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 번째 그믐밤은 부산에서 열게 되었어요. 작년 9월 이후 1년만에 다시 찾은 부산의 그믐밤. 여름 더위가 가신 9월은 참 좋은 계절이어야 하는데 이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 부산으로 향하는 KTX 기차의 창문에 빗방울이 빗금을 긋습니다. 거 참, 파시스트 이야기하기 좋은 날이네요.
그믐밤에 우리들이 모이는 곳은 크레타 서점입니다. 부산 멋쟁이들이 모두 모인다는 서면에 위치하고 있네요. 크레타는 강동훈 책방지기님의 인생책 <그리스인 조르바> 의 배경이 되는 섬인데요, 그래서 특별히 이번 그믐밤의 책갈피 뒷면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문구를 삽입하였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눈으로는 많이 읽었는데 막상 그믐밤 때 발음하려니 혀가 꼬이더라고요. 태어나서 한 번도 소리 내어 이 작가의 이름을 발음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믐밤 1부는 이번 책을 번역하신 장현정 출판사 대표님께서 슬라이드까지 준비하셔서 이야기를 나눠주셨습니다. 6개월 생각하고 번역 작업에 들어갔는데 2년이 훨씬 넘게 걸렸다며 당분간 번역 활동은 예정에 없다 하시네요. ^^
1부 강연이 끝나고 2부는 참가자들과의 질의 응답이었습니다. 이 어렵고 무거운 주제로 과연 누가 질문을! 싶었지만 막상 2부는 끊이지 않는 질문으로 가득찼습니다. 프로 MC와도 같은 노하우를 보여주신 강동훈 책방지기님의 유려한 진행 덕분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파시즘을 막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결국 고민의 끝이 향하는 것은 이 지점이었을텐데요,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장현정 대표님 강연에서 힌트를 얻어봅니다.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헤게모니 투쟁 전략으로 진지전과 기동전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동전은 촛불연맹, 데모 등의 활동으로 예를 들 수 있겠네요. 적극적이고 효과가 즉각적이지만 누구나 기지전에 참가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발전한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기동전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요.
그렇더라도 우리 모두 작은 진지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진지전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들의 독서 모임이야말로 그 진지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참호 속에 숨어서 싸우듯 장기전을 펴는 혁명의 '진지전'! 그믐밤이 우리들 진지전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번 그믐밤 온라인, 오프라인 참가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미션 끝까지 수행해 주신 @오락가락 님, 큰 감동입니다.)
[책처방] 7. 일상적인 글쓰기를 잘 하고 싶어요. 관련한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평상시 책을 적게 읽는 사람은 아닙니다. 소설책을 비롯해 여러 분야의 책을 예전부터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요, 평상시 책은 꽤 읽으면서도 이상하게 ‘쓰기’라는 작업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읽을거리들이 이렇게 쌓여서 시간이 부족한데 무슨 글쓰기까지 라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들어 글쓰기에 관심과 흥미가 생기기 시작해 조금씩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읽는 것과는 달리 한없이 막막해지네요. 이런 제가 참고할 만한 책이 있을까요?
(중략) 저 같은 글쓰기 초보자도 계속 쓰면 나아지겠지요? 여러분의 추천 도서 하나씩 읽으며 용기를 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믐책처방은 그믐 회원들끼리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는 모임입니다. 삶의 순간에서 맞닥트리는 다양한 고민들, 책의 힘을 빌려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29일의 기간 동안 그믐 회원들이 이곳에서 함께 찾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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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를 읽다가 포기한 내가 다시 집어든 책은
'도련님' 이다. 아무래도 짧으니까...
도련님 냄새가 풀풀나는 20대 초중반의 젊은청년이 어느 시골 학교로 부임하게 되면서 접하는 이런저런 사회의 참(?)맛을 간결한 문체로 적은 책이다.
일본문학에서 소세키라고 하면 워낙 유명하고, 또 도련님 이라고 하면
대표작처럼 유명한 책이라 읽어본건데 생각보단 별로 재미가 없었다.....
권선징악적인 교훈을준다고 보기엔 선과 악을 나누기 애매한 등장인물들과 주인공은 뭔가 모르게 징징대기만(?) 하는 느낌을 주는데다가
마무리도 내 기준에선 특이하게 끝나는 바람에.....
아직 문학의 참맛을 알기엔 길이 너무나도 먼 듯하다
동물권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저자의 이야기에 백프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어떤 이유인건지 나 스스로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아마도 착취당하고 있는 대상,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타자화와 함께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에 많은 초점을 두는 접근이 불편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이 책을 읽는 동안 발견했다.
동물보호/ 동물운동에서 인간이 동물의 권리를 대리해야 할 때, 인간의 욕망과 동물의 권리를 혼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굳이 동물 뿐 아니더라도, 인간은 얼마나 많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한다'는 이유로 잘못 대하고 있는지. 동물이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든, 이해하고 위한다는 건 따듯한 감정의 건드림만으론 절대 충분하지 않다.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천천히 조심스레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첫발을 떼야 하는 일이다.
내 삶에서 동물의 세계를 중요하게 들여다 본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누군가에는 함께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만큼 관심 밖의 세상을 어떤 사람들은 찬찬히 조심스레 들여다보고 자신들의 세상을 더 넓게 그만큼 확장해간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크고 넓다.
p.19
현대 인간-동물 관계의 특징은 '가해 행위의 은폐'와 '죄의식의 소거'로 요약된다. 공장식 밀집 농장에서 숨을 헐떡이는 돼지의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돼지고기를 즐겁게 먹는다. 정글처럼 꾸며진 동물원에서 우리는 종종 그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하지만 비일상적인 사건은 항상 동물이 경계를 넘는 지점에서 발행한다. 거기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은폐된 적대가 드러난다.
p.109
19세기 중반까지도 전체 에너지원 중에서 동물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퍼센트를 웃돌았다.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되고 있음에도 석탄 에너지 사용량은 그보다 적었다,
p.142
인간은 물론 동물에게도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정동 affect'을 일으키는 힘이다. 동물의 몸과 인간의 몸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에게 사랑, 귀여움, 애착, 혐오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동시에 쓰다듬거나 안고 피하고 도망치는 등의 행위를 촉발한다. 그 과정에서 영향받는 것은 인간뿐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두 주체의 몸을 관통하며 흐르는 감정과 행동은 서로를 공명시킨다. 이렇게 몸과 몸을 연계하는 에너지 혹은 능력을 정동이라고 한다.
<중략>
그러나 공장식 축산은 정동의 힘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비가시적인 장소로 동물을 이동시켜 착취를 은폐하고, 만남을 제한함으로써 인간의 죄의식을 지워 버렸다.
p.162
평화와 인도주의, 동물 권리 등 고매한 이상에 감복해 동물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의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런 통찰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겉으로는 인간이 동물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물의 고통은 우리 몸에 내장된 '공감 회로'를 더욱 증폭해 종국에는 사회의 변화를 일으킨다.
<중략>
산천어는 귀여운 동물도 아니고, 학대받는 장면이 끔찍하지도 않다. 역설적이지만 이 때문에 산천어 축제 반대 운동은 의미가 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동물을 보호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203
우리는 동물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까닭은, 동물에 대한 사물화와 의인화를 분열증 환자처럼 오가기 때문이다.
p.213
이들의 삶과 행동은 대개 의인화를 거쳐 즐거운 모습으로 포장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우리가 이들을 물건으로 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동물원은 신체의 감옥이자, 의인화의 감옥이다. 인간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기 위해 동물은 인간처럼 꾸며지지만 (의인화), 인간에게 위협적인 순간이 발생하면 즉각 사살되어도 되는 물건으로 전락한다 (사물화).
<중략>
'애초에 하람베가 왜 동물원에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동물원은 평생 우리 안에 갇혀 사는 동물을 왜 계속 만들어 내는지'를 우리가 질문해야 합니다.
p.279
이들이 설파하는 야생 보전 담론은 집단적 '종'의 지속가능성을 목표로 둔다. 개별 개체의 '생명'이 아니다.
<중략>
마을의 번영을 위해 매년 사람 한 명을 이무기에게 바치는 게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매년 쿼터를 정해 놓고 사자를 죽이는 게 동물의 왕국을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이런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게 동물권의 사유 방식이다.
p.342
두 학자는 "동물 운동은 난관에 봉착했다"는 문장으로 <주폴리스>를 시작한다. 동물복지, 동물 권리, 생태학 이론이 더는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인은 정치적인 기획이 없다는 데 있다. 고통에 기반한 이론들을 '공장식 축산 반대'라는 대문자 정치나 '채식'으로 끝나는 개인적 윤리 지침에서 멈춰 버리고 만다. 학계에서는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철학, 지리학, 인류학에서 만개하고 있지만, 정치학에서 여전히 동물은 소외된 주제이다.
p.343
우선 두 학자는 모든 동물에게 보편적 기본권이 있다고 말한다. 보호자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권리,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 서식지를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동물을 세 범주로 나누어 각자의 개별권이 있고 이에 따라 대우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반려동물 및 농장동물을 포함한 '길들인 동물 domesticated animals', 야생 영역을 지키며 제 기준에 따라 사는 '야생동물 wild animals', 인간 거주지에서 문화와 야생의 경계에 사는 길고양이, 다람쥐, 비둘기 등 '경계동물 liminal animals' 에게는 각기 구분되는 정치적 권리가 있다. 요약하자면, 길들인 동물에게는 시민권을, 야생동물에게는 자치권을, 경계동물에게는 거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p.365
미국의 포스트휴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동물과의 윤리를 '응답-능력 response-ability 에서 찾는다.
<중략>
따라서 윤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유일한 윤리 기준은 동물이 우리를 응시할 때 응답하느냐 response 마느냐다. 응답은 획일적이어선 안 된다. 그것은 쉽지 않아서 동물에 대해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고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수련해야 한다.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할지라도 동물을 인간과 무관한 어떤 것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하며, 동물들의 말 없는 부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따라서 수련을 통해 얻어진 '응답-능력'이 중요하다.
p.373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반달곰의 행동을 집단적 종의 '생태'로 일반화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개체는 생태를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청소년이 됐으니 '번식해야겠다'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듯이.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에게는 세계와의 조우, 감각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독립적인 다수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책의 내용인 ‘무지원 단독 남극 도보 횡단’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 순전히 작가의 전작 『플라워 문』에 반해서 찾아 펼치게 됐다. 필력은 역시 훌륭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결말이 애매하다. 애초에 왜 이 소재에 저자가 끌렸는지 잘 모르겠다.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벌어진 끔찍한 연쇄 살인사건과 미국 연방수사국의 탄생. 흥미진진한 수사극이면서 불편한 과거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를 묻는 진지한 논픽션이기도 하다. 읽으며 마틴 스콜세지가 정말 좋아할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판권을 샀다고.
[책처방] 6. 청소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책을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등학생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중략) 문학 작품을 좋아하지만 인문 사회 과학 부문 교양 도서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기초 과학에 근거한 적정 기술을 연구하여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으며, 깊은 성찰과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희망을 일구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아이와 함께 읽고 싶습니다.
좋은 책 많이 추천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믐책처방은 그믐 회원들끼리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는 모임입니다. 삶의 순간에서 맞닥트리는 다양한 고민들, 책의 힘을 빌려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29일의 기간 동안 그믐 회원들이 이곳에서 함께 찾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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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처방] 5.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개인과 국가의 이해의 충돌은 어디에 기인하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져서 관련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들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기 시작했고,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사두었는데(일단 제목에 국가가 들어갔길래), 도움 될 책들을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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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과 똑같이 생기고 기능하는 로봇을 샀는데 걔가 내 여친을 사랑한다질 않나, 암튼 말을 안 들어서 결국 죽여?부숴?버린 이야기. 이런 간단한 줄거리 안에 엄청난 질문과 고민이 들어있다. 로봇을 죽인건지 부순건지 부터가 이미 어려운 질문이다. 그들에게 어떤 생물학적 지위를 부여할 것인가, 아니 애초에 인간이 그들에게 어떤 지위나 역할을 부여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인간을 대체하여 노동하는 로봇, 로봇의 권리와 도덕적 책임,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와 사랑, 로봇을 둘러싼 사회 질서와 국가 정책의 변화, 기술 불평등과 경제적 격차 등의 문제들을 다룬다. 생각할 거리들이 너무 많아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언 매큐언은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간 심리와 윤리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사회적 의미와 문학적 가치가 모두 높이 평가 받는다. 1998년에 안락사를 다룬 작품 <암스테르담>으로 부커 상을 받았다. 이 책에서는 곧 도래할 로봇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점들을 꼬집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로봇이 내 여찬이랑 잔 것에 대해) 나의 분노를 정당화하려면 아담에게 행동력, 자발성, 주관적 감정, 자의식 -배반, 배신, 기만을 포함하는 전부-이 있다고 나 스스로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다. 기계의 의식-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건 해묵은 질문이었다.
겉보기론 인간이랑 구분이 안 되는 로봇이, 내가 돈 주고 산 내 로봇이, 내 맘에 안 드는 일을 했다고 때려 부수(죽이)거나 내다 팔면 안된다는 게 이 책의 내용이긴 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남성로봇과의 섹스는 바이브레이터를 이용한 자위와 다른가 같은가, 부터 해서 흥미진진한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들고 올 수가 없다.
셀리 케이건은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에서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로봇이라고 해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썼다. 소설 <나 같은 기계들> 속의 로봇과학자 엘런 튜링(실존 인물이면서 소설속 가상의 인물이기도 함)도 '기계와 인간의 행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계에 인간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미래의 동반자 로봇들과 우리는 어떻게 어울려 살아가게 될까, 궁금해 죽겠다.
생물과 무생물의 명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내가 동일한 물리법칙에 묶여있다는 사실은 남아있었다. 어쩌면 생물학은 내게 특별한 지위를 제공하지 못하고, 내 앞에 서 있는 형상이 온전히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는 건 거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몇 년전 동료에게서 6살짜리 아들이 자신에게 했다는 질문을 듣고 그 순수함과 뼈 때리는 현실성에 웃다가 울고 싶었던 적이 있다.
"우리 ㅇㅇ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경찰관이랑 소방관!"
"음... 그래 (경찰관이나 소방 공무원도 안정적이고 나쁘지 않지). 근데 아빠는 우리 ㅇㅇ 가 의사 선생님해도 좋을 것 같은데?
"경찰관이나 소방관!! 음.. 근데, 아빠는 뭐 된거 없지?"
하아....그 동료나 나는 과연 뭐가 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주 5일 어떤 일을 하며 월급을 받고 있다고 6살 아이에게 나의 노동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특정 직업이 소재나 배경인 소설을 접할 때 마다 종종 부럽게 느껴진 적이 있다. 의사, 판사, 변호사, 기자, 작가, 교수, 경찰.. 이렇게 유치원 아이들도 알만한 직업들은 이미지조차 쉽게 떠오르는데, 내가 출퇴근 전철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회사원'들은 과연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들을 하루 8시간씩 하고 있는 것일까?
특정 직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일반 '회사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회사원의 모습은 소설에서 잘 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소설로 쓰기엔 너무 평범한 보통의 일상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지난 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점심 식사 후 "이제 그 한식 부페 1000원 오르고 야쿠르트도 안줘요." 라는 이야기에 혼자 웃음을 참았고, 바로 몇일 후 <광합성 런치> 에서 비슷한 구절을 보며 또 한번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미생>을 보며 웃고 울었을 것이다. 어느 시절의 내 이야기같고 언젠가의 내 모습일까봐.
좋아하는 일, 가치있는 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직업을 갖는게 가장 좋지만 여전히 내게는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밥벌이로서의 노동"이 직업의 0순위 목적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나란 존재를, 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 단단한 기초가 다져진 이후에 더 큰 의미를 찾고 싶은게 내가 직업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물론 그 공간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였으면 좋겠고, 나의 이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떤 글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20년 전쯤의 어느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바로 몇년 전 혹은 얼마 전의 내 주변도 생각나게 했다. 다만 앤솔로지를 기다리며 기대한, 자영업자가 소재인 단편이 없었던 건 조금 아쉬운 점이다. 첫번째 단편에서 살짝 나오긴 했지만, 우리 모두의 주변에 자영업자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리고 최근 몇년간 가장 힘든 시기를 겪어온 사람들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그 이야기들이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p. 69/ 72 <밤의 벤치>
숙제를 다 하면 선생님이 캐릭터를 하나씩 그려준다고 했다. 은솔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이 무엇인지 순서대로 짚었다. 민지가 선생님을 좋아해요. 선생님 오는 날만 기다려요. 예전에 학부모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경진은 예의상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한낮에 번화한 거리를 걸을 때면 아직도 오래전 그 편의점의 파라솔과 분식점의 창가 자리가 떠오르고 거기 앉아 밥을 먹고 숨을 돌리던 자신이 생각났다. 어떤 시기의 자신을 거기에 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경진은 밤의 벤치에도 자신의 일부를 두고 왔고 그것이 영영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p.121 <광합성 런치>
바닥에 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걸 보니 알루미늄 수출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껌을 포장하는 데 알루미늄포일만큼 좋은 것도 없다. 껌의 수분을 적절하게 보존해주고, 여름엔 열을 밖으로 내보내 껌이 녹는 것을 방지해준다. 버릴 땐 작게 뭉쳐서 버릴 수 있으니 편리하기까지 하다. 얇은 종이에 그렇게 많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우리 회사에선 내가 껌종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재씨는 알까. 식대 인상을 제안하며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잔머리를 굴렸는지 알까. 대표가 너무 까칠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수분을 적절하게 보존해주고, 직원들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 녹는 것을 방지해주는 사람. 그러나 버려질 땐 껌종이처럼 꼬깃하게 뭉쳐져 가차없이 던져지는 존재. 그게 나라는 걸.
p.144 <기초를 닦습니다>
그 반년동안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다름 아닌 예산에 대한 감이었다. 설계를 하며 이런 디테일에 이런 자재를 추가하면 얼마나 공기가 늘고 예산이 늘어나나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당시엔 자신이 예산에 맞춰 설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을 해보니 실은 시행사 측에서 그 예산에 맞춰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P. 169/ 189/ 203 <간장에 독>
나는 이중구가 그렇게 내면이 복잡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연출할 줄 아는 캐릭터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는 전혀 계획적이지 않고 소심하기 그지 없는 인간인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되게 계산이 빠르고 과묵한 능력자로 본다고. 당치도 않은 공격을 받으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있는 건데 그걸 침착한 거라고 여긴다고.
출근하고 두 달쯤 뒤에 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닫았다. 사람들이 다는 댓글에서 미세한 적대감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어 올렸을 때 거기에 달리는 '나도 출근해서 식사하고 싶네. 집에서 가정부 신세 다섯 달째' 같은 댓글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어떤 가능성이 있었어. 약하지만 말랑말랑하고 따듯한 가능성이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세 살 차이는 심하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문장들 외에 다른 생각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라는 게 어디에서 떠오르는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각이 이런 식으로 떠오를까, 문장 형태로 떠오르지 않는 생각은 생각이 아닌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기근을 겪었고, 앞으로도 기근이 몇 번 더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내가 딱히 잘나가거나 뭘 잘했던 건 아니었다.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옛날 사람들은 기근 때에도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았을까, 인간의 생존 능력이란 참으로 징글징글하다.
p.230/ 231<숨바꼭질>
"억울해? 우리 같은 사람은 너무 올라도 불안해서 못 견뎌. 그때까지 버틴 놈이 대단한 놈이야. 그런 전사의 심장을 가진 놈은 그 돈을 먹을 자겨이 있다고 봐. 당신이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아?"
"생각이 복잡하면 일단 처음으로 돌아가.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해. 우리처럼 별 재주가 없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게 최선이야."
p.311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
누구는 값싼 단가에는 저렴한 품질로 대응한다고, 콩 심은데 팥이 날 순 없다고 강변했지만 결국 자기 작품, 자기 농사라 생각하면 콩값을 받고도 팥을 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