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를 읽다가 암에 관심이 생겨서 암에 관한 최신작을 읽어봤다. 암전문의가 쓴 암에 관한 에세이 풍의 책인데 이런 종류의 건강 서적이 그러하듯 가볍게 읽힌다. 인간의 신체가 미지의 영역이 많은데 인간 몸의 최소 단위인 세포로부터 시작되는 병이라서 암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런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사람은 죽거나 때로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조카들의 질문은 늘 흥미롭다. 잊고 있던 질문을 받기 때문이다.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는지, 신의 존재를 믿는지, 개와 고양이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 꿈은 무엇인지.
하준이가 여덟 살이던 해 여름방학에 함께 광명동굴을 가던 차 안에서 물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선뜻 답하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차 안은 오래도록 고요했고 끝내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는 내가 나는 당혹스러웠다.
꿈이 없었던 때가 있었나 싶게 꿈이 많았다. 돌아보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처럼 행복해지고 싶다, 생각했던 거 같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화면 속 가수를 보며 오래도록 행복에 대해 생각했던 게 떠오른다. 그러한 시기를 지나 오래도록 한 가지 꿈을 꾸게 되었다. 글이 쓰고 싶었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주 오래도록 품어온 꿈이었다. 그런데 왜 조카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꿈이란 걸 꾸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래도 아직 나는 꿈을 꾼다. 글을 쓰고 싶다. 그저 그런 스무 살을 보내고 있던 때에 젊은 작가로 한창 인기를 끌던 한 작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롤모델 인터뷰 과제를 위해 불쑥 메일을 보낸 대학생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작가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무얼 쓰고 싶냐는 작가의 질문에 글이 쓰고 싶다는 답을 했던 게 생각난다. 작가는 그때 꿈은 소설가와 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 게 맞다며 내 꿈을 힘껏 응원해 주었다. 그 후로 오래도록 한 번도 꿈을 의심하지 않았다. 베스트셀러 작가나 문학상을 꿈꾸었던 게 아니었기에 한 번도 꿈을 이루지 못할 거라 의심하지 못했다. 10년도 더 흐른 뒤에야 돈을 벌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꿈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글을 쓰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시기를 지나 김연수 작가의 ‘지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 들며 다시 한번 꿈에 대해 생각해본다.
20대가 지난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렵지만,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삶을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는 것일 것이다. 스스로 지지하는 한 적어도 꿈은 흔들리지 않는다. 지지 않는다는 말이 꼭 승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란 작가의 말처럼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꼭 실패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한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진다. 조카들을 만나면 늦었지만 꿈에 대해 묻고 다시 답할 참이다.
화장실을 3분 이상 사용하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거나, 희망퇴직을 거부하는 직원이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거나, 휴게실이 없어 사람을 화장실에서 쉬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화장실이 없거나…… 이것을 야만이 아닌 다른 어떤 단어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용’은 진-한나라, ‘독수리’는 로마다. 비슷한 시기 출현해 이후 각각 동양과 서양의 모습을 상당 부분 규정한 두 제국은 비슷한 듯 달랐다. 그 닮은 부분에 대해서는 혹시 역사의 일반 법칙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유가와 한나라를 비판하고 법가와 진나라를 높이 평가하는 저자의 관점도 흥미롭다.
사랑스러운 문장.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갖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고? 일단 글을 쓰면 된다. 왜냐면 쓰는 행위는 바로 생각하는 행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쓰기는 곧 생각하기이다. 글을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글은 생각이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을 만드는 훈련이다.
p.27
책에 독후감, 서평, 비평을 비교해 놓았는데 여태 내가 쓰고 있던 건 독후감이었던 사실을 알았다. 읽는 데서 끝내지 말고 뭐라도 적어 놓자는 다짐을 또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