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240103~240118)
❝ 별점: ★★★★
❝ 한줄평: 여러 의미를 품은 밤
❝ 키워드: 시간 | 밤 | 잠 | 생각 | 슬픔 | 진실 | 꿈 | 두려움
❝ 추천: 밤의 여러 이미지와 의미를 품은 시들이 궁금한 사람
❝ 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아늑하게 내려앉고 있습니다 ❞
/ 「비좁은 밤」 (p.116)
———······———······———
✦ 김소연 시인의 시집은 처음 읽어본다. 문학동네의 시 뉴스레터 ‘우리는 시를 사랑해’의 필진으로 참여하시게 되었다 해서 그의 시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 쉽게 읽히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문장들에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시집은 아니었다. 단어와 문장들을 꼭꼭 잘 씹어서 소화하고픈 시집이었다.
✦ 제목 ‘촉진하는 밤’에서 알 수 있듯 ‘밤’을 담은 시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상상’(「이 느린 물」, p.22)하게 하고, ‘나를 숨겨주고 더 많은 나를 깊이 은닉해주는’(「푸른얼음」, p.70) 밤. ‘너무 많은 말들이 밤으로 밀려가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헤아리다 만 생각들이 밤에게 도착하고, 후회가 낮을 배웅하며 밤을 기다리고, 다시 밤은 사방에서 모여들어 아늑하게 내려앉는’(「비좁은 밤」, p.116) 것. 밤의 다양한 모습들을 본 것 같아 좋았다. [📝 24/01/18]
———······———······———
🫧 시인의 말
우리는 너무 떨어져 살아서 만날 때마다 방을 잡았다.
그 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파티를 했다.
자정을 훌쩍 넘기면 한 사람씩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누군가는 체크아웃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있었다.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그 방 창문을 나는 한 번쯤 올려다보았다.
2023년 9월
김소연
———······———······———
❝
그녀는
커튼을 들추고
창문 앞에 서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창문 하나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상상했다
저 사람은 불만 켜둔 채로 깊이 잠든 걸까
불이 꺼진 어떤 방에도 잠들지 못한
누군가가 있을까
/ 「이 느린 물」 (p.22)
❝
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
그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야
견디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는지를 더 이상 모르므로
/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p.91)
———······———······———
🗒️ 좋았던 시
1부
✎ 「며칠 후」 ⛤
✎ 「촉진하는 밤」
✎ 「이 느린 물」 ⛤
✎ 「2층 관객 라운지」
✎ 「문워크」
✎ 「푸른얼음」 ⛤
2부
✎ 「꽃을 두고 오기」
✎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
✎ 「비좁은 밤」 ⛤
✎ 「디버깅」 ⛤
✎ 「내가 시인이라면」
———······———······———
문학동네에서 만화책도 냈나? 싶어 살펴보니 그 유명한 <중쇄를 찍자> 도 문학동네에서 나왔구나. 만화책을 열심히 출간하고 있는 줄은 잘 몰랐다. 이 만화는 도쿄의 동구청 (아마도 동구는 가상의 행정구역인듯)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새내기 공무원 요시쓰네 에미루의 일화들을 통해 일본 사회복지제도의 허점과 현실을 살핀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일본만화의 저력을 이 작품에도 어김없이 맛볼 수 있다. 저자인 가시와기 하루코는 이 만화를 그리기 위해 사회 복지 일을 하는 사람들과 단체를 밀착 취재했다고 한다.
그제 아침 신한은행 본점쪽에서 북창동으로 건너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사람들이 남대문 시장쪽에서 대열을 지어 건너오고 있었다. 빨강, 노랑의 즐겁고 흥겨워 보이는 색조의 옷을 입고 건너편에 서 있는 수문장들은 나의 마음을 관광객으로 만들어 들뜨게 했다.
초록불로 바뀌고 수문장들은 대열을 맞춰 내쪽으로 왔고 나는 그들쪽으로 다가가며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그들을 볼 때 앳돼 보이는 젊은이도 있고 어느덧 중년으로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분도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관광상품(?)이었던 그들을 덕수궁 앞이 아닌 건널목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보니 생활인으로 보였다.
이 사람들은 추운 겨울 저렇게 입고 일하며 얼마를 받을까, 이 일을 즐기고 있나, 제대로 쉴 수는 있을까, 이 일을 본업으로 할까, 본업으로 하면 먹고 살 수는 있을까, 4대보험은 나올까, 정사원일까, 공부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까, 어린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가장인 사람이라면 배우를 하며 하는 일일까 등등.
부디 제대로 대우 받으며 이 일로도 충분히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20대 때라면 그저 '와, 덕수궁 앞이 아니라 이렇게 마주치고 보게 되니 더 재미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랬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며 갑자기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을 인지할 때가 있다.
생각해 보니 그 최초는 전경들이었다.
숭의여중, 여고를 다닐 시절, 안기부가 남산에 있을 때, 나는 충무로쪽에서 걸어서 학교에 등교했다. 데모가 한창이어서 올라가는 길에 전경들이 인도에 100m 정도 쭈욱 앉아 있었다. 10대 소녀인 나는 그런 군인아저씨들 코앞에서 걸어가며 받는 시선이 너무 싫었다. 특히 조례와 예배가 있는 월수는 치마를 입고 등교해야 했는데 걸어올라갈 때 치마가 자꾸 무릎 위로 말려 올라가 손으로 잡아내리며 가는 그 100m는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신입생이 되며 전경들은 나를 감시하는, 아무 잘못이 없어도 잡혀갈 것 같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친구들이 입대하며 친구들로 보였고, 남동생이 입대하자 동생처럼 보여 애틋했고, 더 나이가 드니 귀여워 보였다.
같은 사람들인데 조금은 무섭고 징그럽게 느껴지던 사람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안쓰러워졌다.
소녀 같고,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나도 좋았지만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역시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것 같다. 좀 더 완고해지기도 하지만 좀 더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즐거운 시선을 잃지 않고 완고해지지 않고 넓어지며 나이들 수 있기를.
문학과지성사 (231216~240117)
❝ 별점: ★★★★☆
❝ 한줄평: 서로 다른 혼란스러움을 겪는 세 편의 이야기
❝ 키워드: 교육, 보편성 | 믿음, 진짜와 가짜 | 은총, 열망
❝ 추천: 강렬하고도 아련한 소설들이 궁금한 사람
———······———······———
✦ 기대했던 만큼이나 좋았던 이번 겨울 소설집. 새로운 작가님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읽어본 적 있는 작가님의 새 작품을 만나는 것도 늘 설렌다.
✦ 특히 성해나 작가님의 단편 「혼모노」의 강렬함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읻다의 『여름 기담: 매운맛』에 실린 작가님의 단편 「아미고」가 참 좋았기 때문에 이 단편도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마지막 결말부가 머릿속에 그려지며 소름이 돋았다. 꽤 작품을 많이 쓰셔서 앞으로 찾아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 겨울 눈송이를 닮은 표지 그림. 이 책을 끝으로 소설 보다 : 2023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한 해를 네 권의 단편집으로 추억할 수 있다는 것, 참 낭만적인 것 같다. 특히나 좋았던 여름과 겨울의 소설집은 올해 여름과 겨울에 다시 꺼내 읽고 싶다. [📝24/01/17]
———······———······———
김기태, 「보편 교양」
: 교육과 보편성, 파괴와 패배
|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 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p.43)
———······———
성해나, 「혼모노」 ⛤
: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p.103)
———······———
예소연, 「우리는 계절마다」
: 누구나 혼란스러움을 겪었을 그 계절, 학창 시절
| 나는 지금도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서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이 종종 들곤 한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p.135-136)
———······———
인터뷰
| 언젠가부터 ‘가르치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나빠졌지요. ‘왜 날 가르치려고 해?’ 같은 문장만 떠오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게 그렇게 나쁜가요.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영향력을 주고받고 함께 변화하지 않고서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까요. (김기태 × 이희우, p.55-56)
| 그런 정보를 접하여 가짜나 거짓일지라도 다수 혹은 내가 믿으면 진실이 되어버리는 작금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단어가 ‘혼모노’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무속 역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위나 다름없지만, 그에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신앙이 되잖아요.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진짜도, 가짜도 될 수 있는 기현상을 소설을 통해 재현하고 싶었어요. (성해나 × 소유정, p.109)
| 누군가의 삶은 안온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누군가의 삶은 치덕치덕한 불행으로 가득해요. 그 속에서 아이들이 갈구하는 ‘은총’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 정처 없는 삶 속에서 갑작스럽게 내려지기를 바라는 단 한 줄기 희망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소연 × 최선교, p.173)
———······———······———
전투기 조종사였고, 참전 용사였고,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마술 같은 문장들을 썼던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마르고 무겁고 흐리터분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균열과 진실까지는 모르겠고, 가끔 이런 문장들을 아주 빠른 속도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설터는 소설에 대한 기준이 높았고, 자기 작품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어느 것 한 편 거를 것 없이 다 좋고, 어느 것 한 편 예외 없이 다 어둡다. ‘소시민 시리즈’의 작가와 동일인이라는 게 안 믿길 정도. 곰곰 생각해보면 범인의 동기가 납득이 안 가거나 범인을 찾는 과정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는 작품도 있긴 한데, 읽는 동안에는 서술이 하도 자연스러워 그런가 보다 하고 납득하게 된다.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 유서를 쓴다. 순서는 이러하다. 작년에 쓴 유서를 파일함에서 불러온다. 읽어보고 고치고 싶은 부분을 수정한다. 유서는 크게 정성적인 부분 (올해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마지막은 이러저러하기를 바랍니다.) 과 정량적인 부분 (무슨무슨 은행에 얼마 있습니다, 무슨무슨 연금보험 들었습니다.) 으로 나누어진다. 두 부분을 모두 읽어보고 업데이트할 부분이 있으면 업데이트한다. 정량적인 부분이 매년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보는 것도 유서쓰기의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다. T.T
유서를 쓰고 난 뒤 과메기와 와인을 먹으며 남편과 각자 쓴 유서를 읽고 이를 녹음한다. 덤덤하다가 갑자기 이때쯤 되면 울컥하는 마음에 유서 읽던 목소리가 갈라지게 된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지난 삶이 통탄스럽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진다.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닌 걸로 다른 이들을 힘들게 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조금 더 온화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고 더 너그러울 수 있었다.
매년 마지막 날 왜 하필 과메기와 와인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우연이다. 처음 유서를 쓰던 해,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와인이 집에 있어 그날 마침 땄던 것 같고 과메기도 평상시 잘 먹지 않는 음식인데 이맘때쯤이면 여기저기 눈에 자주 띄길래 한번 먹어봐야지 했었다. 그렇게 우연히 우리의 리추얼이 시작되었고 매년 반복하고 있다.
과메기와 와인, 12월 31일에는 어떤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과메기와 와인보다는 치킨과 맥주가 우리 부부의 취향이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새 달력을 뜯는다는 것 이외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일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종래에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의식에는 힘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 싶은 나의 연약한 마음과 결심이 거기에 있다.
‘교양인’이 되려는 데 나온 지 20년이 넘은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가. 지식편에 대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20년 사이에 추가된 정보들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능력편은 여전히 필수적인 내용들이며, 사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교양인이라고 하는 집단의 본질을 꿰뚫는 책도 없는 것 같다. 그 집단의 규칙 중에는 물론 우스꽝스러운 것들도 많으며, 그 우스꽝스러움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하는 매뉴얼이다.
‘가부라기 특수반 시리즈’와는 관련이 없는 별도의 작품. 배경은 미국이고 등장인물 중에 일본인은 없다. 그 설정이 좋았느냐 하면 재연 프로그램에서 한국인 배우들이 가발을 쓰고 외국인 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작가의 골프 사랑은 뚝뚝 묻어난다.
내게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고, 인세를 누락하고, 판매내역 보고를 제때 하지 않고, 오디오북을 무단 발행한 SF 전문 출판사인 A 사가 5월 1일 오전 9시에 자기 회사 블로그에 사과문을 올렸다. 나도 30분쯤 뒤에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다. A 출판사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하지만 신뢰관계를 이어가기는 어려우니 책은 절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런 인세 지급 누락이 한국 작가들에게 드물지 않으며, 정부가 나서 달라고도 썼다. 600억 원을 들여 국립한국문학관을 지을 게 아니라 인세 누락이나 저작권 침해 신고 센터를 만들고, 영화계처럼 작가들이 책 판매량을 알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 달라고 주문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는 게 만병의 근원이었다.
사실 그런 시스템을 정부가 이미 준비 중이기는 하다. 올해 9월에 출범 예정인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이다. 나는 그 글에 그 사실을 소개하며 출판유통통합전산망에 가입하지 않는 출판사와는 앞으로 계약하지 않겠다고도 적었다. 뭐, 이미 계약 상태인 원고가 8건이나 되니까. 그 원고 8건을 넘기면 출판유통통합전산망도 제 궤도에 올라 있겠지.
A 출판사의 사과문은 물론 큰 화제가 되었으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폭발력이 크지는 않았다. 조금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 회사가 망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으므로. 주말 동안 기사가 10건 정도 나왔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싶었다. 그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않았고 소송을 낼 마음도 없었다.
기자회견장이나 유튜브에서 눈물을 쏟으며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A 회사에 대한 응징을 촉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HJ는 그래야 더 이슈가 될 거라고 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종종 비겁한 사람이고, 교활한 궁리도 자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퍽 점잖은 사람이기도 하고, 진심으로 품위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날 오후에는 새롱이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심장사상충 약을 바르고 돌아오는 길에 산책을 시켰다. 부모님이 “네가 무슨 출판사에서 사과를 받았다며?” 하고 물어보셨다.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갔을 정도면 어지간히 소식이 퍼지긴 했구나 싶었다. 집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올까봐 전화기를 비행기 모드로 해둔 채로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에는 HJ와 남한산성에 놀러갔다. 버스를 타고 산 중턱에 있는 남한산성전통공원까지 가서, 남한산성 행궁을 밖에서 둘러보고 수어장대와 남문까지 올랐다. 습하고 벌레가 많아서 나는 그다지 그 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HJ는 좋아했다.
나는 A 출판사와 일이 마무리되어 홀가분한 마음이었는데 HJ는 그즈음 한창 우울한 상태였다. 실직 상태에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게 된들 이전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하는 질문이 내면을 갉아먹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짧게나마 매니저 직무를 경험해본 그녀는 그게 매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는 매니저들에게 모든 시간을 바치라고 요구하고, 거기에 응할수록 생명력이 줄어들었다. 반면 매니저가 아닌 스태프 일자리는 주체성이 없었고, 40대 중반이 되자 쉽게 구하기도 어려웠다. 주체적으로 할 수 있으면서 시간을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일은 자영업 정도?
나는 그녀의 진단에 동의했고, 그래도 열심히 찾아보면 숨어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기적처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자신은 없었다. 그러다 대화 주제가 남한산성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나는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과정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신유박해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 신자들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늘 감동스럽다. 김훈의 『흑산』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어장대에서 내려와서는 남한산성전통공원 옆 빈대떡 가게에서 해물김치전과 순두부를 먹었다. HJ는 막걸리를 마셨고, 나는 막걸리에 맥주를 섞어 마셨다. 방송사와 신문사, 인터넷신문사에서 각각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왔다. 사양하거나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인터넷신문사는 내가 보낸 거절 내용의 문자메시지까지 기사에 인용했다.
주중에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에서 강연 일정이 하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서울과기대 강연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갈 때마다 대단히 환영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런데 학교가 지하철역에서 참 멀기도 하다. 비 오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전화 영어 수업을 받았다.
이번에는 도서관 강당에서 소규모 청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면서 줌으로도 강연 내용을 전송하는 식으로 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다. 강연장까지 가야 한다는 게 단점, 그래도 강연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강연 주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일으킨 매체 혁명이었는데 학생들이 무척 수긍한다는 표정이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도 내 가설에 동의한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커졌다.
모처럼 오프라인 강연이고, 강연 뒤에 학생신문사와 인터뷰까지 하니 돌아오는 길이 무척 고단했다. 지하철역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샀다.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이 편의점에 종종 들르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해서 매번 황송하다. 결제를 하다가 불쑥 “제가 가본 편의점 중에 제일 친절한 곳이에요”라고 말했더니 아주머니가 무척 쑥스러워하셨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맥주 한 캔을 해가 진 거리에서 다 비웠다. 홉 하우스 13을 마셨다. 기네스가 만든 라거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홉 향을 강조했다. 이 제품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홀딱 반해서 드디어 인생 맥주를 찾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성이 강한 녀석은 연달아 마시기 부담스럽다. 그리고 어떤 제품을 인생 맥주로 정하든 그것만 마시는 음주 생활은 풍성하지 못하다. 인생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겠지. 그렇게 돌고 돌아 맹탕이라고 욕을 먹는 미국식 페일 라거를 쌀밥처럼 찾게 된다. 집에 왔더니 HJ가 돼지고기를 구워 주어서 그걸 안주 삼아 계속 맥주를 마셨다.
비 오는 날 강연하고 오는 길
친절한 편의점에서 산 쌉쌀한 맥주
홀짝홀짝 마시며 집에 갑니다
홉이 강조된 맥주에는 숙취가 따라온다. 다음날 아침에는 두통에, 저녁에는 비염에 시달렸다. 감기 기운이 있나 보다 싶었지만 어쩌면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새롱이와 가까이 있다가 원래 약하게 있던 개털 알레르기가 심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동물병원에 새롱이를 데리고 가서 중성화 수술 때의 실밥을 풀고 돌아오는 길에 산책을 시켰다. 집에 돌아와서는 잡지에 실을 에세이를 썼다.
최악의 황사가 한국을 덮쳐 서울에 위기경보 주의 단계가 발령된 날 나는 종일 밖에 있었다. 일정이 두 건 있었다. 이날 서울 공기 오염도는 베이징이나 상하이, 뭄바이, 델리보다도 더 높았다.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눈이 따갑고 목이 매캐했다.
이날 낮에는 서래마을에서 L 선배와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L 선배는 동아일보에서 내가 아주 존경하던 기자이고, 그 역시 나를 무척 아꼈다. 그와는 법조팀에서 함께 일했다.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뒤에 나도 사표를 냈다. 그 해에 회사를 그만둔 동료가 많았다. 이후에 나는 L 선배와 1년에 한두 번씩 만난다.
L 선배는 저널리즘스쿨 교수직을 둘러싼 퇴직 기자들의 처절한 경쟁에 대해 들려주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얘기들이었다. 연줄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유치하고 좀스러운 경쟁을 벌이고들 있다니.
L 선배와 헤어져서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블러썸크리에이티브의 스튜디오에 갔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는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인 블러썸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차린 작가 매니지먼트 회사다. 김영하, 김중혁, 김초엽 등의 작가가 소속되어 있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는 자이언트북스라는 출판사도 얼마 전에 설립했다.
그 출판사에서 NC소프트와 제휴해서 소설집을 만들 예정이었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게임회사가 단편소설집을 내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책 저자로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소속 작가들에 더해 나까지 원고 청탁을 받은 것도 의외였다.
NC소프트는 꽤 큰돈을 들여 이 소설집을 홍보하려 했다. 아니, 문학출판계에서나 그 돈이 큰 금액으로 보이는 것이지 게임회사 입장에서는 푼돈인 걸까? 아무튼 NC소프트와 블러썸크리에이티브는 책을 홍보하기 위해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과 사진을 만들고자 했다. 나는 그 촬영을 하러 고양시의 스튜디오에 간 것이었다.
열 명도 넘는 스태프들과 인터뷰 영상을 찍고 스틸 사진을 촬영하고 홍보 멘트도 녹화하고 북트레일러 영상도 제작했다. 네 시간쯤 걸린 것 같다. 나는 스태프들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지만 마음속에 별 열정은 없었는데, 그들 탓은 전혀 아니었다. 내가 쓴 단편소설이 별로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촬영장에서 K 작가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K 작가는 내가 A 출판사의 인세 누락을 고발한 것을 환영했고 나는 좀 머쓱해졌다. 옆에 있던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소속 편집자도 그게 편집자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다고 얘기해줬다.
정작 내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블러썸크리에이티브라는 회사와 작가 매니지먼트 사업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블러썸엔터테인먼트-블러썸크리에이티브의 대표가 나를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차로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레인지로버 조수석에서 나는 블러썸크리에이티브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친구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H가 강원도의 투자를 받아 만들려는 VR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개발을 다시 부탁해 왔다. 전에도 거절했던 건인데, 이번에는 금액까지 명시하면서 정식으로 요청해 왔다. 하지만 나는 친구와 돈 거래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마음이 무거워져서 돈은 받지 않고 자문 비스름한 역할을 맡아주겠다고 답장했다. 그러면서 그가 보낸 구상안에 내 의견을 보탰다. 기본적으로 H의 아이디어가 좋았다. 그런데 내가 답장을 너무 늦게 하는 바람에 그 사이에 H가 다른 작가를 구했다. 외부 작가가 작업을 마치면 내가 한번 보고 의견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배우는데 기타 선생님이 김광석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김광석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인기가 많았느냐, 서태지나 신해철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였느냐, 이문세와 김광석 중에는 누가 먼저냐 등. 내가 김광석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친 김에 우리는 이문세의 노래도 연습해보기로 했다. 기타 선생님이 어떤 곡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서 “〈그녀의 웃음소리뿐〉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상대가 그 명곡을 몰라서 내가 도리어 놀랐다. 기타 선생님은 곧바로 유튜브로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검색했는데, 곡을 듣더니 “엄청 좋은 노래네요” 하고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