이 자식아."
준영이는 갑자기 주먹으로 내 팔을 퍽! 하고 쳤다.
"네 옆에 계속 앉아 있었잖아."
268p 작가의 말
주저 앉아 있던 곳을 나서서 어딘가 의미 있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그리고 캐치볼을 하듯이.
완성된 이야기에는 결국, 나와 알고 지낸 어느 누구도 주요 등장인물로 들어가 있지 않았고, 실제로 친구들과 함께 겪었던 일들 역시 들어가 있지 않지만, 이야기에 묘사된 감정 만큼은 진짜였다. 내게 상처 주고 내게 상처받은 그 모두에게 미안하고 그 모두에게 고맙다. 난 늘 모두가 그립고 애틋하다. 이젠 각자의 자리에 있을 모두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ㅡㅡㅡ
정직원 전환을 앞두고, 오랜 여자친구와 결혼을 꿈꾸는 더할 나위 없이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도형'이 주인공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생각해보면 1인칭 시점의 주인은 '평범한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이 이토록 평범한 것은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기를 원해서인가? 작가로서 '공감'은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이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이 아니지만 오히려 가장 힘을 실은 인물이라고 느꼈다. 자유롭게 말하되, 자기가 한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모의 말과, 일일이 책임지는 게 힘들어서 그냥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는 도형의 이야기가 공감되지만, 막상 삶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고싶은 말을 참는 행동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나?
악역이 없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냥 누군가가 못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각자의 입장이 있고, 일이 그냥 이렇게 되어버렸다, 는게 사실 더 와닿는다. 현실에서도 내가 상처받았을 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그 사람'의 탓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악역이 없는 캐릭터들과 구조들이 와닿았다. 이런 것을 의도하였나?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들을 구성하면서 우연히 생겨난 것인가?
개인적으로 종교는 아니지만, 불교의 정서나 믿음을 좋아하는 편인데 64p에 등장하는 열반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무'를 받아들이는 거라는 이야기가 와닿았다. 내 생각과 일치한다. 작품에서는 사라진 세현이 최근에 빠져있었던 게 달라이 라마라며 우연히 등장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도 작가님의 의견이나 생각이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던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상관없다는 삶은 '무'라는 의견을 작품에 넣게 된 이유는?
도형의 꿈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검은 새'의 역할에 대해서 좀더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검은 새의 이야기가 이 새의 역할에 대해 더 헷갈리게 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현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했고, 준영이를 오해하고 자신만의 편견을 가지고 포기한 도형을 나무라는 것 같기도 했다. 검은바다멧참새는 어떤 존재인가?
다음 그믐북클럽에서 읽을 책을 함께 골라요.
안녕하세요, 그믐클럽지기입니다. 바로 일주일 전 그믐북클럽 6기를 시작했지만 여러분에게 7기 모임 소식도 얼른 전하고 싶어 7기에서 함께 읽을 책을 정하는 모임을 서둘러 열었습니다.
이번 7기에서도 여러분이 1순위로 골라 주신 책을 선정해서 북클럽에서 같이 읽으려 합니다. 이번에는 북트리거 출판사의 좋은 책 중에서 일차로 그믐클럽지기가 훑어본 뒤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세 권을 선정해 보았어요. 이 최종 후보 도서들 중에서 저 혼자만의 선택으로는 한 권을 뽑기 어려우니 함께 골라 주시겠어요?
①번 <모기가 우리한테 해 준 게 뭔데? - 절박하고도 유쾌한 생물 다양성 보고서>(프라우케 피셔, 힐케 오버한스베르크, 2022)
②번 <더 파이브 -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핼리 루벤홀드, 2022)
③번 <경제 전쟁의 흑역사 - 시장 질서를 박살 내고 세계경제에 자살골을 날린 무모한 대결의 연대기>(이완배, 2023)
지난 북클럽 때도 그랬지만, 이번 후보 도서 세 권도 굉장히 다채롭지요? 모기에 대해 이야기 하며 풀어나가는 생물학과 경제학 이야기, 살인자에게 희생됐던 이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논픽션,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경제 역사까지. 어떤 책을 읽어도 알차고 치열하게 8월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이 가장 읽고 싶은 책을 투표 모임 댓글에서 번호와 함께 이유를 남겨주세요.
■ 투표 참여 방법 : 그믐 모임에서 댓글로 선호하는 책 번호와 의견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투표 모임 바로 가기 : [그믐북클럽] 7기에서 함께 읽을 책을 골라주세요 (클릭하시면 연결됩니다)
*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는 7기 그믐북클럽 멤버 선정 시 우선권을 드립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이 공지사항이 아닌, 그믐 투표 모임에서 답글을 달아주세요.
서머싯 몸이 서문을 썼다. 『달과 6펜스』를 좋아하지만 고 갱은 여러 모로 황당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고갱 본인의 문장은 책임감 없는 좋은 단어들 위주로 되어 있다. ‘삶과 행복의 기술’이니 ‘심오한 진리’니 ‘신비로운 세계’ 같은 말들. 여러 원주민 소녀들을 애인으로 삼으며 성병을 옮겼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 고갱이 매독에 걸렸던 게 아니라는 주장도 최근 나온 모양이더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