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의 역사를 소개하는 교양서. 책이 소개하는 7가지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뉴턴 역학, 에너지 개념, 엔트로피 개념,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소립자물리학이다. 원제도 ‘Seven Ideas that Shook the Universe’인데 사람들의 인식이 흔들린 거지 우주는 꿈쩍도 안 했을 거라고 이죽거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김하율 작가의 소설 「이 별이 마음에 들어」는 '그믐 북클럽' 회원이 된 후, 첫 번째로 신청한 2024년 1월 책 읽기 모임에 당첨되어 읽게 됐다. 푸른 청룡의 해라더니 신년 벽두부터 운 좋게도 '그믐 북클럽' 11기에 선정되었다.
책을 기다리는 동안 이 책은 SF 장편이라고 해서 어떤 미래를 그릴까 궁금하면서도 책표지만 봐서는 전혀 미래지향적이지 않아서 아이러니했다. 미싱을 타는 소녀의 머리에 헬멧이라니...?
마침내 책이 도착해서 두근거리며 작가 소개와 첫 페이지를 동시에 펼쳤다. 기대와는 달리 '소설이 왜 이렇지?' 싶었다. 프롤로그로 시작해서 에필로그로 끝나다니 말이다. 배경이든 인물이든 일단 서사 속에서 프롤로그가 드러나야지 에세이도 아닌데...
이 소설의 배경은 1978년이었다. 왜 하필 1978년일까 궁금해서 보니, 동일방직 똥물 사건과 YH 여성 직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등 노동운동이 심각하게 일어났던 해였다. 얼핏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분신 사건도 1970년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아한 마음을 한편에 접어두고 1부 1978년을 읽기 시작했다. 1부에서는 니나가 야학에서 이름을 정하는 장면이 참신했다. 니나 잘 해, 니나 해라... "니나! 긍정의 에너지를 주는 말 같았다..." 성은 노, "노니나? 오, 좋은데."이후부터 이름조차 없던 외계인 '0번 시다'의 이름이 '니나'로 불렸다.
내가 느낀 이 소설의 첫인상과는 달리 가독성이 좋았다. 술술 잘 읽혔다. 심지어 2부 1979년도 막 궁금해졌다. 그리고 2024년 현재로 껑충 뛰어넘는 시점 구성을 보자 한 번에 휘라 락 읽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부러 그믐 북클럽의 진도에 맞추며 온라인 토론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관심 사항을 알고 싶어서.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 니나의 능력은 부러울 만큼 아주 탁월했다. 니나네 종족의 가장 큰 특징은 생존력이고 뭐든 본 대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능력, 이를테면 복제 능력이다. 사실 인간의 뇌에도 '거울뉴런'이란 게 있어서 학습이 가능하다. 모방 본능이 생존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나처럼 완벽하진 않다. 모자란 인간으로 치열히 사는 게 현실인데 소설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하여간 니나가 불시착한 1978년 서울, 겨울의 어느 공장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찰지게 쓰는 사회적 인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전개가 퍽 흥미롭다.
1970년대 한국은 섬유 가발 신발과 같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 만능시대였고, 선두 주자였던 섬유산업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경쟁력인 양 포장하여 어린 여공들을 착취했다. 이렇게 쌓은 부로 경영자들과 권력자들의 배만 불리고 불쌍한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예 같은 생활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됐다.
1번 미싱사였던 오야나 폭력적이던 사회 풍조는 '운'이 아니고 사실은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작가의 관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2부 1979년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사수하기 위해 정말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조합원들의 처절한 저항 이야기에 독자는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장면마다 생생히 연상되어 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몰두하게 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계엄군들과 시민이 대치하는 장면과 오버랩 되었기도 했다. 특히 1번 오야의 장렬한 투쟁 장면에서는 그간 1번 미싱사에게 쌓였던 감정이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
마침내 3부 2024년. 소설의 배경이 됐던 1978년으로부터 무려 46년이 흐른 현재, 과거의 섬유 노동자의 애환은 택배기사로 일하는 니나의 업둥이 아들 장수의 재등장으로 플랫폼 노동자의 문제와 맞닿게 된다.
프롤로그부터 등장은 했지만 누군지 몰랐던 장수의 캐릭터가 3부 2024년부터 확실해졌다. 장수는 니나의 첫사랑이자 남편인 굴보의 아들이 아니었다. 결국 굴보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못내 아쉽지만(굴보도 죽고 또 그의 아들도 죽고) 장수의 등장으로 이 책의 구성이 완벽해졌다.
니나의 업둥이 아들, 장수는 현재와 미래를 자연스레 연결 지으면서 「이 별이 맘에 들어」는 엄연히 SF 소설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자칫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그 시대의 얘기만으로 소설이 짜였다면 아무리 처절해도 진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니나가 외계인이라는 전제로 시작한 이야기는 장수의 등장으로 2024년에서 다시 2034년, 10년 후의 가까운 미래로 훌쩍 건너뛰며 인간로봇(휴머노이드) 시대를 보여주는 수완을 발휘했다.
가끔 과거 산업화 시대에 살았던 분들은, 당시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도시의 산업 전사로 변신하셨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그러니 니나를 외계인이라 설정해도 낯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80세 전후의 어르신들은 치매나 알츠하이머로 고통받기도 하니까 3부에서 니나가 휴게소 직원과 이야기 나누는 장면은 혹시 니나가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자 능청스럽게 맞장구쳐주는 점원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하여간 업둥이 장수의 등장으로 '잘 꿰매진 조각보' 같은 SF 소설로서,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나, 김영하의 「작별 인사」 못지않게 SF 소설로 자리매김하며 재밌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 수림 문학상 받을 만한 훌륭한 SF 장편 소설이라고.
https://blog.naver.com/lovemom94/223345690261
파레토 법칙을 소재로 활용한 자기개발서. 선택과 집중하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사실상 아무 내용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적당한 성공의 경력이 있다면 아무 말이나 차용해서 자기개발서 쓰기 용이한 시대인 듯.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1987년부터 1006년까지 미국 연준 의장을 했던 앨런 그린스펀이 공저자인 것으로 유명한 책이다. 그의 재임 시절 금융의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을 듣는 등 그에 대한 찬미가 연준이라는 성소에 가득 울려 퍼지기도 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 온 주범으로 몰리며 모든 비난의 화살이 그를 향하기도 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을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미국의 경제사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JP 모건의 전기를 쓴 론 처노가 해밀턴에 대한 전기도 썼다. 이 책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천재의 불꽃과 같은 삶을 잘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밀턴은 오늘날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미국 경제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는 미국이 건국되던 시점 세계 최강국인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려 하면서도 미국의 발전 모델을 영국으로 상정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국가 그리고 이같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幼稚(유치)산업infant industry’을 보호하는 보호주의 무역 정책, 그리고 영국과 같이 강력한 국방력과 산업을 갖기 위해서는 자본의 집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영란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제도’의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부침을 거듭하며 1820년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 시절 폐지되었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부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공황의 원인을 여전히 연준의 책임 탓으로 돌리는 여론이 비등하지만 20세기 초 미국 연준은 21세기 처럼 거시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고 그것이 대공황이라는 파국에 이르는 결정적이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면 인간의 역사, 특히 그 고통스럽고 비참했던 사건들은 상당 부분 이와 같은 인간의 무지로 인한 시행착오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는 미국 사회가 얼마나 ‘경제’ 혹은 ‘돈 버는 것’ 중심의 사회인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업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합명회사’와 ‘인허회사’라는 두 가지 형태의 법인 형태만이 존재했다. 전자는 무한 책임 후자는 유한 책임을 가졌지만 회사는 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권력과의 유착 또는 부정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의 대표 정부 역시 1630년 베이 컴퍼니라고 하는 인허회사에서 출발한다. 이 회사의 주주들이 유한 사업 조직원의 구성원에서 공공 정부의 대표들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주식회사가 출현할 수 있었던 기업조직의 혁명은 ‘철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철도 산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자본 산업이었기 때문에 유한책임에 기초한 혁신적인 기업조직으로서 ‘주식회사’가 지배적인 기업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또,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던 철도회사들에 대한 합리적 경영의 필요성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금융산업이 등장하게 된다. 또, 금융산업의 등장은 카네기의 철강 산업, 록펠러의 석유 트러스트와 같은 산업의 독점을 가져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점은 오늘날 그리고 당대에도 역시 엄청난 비난을 받는 자본주의 혹은 대기업의 악질적 행태로 비난을 받지만 19세기 후반 등장한 독점은 자본주의의 성격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할 만큼 현대적 발전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통해 독점의 폐해만큼이나 가격의 하락 등을 통해 인류의 삶에 공헌 했다고 한다. 저자들은 미국 자본주의를 이끈 기업가들은 그들이 미국 경제에 공헌한 창조성과 혁신 만큼이나 인간적 결함이 있었던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만 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같이 인간의 경제 활동을 윤리적 도덕적 법정에서 해방시킨 인물로 아담 스미스를 摘示(적시)한다. 인간의 경제적 욕망을 긍정하고 그 욕망을 통해 사회의 부와 풍요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동서를 불문하고 그렇게 오래된 아이디어가 아닌 것이다. 조선 사회의 주자학만큼이나 서양 중세 사회와 기독교도 영리의 추구를 죄악시 했던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소외된 이들에 의해 건국된 미국은 이와 같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식하고 실현시키기에 아주 좋은 토양을 가진 사회였다.
자본에 대한 철도회사의 게걸스러운 욕구가 현대의 뉴욕증권거래소를 만드는 데 다른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뉴욕증권거래소는 1817년에 세워졌지만 19세기 중반에 철도 붐이 일어나기 전에는 활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다우지수에는 증기선 운항사인 Pacific Mail과 전신회사 Western Union뿐 아니라 10개 이상의 철도회사가 포함되었다. 철도 시대 이전에는 증권거래소가 바쁜 때에도 한 주에 거래되는 주식 수가 1천 주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850년대에는 한 주에 100만 주가 거래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철도회사 주식이 전체 발행 주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98년 60%였다가 1914년에는 40%가 되었다. 또한 월가는 철도 채권 시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3년 철도 채권의 가치는 112억 달러인 반면, 일반 주식의 가치는 72억 달러였다.
철도는 새로운 투자 문화를 낳았다.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이 1865년 창간했고, 이 신문은 다른 무엇보다 철도를 자세히 다루었다. Henry Varnum Poor는 신용평가사 Standard & Poors에 자신의 이름을 넣기 전에 American Railroad Journal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수준 높은 투자자는 오늘날의 투자자가 주요 산업주를 바구니로 사듯 철도주를 market basket로 사서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을 익혔다.
또, 미국의 통화제도로서 금,은본위제의 역사도 개관할 수 있다. 케인즈가 금, 은과 같은 실물 화폐를 ‘야만적 유물’이라 주장했던 것이 20세기 초의 일이고 또 1970년대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며 완전 신용에 기초한 기축 통화 제도가 실시되기 까지 거의 반 세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에 이와 같은 통화제도의 혁명적 변화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계 경제의 확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의 뉴딜 체제는 세계 1차 대전을 통한 전시 경제 체제를 경험하면서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국가가 경제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행태와 동시에 미국 연방 정부의 힘이 놀랍도록 강해지는 것은 20세기 전반기의 양차 세계대전에서 기원한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여기서는 스태그네이션이라 표현)은 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의 ‘위대한 사회’건설과 같은 복지 재원의 남발이 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인플레이션은 통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
대공황과 마찬가지로 2008년 금융위기 또한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가 원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미국의 실패를 그들의 자만과 교만에서 찾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해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서 앨런 그린스펀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한 것은 과거와 같은 파행 또는 재난이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란 착각과 믿음에 어느 정도 넘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는 미국 경제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원인으로서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정신을 말한다. 19세기 후반의 독점과 1970년대 그리고 현재 까지 이르는 IT산업 혁명과 독점 기업들을 그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생산성과 혁신은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은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미국 사회는 많은 문제와 모순을 갖고 있는 사회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사회는 저 마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그 전망은 미국보다 암울하다. 달러 패권은 유지될 것처럼 보이며 미국의 IT독점 기업들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보인다. 또한 중국의 부자들은 호시탐탐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믐은 22년 5월 보성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베타테스트를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29일 정식으로 서비스를 런칭했습니다.
하나둘씩 쌓여가던 그믐의 모임 숫자가 24년 2월 5일 자로 1002에 달했어요.
이 숫자가 저희에게 더욱 소중한 것은 1천 개의 모임을 오롯이 그믐 혼자 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임의 대부분은 읽고 쓰기에 진심이셨던 그믐의 회원, 출판사, 도서관, 학교 그리고 독서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함께 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곧 그믐의 모임이 1만 개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 웨난은 중국 유적 발굴 현장을 돌아다니고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을 취재해 ‘중국 고고학 논픽션’이라고 할 만한 책들을 펴냈다. 그 중 하나인 이 책은 명십삼릉 중 그 유명한 만력제의 무덤 인 정릉 발굴에 얽힌 이야기를 다뤘다. 발굴 과정은 흥미롭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학자들과 유적이 처한 운명은 안타깝다. 공동 저자인 양스는 강제노역 기간에도 몰래 보고서를 작성한 발굴단장 자오지창의 부인.
<기생충>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한 <봉준호를 읽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봉준호 감독이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했습니다. 그 때 한 학생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봉준호는 "부조리라고 생각합니다."고 답했죠. 저는 그 문답이 봉준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한국사회 --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 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급과 차별, 그리고 사회 모순을 블랙코미디로 다루는 그의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부조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세계관과 역량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70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부조리라는 주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삼부작" 가운데 한권입니다. 서양 철학 고전에 속하죠. 부조리는 오늘날에도 공감을 일으킬법한 주제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논의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학 고전의 독해는 어렵다보니 북클럽 도서가 아니었으면 읽을 기회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부조리는 무엇인가? 언제 사람들은 부조리를 인식하나?
먼저 책의 핵심 주제인 "부조리"에 대한 제 생각, 그리고 책에서 카뮈의 논의를 요약해보았습니다.
부조리는 "인간의 욕구와 세상의 무질서 사이의 불일치" 정도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혹은 "의도와 현실의 불균형"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죠. 살인범을 무죄로 방면하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부조리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악인이 심판받는 것"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세상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인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들 (예를 들어 소아암)을 보며 우리는 부조리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공평한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세계는 그렇지 못하니깐요.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은 대왕 카스테라 사업을 시작했다가, "먹거리 X파일"과 같은 악의적인 방송에 의해 시장 자체가 무너지는 바람에 망해버렸죠. 창업이라는 개인의 합리적인 결정이 사회적 유행에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는 점이 부조리하다고 느낄법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 외에도 전쟁, 빈부격차, 교육 불평등 등등 우리가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 면에서 카뮈가 "시지프 신화"를 부조리에 대한 메타포로 잡은 점은 똑똑하다고 느꼈습니다. 시지프가 형벌을 받은 이유도 부조리하지만, 의미없이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형벌의 내용 자체도 부조리하죠.
그렇다면 부조리라는 감정을 어떻게 사람은 인식할 수 있을까요? 카뮈는 "관심"으로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쳇바퀴 돌듯 월화수목금토일을 살다가 문득 "왜"라는 질문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자각을 하게 된다고 하죠. 그 결론으로 자살을 하든 원래대로 돌아오든 말이죠.
그 자각에서 시작해서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낯섦"이 등장합니다. 사실 철학의 개념이라서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하며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스스로를 객관화시켜보고, 현실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부조리를 인식하게 되죠.
부조리를 인식하고 나면 이에 대한 해결책을 탐구하게 됩니다. 그 시작은 먼저 "이해하는 것" 즉 세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카뮈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모순어법인데요, 즉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불일치"의 순간이 다시 발생한다고 봅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논증은 혼란스럽게 쓰여져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처럼 "모순이 없는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카뮈는 이를 "나는 나 자신에게 영원한 이방인이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카뮈는 과학 이론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과학 이론도 결국은 세계를 메타포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즉 원자-전자 모형을 태양계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은 과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여기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카뮈가 현대 양자역학의 논의들을 안다면 반색하면서 논거의 하나로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카뮈의 결론은, 이성도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죠. 카뮈는 이러한 비판들, 특히 실존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즉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해,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셰스토프, 후설과 셸러까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이성비판에 대한 내용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공통적인 기류를 이야기합니다. 즉 세계는 비합리로 넘쳐난다는 점이죠. 그리고 카뮈는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비합리성, 인간의 향수(노스탤지어), 그리고 이 둘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 반드시 끝맺어야 할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저는 이 문장이 카뮈가 부조리에 대해 내리는 가장 명확한 정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서 향수(노스탤지어)는 철학적 개념인데요, 현재의 불만족과 과거에 대한 이상화된 기억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즉 세계는 비합리성으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이에 대한 불만족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적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거기에서 부조리가 탄생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어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대응 방안을 고찰하며 비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도피일뿐이며, 희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라고 이야기하죠. 야스퍼스의 신비주의나 셰스토프의 부조리에 대한 수용,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종교에 대한 회귀를 통해 지성을 희생하는 것은 결국 "철학적 자살"이라고 평가합니다. 후설과 현상학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하는데요,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다수의 진리가 있다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언뜻 부조리의 정신과 비슷하지만, 추상적 다신교에 그치지 않는다며 일축하죠.
카뮈는 이러한 지점에서 벗어나 부조리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통일성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무질서한 세계 사이를 묶어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이며, 카뮈는 이러한 분열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즉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죠.
부조리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나?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크게 3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자살이죠.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희망 없음에 대한 "반항"이 곧 자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나름의 방법으로 부조리를 해소하는 것이죠. 카뮈는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고 정의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분리" 혹은 "단절" 되었다고 느끼고, 삶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자살로 회피한다는 것이죠.
둘째는 종교입니다. 셰스토프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신을 받아들이면서 부조리의 소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카뮈는 이를 투쟁을 피하는 회피라고 봅니다.
셋째는 버티기입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이를 반항, 자유, 열정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합니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의 어둠과 서로 영원히 대면하며, 매순간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즉 포기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죠. 자유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자유를 빼앗기는 순간, 실제로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충분히 "낯설게" 느끼며 삶을 확장시키게 되죠. 무엇보다도 죽음 앞에서 자유라는 환상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 즉 "주어진 모든 것을 소진시키려는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하는 것이,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게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부정적인 의미에서 부조리를 감내하면서 투쟁하는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 보통 로맨틱한 관계에서 사용되는 열정이라는 단어는 완전한 뉘앙스를 담아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컨텍스트상 수난(passion)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의 나머지 절반에서 다룬 돈 후안주의, 연극, 그리고 정복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시대상의 컨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서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극을 부조리에 대한 메타포로 설명하며 "나"와 "내가 연기한 인물" 사이의 간극으로 비유한 것은 흥미로웠고, 철학과 소설 파트에서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리한 현상이다"하며 부조리한 예술 작품을 만들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연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흥미로웠습니다만 책 전체의 주제에 살을 붙이는 정도였다고 봅니다.
책의 마무리에서는 유명한 "시지프 신화"를 언급하면서 부조리에 대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 부분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우며, 지속된 형벌을 감내하는 시지프의 이야기를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마무리짓는 것이 "버티기"에 대한 카뮈의 해석이라고 봅니다.
단상들
몇몇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서양 철학 책 자체가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닙니다. 서양 철학 고전들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독자가 서양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책에서는 실존주의, 현상주의, 합리주의 등등 큰 철학 사조뿐만 아니라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그리고 후설과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핵심 주장, 그리고 서양 철학의 개념들 -- 현상, 실존, 두터움, 낯섬, 노스탤지어 등등 -- 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관련 배경지식이 없다면 내용 이해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책들은 시대를 지나면서 나이를 먹듯, 책에서 제시하는 예제들 -- 2부의 각종 예술 작품 사례들 -- 을 70년후의 우리가 그 시대의 감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책의 전개 방법과 구성이 난삽한 편이라고 느꼈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철학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배경지식의 요구 수준이 너무 높은 편이고, 반면 엄밀한 철학책이라고 보기에는 개념 정의나 논리 전개 방식, 그리고 저자의 주장이 엄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책의 구성이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는데요, 문제 제기로 시작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파트는 책 뒤쪽의 "시지프 신화" 파트였는데, 제가 편집자라면 그 부분을 제일 앞에 두어서 문제 제기를 하고, 부조리에 대해서 정의한 다음,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논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작가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결론 부분에서 시지프 신화를 불러내어서 어떻게 다시 이 신화를 해석할 수 있는지로 마무리했을 것 같습니다.
셋째로, 책에서 다루는 부조리와 자살에 대한 분석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뮈는 자살을 살아갈만한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며, 내가 살아도 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즉 사람들이 부조리에 대한 하나의 해결 방안으로서 자살을 선택한다고 주장합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삶과 가치를 이성적으로 저울질하고, 그 결과로서 능동적으로 자살이라는 결정을 내린다고 보는 것이죠.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노인들이 나이가 되면 자살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문화로 보았다고 하는데, 아마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견해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사회 심리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살에는 2가지 요소, 즉 우울증이라는 개인 질병의 요소와 남들을 따라서 자살하는 사회적 전염이라는 측면이 있죠. 이외에도 트라우마 및 가난과 같은 심리 및 경제적 요인도 작용하죠. 둘 다 한 개인의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자살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현실 세계의 자살에 대한 연구와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카뮈가 태어났더라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넷째로, 저자의 주장 혹은 결론이 없거나 미약하고, 저자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카뮈는 크게 3가지를 제시하죠. 첫째는 자살, 둘째는 종교, 마지막 셋째는 이른바 버티기입니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도 버텨가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자, 하는 면은 니체가 강조한 인간 의지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과 논리 전개가 다소 미약했고, 현재의 부조리한 삶에 행복하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노예 근성을 가지고 오늘에 만족하며 살아라"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회사 및 사회생활을 쳇바퀴돌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내면화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저는 4번째 해결책으로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뮈의 책은 부조리를 "개인"과 "세계"의 대립을 메인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 엎을 수는 없으니 그 해결책은 결국 "개인"에게 귀결되죠. 자살하든가, 종교에 귀의하든가, 버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죠. 세계의 부조리한 모습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한 개인 개인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어도, 역사를 뒤돌아 보면 개개인들의 노력과 욕망이 모여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면서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노예제가 없어졌고, 의무교육이 생겨났고,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체계가 생겨났죠. 그런 면에서 개개인간의 연대와 사회, 그리고 세계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무리 및 책 추천
"합리성" 혹은 "이성"에 대한 비판은 사실 철학에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이에 대해 스티븐 핑커의 <Rationality>를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책의 부제가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죠. "Rationality: What it is, why it seems scarce, why it matters". "합리성"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통계학, 논리학, 심리학 등등의 사회과학으로 재미있게 설명하는 점이 대단합니다. 2024년 6월 한국 번역판이 출간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150번을 그것도 안 틀리고 100번 이후에 50번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두 다르게! 쳐야 하는구나~ 최정상급 피아니스트의 경우 😭 물론 나는 아마추어 듣보이므로 안 틀리고 친 적이 없지는 않은데, 그걸 쌓고 또 쌓아서 십 여 회는 했을 수도 있겠지만 ×10는 더 해야 무대 위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하나의 지식을 발견하려면, 집단 혹은 개인의 끝없는 고통이 필요하다. 그 결과를 고맙게도 일반인인 나는 앉아서 몇 번의 검색에 향유할 수 있는데도, 모르는 것이 참 많다.
일단 수많은 발견 이야기들이 즐겁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심해 탐험처럼 전혀 모르던 이야기도 있다. 지금의 멕시코에서 조금만 더 바다 방향으로 운석이 떨어졌다면, 지구에 아직 공룡들이 있을 거라는 소설같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와닿는 것은, 이 많은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는 고생의 양이다.
목적은 저마다 다르지만 - 돈, 인류애, 지식욕 등등 -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압력을 뜷고 가려하고, 폭발하는 우주선에서 삶을 마감하는 등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언급이 다 안 된 사람들까지 하고, 하고, 또 한다. 그냥도 놀라운데 그 고생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작은 일에 쉽게 짜증내고 우울해지는 최근, 지식과 함께 좀 더 버텨보자는 생각도 선사해준 책이다. 그리고, 집필 당시에 아직 결과를 모르고 기다리던 몇몇 연구들의 결과도 지금 알 수 있다는 것이 괜히 즐겁고 뿌듯하다. 역시 꿀꿀할 때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