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마냥 주저 앉아 우는 법이 없다. 누군가를 마냥 울게 놓아두지도 않는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아픈 건 아픈 거고, 일단 서로의 빈 속부터 든든히 채워 다시 출발할 뱃심을 만들어준다.
학교 안가니?
자음과모음 (e-book, 231201~231202)
❝ 별점: ★★★★☆
❝ 한줄평: 그래도 엄마··· 많이 사랑하시죠?
❝ 키워드: 코로나, 엄마, 딸, 애증, 부양, 돈, 삶, 꿈
❝ 추천: 엄마와 딸의 ‘변신담 세 편’이 궁금한 사람
❝ 누군가의 삶을 고스란히 소설로 옮기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에 대해서만 쓸 수 있고, 어쩌면 그건 반쪽짜리 진실이 되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
/ 에세이 | 무지개떡처럼
📝 (23/12/03)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에는 작가의 에세이와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함께 실려 있다는 게 참 좋다. 이서수 작가님의 소설집을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코로나 시대의 세 모녀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면서도 때론 가슴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여러 생각이 드는 복잡미묘한 소설들이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뭉클해지고 울컥해질 때가 있다. 엄마가 조금 더 나이가 든 후에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면 좀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엄마’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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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절에 버리러」 ⛤
| 우리에겐 아직 폭죽이 많이 남아 있었다. 팡 터뜨리고, 와아 감탄하고, 피시식 사라질 폭죽이 100발 넘게 남아 있었다. 엄마의 손에 불붙은 폭죽을 건네주며 나는 이 순간을 엄마가 영원히 기억하길 바랐다. 우리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그날에도. 찬란하게 떠올라 이내 어두운 바다 속으로 녹아 사라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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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늑대 김수련의 사랑」
| 그날부터 내 꿈은 깊숙한 상자 속에 숨겨놓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소설을 쓰고 있다. 투잡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처럼 말하며 소설을 쓰고 있는데, 엄마는 알까. 실은 소설 쓰는 게 너무 즐겁다. 즐거운데 즐겁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끼는 엄마처럼 나 역시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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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 서한지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엄마, 대단한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엄마가 좋아하는 알밤, 그걸 떠올려봐. 벌레 먹은 밤을 집어 들면 에잇 속았다, 그런 표정으로 웃잖아. 인생도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 자꾸 벌레 먹은 밤만 집어 들어서 속상해도 웃어넘기고 마는 것처럼, 그냥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 대단해지려고 하지 마. 남들하고 비교하느라 엄마가 그렇게 속이 아픈 거야. 엄마는 엄마의 길을 묵묵히 가면 돼. 그것이 지극히 초라한 길이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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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231129~231130)
❝ 별점: ★★★☆
❝ 한줄평: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죽을지 선택한다는 것
❝ 키워드: 인간 | 로봇 | 흡혈인 | 인조인간 | 말살 | 안전장치 | 기계 | 인공태양 | 아포칼립스
❝ 추천: 절체절명의 생존 위기 속 존재들의 치열한 고민과 싸움이 흥미로운 사람
❝ 약육강식의 절대적 법칙이 깔린 세계에서, 기어코 자신이기를 선택해 밤을 걷는 존재들이 있다. ❞ (천선란, 「발문」 | p.135)
🌌 첫 문장: 핵융합이 일어나는 조건은 온도, 밀도, 가둠시간, 이 세 가지라고 로슨Lawson이라는 영국 학자가 밝혀냈다. (p.7)
📝 (23/11/30)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들 중 세 번째로 읽게 된 이 책. 좋아하는 천선란 작가님이 발문을 쓰셨다고 해서 더욱 궁금했다.
✦ 『고통에 관하여』보다는 가볍지만 『호』보다는 묵직한, 딱 중편소설 볼륨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장편소설이었다면 조금 더 내용이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장면들이 있어 짧은 분량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 ‘약육강식의 절대적 법칙이 깔린 세계에서, 기어코 자신이기를 선택해 밤을 걷는 존재들’이라는 천선란 작가님의 문장이 참 인상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생존자들, 인류를 말살하고자 하는 로봇, 로봇의 노예가 되어 충실하게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로봇 신봉자들, ‘인간과 기계의 합작품’인 흡혈인, 그리고 인간을 닮았고, 자신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인간형 로봇, 빌리. 이들 중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고자 하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존재, 그들이 ‘밤을 걷는 존재들’이다.
✦ ‘화장실의 미친 여자’ 이야기가 더 풀리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원래 ‘화장실의 미친 여자’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이 소설로 발전한 것이라는데, ‘화장실의 미친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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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언제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에 무척 능숙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인간을 잘 죽이지 못했다. (p.17)
|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나에게는 없다. 피도 눈물도 땀도 체온도. 생명도. (p.83)
| 빌리는 죽었다. 빌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인조인간 제작소를 파괴하기는커녕 인간형 로봇들도 완전히 처치하지 못했다. 기계들의 계획은 하나도 저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하도 끝에 몰렸다. 밖에는 태양이 내리쬔다. 우리는 갇혔다. (p.122)
| 노예의 순리는 필요 없다. 나도 나의 죽음을, 내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햇빛 아래 재가 되어 사라지거나, 끝없는 밤하늘 아래 목이 잘리거나.
어느 쪽이든, 오늘은 아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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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즈니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띄엄띄엄 판타지 영웅물인 딜비쉬 연작들을 썼는데 큰 야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딜비쉬 연대기 1권인 이 책에는 중단편이 11편 실려 있다. 그런데 나는 말하는 동물이 영리한 조연 캐릭터로 나와 주인공과 만담하는 장면이 나오면 꼼짝없이 호감을 느끼고 만다.
이 책을 오래 가지고 있다가 동네서점에 기증했는데 그 일을 가끔 후회하곤 한다. 단순히 분위기만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숨은 장치를 내가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모호한 단편들이 실려 있다. 데뷔작 「수난극」 해설에서 젤라즈니는 작가가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면 그 수준으로 계속 글을 쓸 건지, 약점을 적극적으로 보강하는 도전을 벌일 건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과지성사 (231125~231129)
❝ 별점: ★★★☆
❝ 한줄평: 사람과 삶,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 세 편
❝ 키워드: 구별, 의식 | 계획, 보상 | 사랑, 증오
❝ 추천: 사람, 삶, 사랑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 (23/11/30) 『소설 보다 : 여름(2021)』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봄도 구매했었는데, 가을 먼저 읽고 봄을 이제야 읽은 이유는 생각보다 두께가 있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소설들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은 찾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에서는 타인을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면서 자신과 구별 짓는 화자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고, 「오늘 할 일」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좋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랑과 결함」이세 편 중 제일 인상적이었지만 이 단편도 잘 읽혔다기 보다는 어딘가 불편하고 찜찜한 구석이 있어 곰곰 생각하며 읽었다. 인물들에 충분히 이입하고 읽지 못해서일까.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 읽으면 다를까? 재독을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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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 단체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움직임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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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나현, 「오늘 할 일」
| 어제와 비슷한 오늘도 괜찮은 것인지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눈앞에는 없었다.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 다가올 계절이 아직은 믿어지지 않았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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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소연, 「사랑과 결함」 ⛤
|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고모나 엄마는 그저 나에게 끔찍한 사랑을 흠뻑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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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삶의 터전이 단단할수록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그것이 모순으로 느껴졌고 일탈마저 특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p.71)
| 이 소설에는 '삶은 통제되지 않는 것' 혹은 '삶은 우연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믿음이 반영되어 있어요. 사실 계획을 세우는 일이란 통제되지 않는 삶을 손에 쥐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걑거든요. (p.138-139)
| 물론 어떤 함의를 지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에게 '사랑'은 어찌 보면 가혹한 것과 같거든요. 마음을 주게 됨으로써 일어날 예기치 못한 일들을 감수하게끔 하는 감정입니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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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파수는 웃기거나 울리려고 하지 않아서 좋았다. 착한 척도 좋은 척도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 라디오를 아껴가며 들었다. 아끼고 아꼈다가 쉬고 싶을 때, 힘들 때, 죽고 싶을 때, 잠들기 전에 기도하듯이 들었다.
p.135
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만 겪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조상들의 전쟁에 휘말려 평생을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나 질병은 선택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 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 까?
p.149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무럭무럭 자라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사람은 뭐든지 죽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작살낼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할 수도 있다.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p.163
나는 솔직히 이 중단편집의 표제작이 닭살스러웠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금성의 바다 괴수를 사냥하는 커플이 나오는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금성의 풍광이나 괴물의 묘사도, 캐릭터들도 무척 매력적이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와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다.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의 문장은 『표백』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단편이 개정판에서는 빠졌다.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와 SF의 결합. 그런데 젤라즈니의 전형적인 초인 주인공이 현재 시점에서 하는 일이 많지 않다. 젤라즈니가 신화나 설화, 종교를 차용할 때 그 밑바닥에 깔린 철학이 아닌 외피만을 가져온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외피도 중요하다고 (그리고 멋지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은 대단한 성취라고 보기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절판된 시공사 판에는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가 함께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