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비슷한 요청을 받다 보니 답도 비슷하게 하게 되는데, 개중에 요청한 측에서 놀라며 되묻는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그레고리 맨큐의 『맨큐의 경제학』, 다른 책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맨큐의 경제학』도 두툼한 벽돌책이니 언젠가 다뤄 보기로 하고, 오늘은 후자 이야기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을 실제로 학생들에게 독서토론 과제로 내주려 하는 분들이 “정말 이걸로요?” 하는 반응을 보인다. 1406쪽이라는 페이지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테고, 책값도 만만치 않다. 상대가 곤란하다고 하면 다른 책을 고르기는 하지만 나는 속으로 아쉬워한다. 두꺼워서 그렇지 전혀 어렵지 않고, 매우 재미있는 데다 청년기에 읽으면 특히 좋을 책이라서 그렇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꾸준히 감소했고, 여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 ‘우리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주장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펄쩍 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벌어진 20세기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였다는 주장에도. 심리학자인 저자는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에서부터 사회학, 경제학, 생물학, 신경과학, 때로 문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영역을 누비며 설득력 있는 증거와 이론을 제시한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잘못 짐작하면 안 된다. 인간이 모두 천사이며, 우리 본성을 믿으면 폭력이 저절로 줄어들 거라는 내용이 절대 아니다. 핑커의 견해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그는 계몽주의와 상업, 기술 발달이 폭력 감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논증하면서 ‘측은지심’의 한계를 지적한다. 우리 본성의 악마와 그 악마를 부추기는 힘도 섬뜩하게 설명한다. 우리 안의 악마를 억누르고 천사를 북돋우려면 정교한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
아주 냉철하지만 보기 드물게 희망적인 책이기에 특히 청춘에게 권한다. 인간 존재에 염증이 생기고 진보를 더 믿을 수 없을 때 이 책은 해독제와 같다. 더디긴 해도 역사는 발전하며, 우리의 이성이 해답이라고 외친다. 내게는 이런 방대한 지적 프로젝트를 한 사람이 수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희망으로 느껴진다. 물론 다른 세대 독자에게도 강력히 추천한다.
낮의 세계이자 과학의 세계인 데이사이드, 밤의 세계이자 마법의 세계인 다크사이드.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도둑 주인공과 숙적 박쥐 군주. 거의 동화나 우화 같은 설정의 소품이다. 결말은 멋있다면 멋있고 귀엽다면 귀엽다.
젤라즈니는 휴고상을 여섯 번, 네뷸러상을 세 번 수상했는데, 한 작품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모두 받은 적이 있다. 그게 바로 이 중편. 정작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읽었는데 이게 연작의 일부라서, 전체 이야기를 읽으면 감상이 바뀔지 궁금하다. 앰버 연대기는 기이하게도 휴고상도, 네뷸러상도, 로커스 상도 받지 못했다.
자음과모음 (e-book, 231203~231204)
❝ 별점: ★★★★
❝ 한줄평: 너와 나, 우리가 아닌 ‘누’
❝ 키워드: 너와 나 | 우리 | 언어 | 애도 | 사랑 | 구원
❝ 추천: 너와 나, ‘누’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에 부여된 자리들에 대한 고발이자 자리 없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
/ 해설 | 소영현, 자리 없는 여자들
📝 (23/12/05) 이주혜 작가님은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 가을(2023)』에 실린 「이소 중입니다」로 처음 만나게 된 작가님이다. 소설도 좋았지만 인터뷰가 특히나 인상적이어서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전자책이 있길래 읽어 보았다.
「누의 자리」와 「골목의 근태」가 ‘제비 뜨개방’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처음과 끝에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면, 「소금의 맛」은 하얗고 빛이 나는 소금 기둥처럼 반짝거리는 두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 이야기가 아름답다. 작가의 에세이도 참 좋았다. 사실과 거짓말, 그리고 그 사이의 ‘이야기’.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그들의 얼굴. 이주혜라는 작가와 그의 세계를 더 알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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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을 위한 무대’인 ‘누’를 만들어준 이를 위한 자리
| 내게 ‘누’는 ‘누구’가 아니야. ‘누’는 ‘너와 나’야. (…) ‘누’라는 무대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 올리고 싶어.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을 위한 단어야. 내가 그렇게 언명했어.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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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맛」 ⛤
: 소금의 값과 소금의 맛, 그리고 사랑의 값과 사랑의 맛
| 하이스미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소설 속 캐롤과 테레즈의 고통에 집중했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마태복음」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거라면 고통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금은 짜야한다. 그게 소금의 값이고 소금의 대가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입을 빌리면 이런 말이 되겠지요. 이 사랑은 고통이다. 그게이 사랑의 값이고 대가이다. 소금은 짜서 소금이고 이 사랑은 고통이지만 끝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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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근태」
: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되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 누구도 내가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벌을 받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를 낳고 키워준 친정 엄마마저도 이혼 직후 친정에 와 누워 있는 내게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미가 되어서는 왜 그렇게 일 욕심을 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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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나바호 원주민 신화와 SF의 결합. 젤라즈니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설정들도 있지만,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 면들도 있다. 2부의 관념적인 전개도 그렇고, 마초이기는 하지만 패배감 속에서 구원을 찾는 주인공의 모습도 그렇고. 나는 그런 차이점들이 좋았다. 저자 역시 1부보다 2부에 더 무게를 둔 것 같다.
위저드 월드 시리즈 2편. 1편에서 젤라즈니는 마법의 손을 들어줬고, 2편은 마법의 아들 폴 데트슨이 이야기를 혼자 이끌어간다. 전작 『체인질링』이 돌직구였다면 이 작품은 커브 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모호한 이야기를 젤라즈니보다 더 빠르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가는 없을 것 같다.
읻다 넘나리 1기 (231201~231203)
❝ 별점: ★★★★
❝ 한줄평: 불처럼 창작하고, 사랑하고, 미지에 도달한 투시자 랭보
❝ 키워드: 편지 | 시 | 시인 | 낭만주의 | 상징주의 | 투시자 | 인식 | 감각 | 착란 | 미지
❝ 추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랭보의 편지에 담긴 그의 시에 대한 열망과 생각이 궁금한 사람
❝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고통은 어마어마하지만,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
/ 1871년 5월 13일, 샤를빌,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
❝ 자유와 미지에의 욕구가 현실과 타인을 마주하며 형상을 취하는 순간들이 이 편지들에 담겨 있다. ❞
/ 옮긴이의 말
📝 (23/12/04) 올해 민음북클럽 잡동산이에 실린 랭보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철 — 서시」를 통해 그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파격적인 시에 놀라 어떤 시인인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삶이 굉장히 파란만장했고, 의외로 시인으로 시를 쓴 기간이 길지 않아 남긴 작품도 『지옥에서 보낸 한철 Une saison en enfer』과 『일뤼미나시옹 Les Illuminations』 둘 뿐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랭보는 나에게 ‘굉장히 어린 나이에 시에 재능을 보였으나 절필한 후 세상을 떠돌다가 암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불운한 천재 시인’이라는 인상으로 남았다. 읻다 넘나리 마지막 선택 도서로 서한집 여러 권 중 『랭보 서한집』을 고른 것은 시에 관한 그의 생각이나 당대에는 파격적이었던 결혼한 시인 폴 베를렌과의 사랑이 조금 더 알고 싶어 졌기 때문이었다.
✦ 『랭보 서한집』은 ‘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열다섯 시절부터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일뤼미나시옹』에 담긴 시를 쓴 스물한 살 무렵까지 랭보의 창작 시기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서한과 절필 이후,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간 랭보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편지 몇 편을 더해’ (출판사 소개) 묶어낸 책으로, 시에 대한 열정으로 넘쳐흐르는 생명력이 돋보이는 창작 시기의 편지와, 절필 이후 사업 이야기나 근황, 안부 이야기가 담긴 편지부터 죽기 직전 사그라드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한 편지가 담겨 있어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뒤에 실린 편지 해설과 옮긴이의 말, 그리고 랭보 연보에서 랭보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이나 주변의 상황이나 사건, 문단 경향, 시대상 등을 살펴볼 수 있어 더욱 도움이 되었다.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 편지 원본 이미지 등도매우 흥미로웠다.
✦ 『랭보 서한집』에는 시가 12편 실려 있는데, 그중 6편이 정식 발표되지 않은 시라고 한다. 편지를 찾지 못했다면 영영 공개되지 않았을 미발표 시가 담긴 소중한 기록이다. 서한집에 실린 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시는 「오필리아」였는데, 존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가 떠올라 찾아보니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라고 한다.
✦ 랭보가 폴 베를렌과 주고받았을 편지의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고, 이 서한집에 실린 편지는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쏴 두 사람이 조사받을 때 압수된 소지품에 들어 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편지에는 랭보가 베를렌에게 제발 돌아와 달라는 말, 진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 심지어는 그의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악담에 그들이 다시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자유를 잃는 것 같은 끔찍한 지긋지긋함에 회한을 느낄 것이라 퍼붓는 저주, 그리고 다시 사랑한다고 돌아와달라는 말까지 담겨 있다. 엄청나게 솔직한 편지여서 절필 후의 아주 담백한 문체와는 아주 대조적이었고, 그게 매우 흥미로웠다.
✦ 랭보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인식’이 필요하며, 시인은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미지에 도달’해 투시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시대의 차이가 있어 그 당시와 지금의 십 대가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랭보는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확립할 수 있었을까? 특히 ‘투시자의 편지’라고 알려진 폴 드므니에게 보낸 1871년 5월 15일의 편지는 읽는 내내 감탄만 나왔다.
✦ ‘자유로운 자유’를 갈망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투시자’로 만들고자 했던 사람. 이른 나이에 절필하고 세상을 방랑하며, 그는 원하던 ‘자유로운 자유’를 찾을 수 있었을까? 이 서한집을 읽고 나니 그의 삶이 불운하지만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읻다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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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스승님께,
우리는 사랑의 계절에 있고, 저는 곧 열일곱 살이 됩니다. 흔히 말하듯이 희망과 몽상의 나이이지요, — 그리하여 여기 저는, 뮤즈의 손가락이 닿은 아이로서, — 진부하다면 죄송합니다 — 제 신실한 믿음, 저의 희망, 저의 감각, 시인들의 것인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 저는 그걸 봄의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 1870년 5월 24일, 샤를빌,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보낸 편지
| 제 말은, 투시자여야 하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며, 조리 있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됩니다. 온갖 형식의 사랑, 고통, 광기, 그는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온갖 독을 길어내어, 거기서 정수만을 간직합니다. 모든 믿음을, 모든 초인적 힘을 동원해야 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이지요. 거기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환자, 위대한 범죄자,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 또한 지고의 학자가 됩니다! — 그는 미지에 도달하니까요! (p.68)
/ 1871년 5월 15일, 샤를빌,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 이러한 시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자의 끝없는 예속 상태가 분쇄될 때, 남자, 여태까지 가증스러웠던 그가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여자가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 역시, 시인이 될 것입니다! 여자는 미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사고들의 세계는 우리들의 것과 다를까요? — 여자는 이상한 것들, 불가사의한 것들, 역겨운 것들, 감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이해할 것입니다. (p.76)
/ 1871년 5월 15일, 샤를빌,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 유일하게 진정한 말은 이거야. 돌아와, 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너를 사랑해. 이 말을 귀담아 듣는다면, 용기와 진정한 마음을 보여줄 테지.
아니라면, 널 딱하게 여길 거야.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네게 입맞춤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볼 거야. (p.126)
/ 1873년 7월 5일, 런던, 폴 베를렌에게 보낸 편지
| 밤낮으로 갖가지 이동 수단들을 고려해본다. 그게 진짜 고문이야! 이런저런 것을 하고 싶고, 여기 또 저기를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살고 싶고, 떠나고 싶은데, 불가능해. 오랫동안 불가능할 테지, 영영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말이지만! (p.161-162)
/ 1891년 7월 15일, 마르세유, 누이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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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월드 시리즈 1편. 세계관을 잘 만드는 작가가 활동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리즈물을 여러 편 쓰게 되는 걸까? 의붓형제 관계이기도 한 마법의 아들과 과학의 아들이 젤라즈니 풍의 전쟁을 벌인다. 작가도 어깨 힘 빼고 즐기면서 쓴 것 같다. 문장과 묘사가 매우 효율적이다. 짧은데 생생하고 개성적이기까지 하다.
딜비쉬 연대기의 완결편이자 장편소설. 솔직히 딜비쉬가 젤레락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큰 관심이 생기지 않고 크툴루 신화에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심드렁하게 읽었다. 뭘 써도 재미있을 것 같은 작가가 재미없는 소설도 썼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는 점이 나름의 수확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