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교수님의 책은 단숨에 읽기가 좀 어렵다. 최대한 담담하게, 객관적인 연구결과를 토대로 풀어놓은 글임에도 그 속에 담겨있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라는 사실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왜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걸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읽어야하는 걸까라고 가끔 생각한다. 이번 책에선 어느 정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그 대답일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라는 김승섭교수님의 말이 그 대답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기'때문에 결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이 책을,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 이유를 정리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은건 이 책이 던진 많은 질문이 여전히 온전히 응답받지 못했다는 걸 알기때문일테다.
『이상한 존』의 자매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개이고, 그 개의 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딱 똑똑한 인간 수준이기에 몇 가지 장점이 더 생긴다. 주인공의 처지가 더 처연하게 다가오고, 그의 관점이나 견해도 보 다 설득력 있다. 세상에는 나처럼 픽션에 말하는 개만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말이 허망한 것은 작가도 시리우스에게 어떤 결말을 선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은 아닐까.
초인을 다룬 최초의 소설은 분명히 아니다. 홍길동도, 전우치도 초인이었으니까. 이 작품의 매력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눈에 인간의 사상이나 제도, 문화가 어떻게 보일지 냉담하게 상상해보는 데 있다. 물론 그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생각은 인간인 작가가 쓴 것이기에 등장인물의 철학이 작가의 철학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연관 지어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을 듯. 실제로 스태플든이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출간된 지가 상당히 오래되고(원서가 2008년 출간), 제목도 꽤 공격적이라 사실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는 넣었지만 오랫동안 손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전에 이 책의 후속편이 나왔고 아마도 조만간 번역이 나오지 않겠나 싶어 늦게나마 읽어보았다.
기본적으로 날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어린 세대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이 문제들이 발전될 때 어떤 큰 문제가 생겨날지를 논하는 책이다. 하지만 최근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여기서 논하는 청소년들의 문제가 한 세대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당장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내가 제대로 하고있는지부터 봐야하는데, 솔직히 이 문제에서 가슴펴고 말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 착잡하다.
기술이란 게 운용만 잘 하면 뭐든지 가능하지만, 편한 방향으로만 쓰다보면 명암이 없을 수는 없다. 인터넷이 있어 재빠른 정보수집과 편리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만, 길게 생각할 필요가 줄고 내가 관심없는 분야는 완전히 차단하면서 살 수가 있다. 이런 장단점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자라난 세대에게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문제점이 있고, 이것이 세대차이같은 게 아니라 더 발전되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념적 도전의 기회,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을 타파하고 반대 의견에 귀기울이는 태도의 뿌리인 박식한 호전성이 사라져가는 지금, 해결을 위해 가정과 학교, 마을과 시장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고.
독서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기도 하는데, 단순히 읽어서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얻은 지식을 가지고 숙고하며 책임을 자각하는 시민의 모습을 말하기 때문에 또 한 번 무겁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한국의 전통과 현재 모습에 대해 정말 깊은 이해를 갖추고 있는가?
여러모로 착잡한 책이지만, 국내 출간되리라 믿는 후속작에서는 좀 더 밝은 부분들도 기대하고 싶다. 무한한 기술 환경 속에서, 개선과 성장도 그만큼 빠를 것이라고...
이혁진 작가의 신간 소설 '광인'을 읽다. 작가의 전작인 '누운 배'와 '사랑의 이해'를 만족스럽게 읽었고, 독서팟캐스트 'YG와 JYP의 책걸상'에서 강양구씨가 적극 추천도 하였기에 바로 구입해서 읽은 소설이다. 678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지만 취향에 맞아 잘 읽혔기에 주말을 이용해 3일 만에 독파할 수 있었다.
이 책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3인인데, 화자인 해원, 해원의 플루트 레슨 선생인 준연, 그리고 준연의 지인으로 위스키를 만드는 장인인 하진이 그들이다. 소설의 제목이 '광인'이기에 독자들은 과연 이 3인 중에서 '광인'은 누구일까 궁금해 하며 소설을 읽게 될 듯 하다.
우선 긍정적인 의미로는 3인 모두 무엇인가에 미쳐있는 '광인'이다.
첫 장부터 예술이 위대한 이유에 대한 '장광설'로 포문을 여는 준연은 음악에 미쳐 있고, 과거 그의 음악 동료였던 하진은 아버지의 가업이었던 증류소를 운영하면서 자신만의 위스키를 만들어내겠다는 꿈에 미쳐 있다. 그리고 해원의 경우는 '돈'에 미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 피해 받은 어머니를 보며 경제적 독립을 갈망하였고, 이를 위해 '돈'을 미친 듯이 추구한 결과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상태이다.
해원이 충동적으로 풀루트를 배워보고자 찾아간 준연의 레슨실에서 서로 친구가 되고, 하진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부인데, 여기까지는 예술과 사랑에 대한 에세이 성격의 '장광설'들이 자주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의 느낌이었다. (이 소설의 진입장벽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연상케 하듯 등장 인물들의 장광설이 수시로 쏟아지는 것일 터인데, 내 취향에는 잘 맞았지만 도저히 못 견디고 포기하는 독자들도 꽤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광인'이라는 제목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을 듯 하고, 제목을 그렇게 지은 소설이 해피엔딩일리는 없기 때문에 과연 '누구의' 그리고 '어떤 방식의 광기'가 드러나게 될까 기대하며 소설을 읽어갔고, 그 기대는 후반부에 적절히 충족되었다. 자세하게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끝내는 게 최선이겠다' 싶었고, 꽤 만족할만한 마무리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좀 과도하다 싶은 나만의 감상을 적고자 한다. 다 읽고 나서 문득 이 소설을 '예술가와 자본가의 만남과 대결,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진 파국적인 결말'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살짝 과감한 비약이 떠오른 것이다.
우선 준연과 하진은 둘 다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준연이야 음악을 하기 때문에 당연하고, 하진의 경우도 거의 혼자 증류소를 운영하면서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작품' - 실제 하진이 만들게 되는 위스키의 상표명이기도 하다 - 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예술가로 볼 수 있다. 반면 경제적 성공만을 목표로 달려온 해원은 '자본가'의 표상으로 볼 수 있겠지.
돈에 미친 삶을 통해 경제적 성공을 거둔 해원은 성공한 다수의 자본가들이 그렇듯이 이제 슬슬 교양과 의미의 영역에도 욕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 분야의 TOP은 역시 예술 아니겠는가? 해원이 준연에 대해 초기에 느꼈던 선망과 애정, 그리고 하진을 만나자 마자 느낀 호감과 사랑의 감정은 자신이 가지 못했던 길을 가고 있는 '예술가'들에 대한 선망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예술가들이라는 존재가 어찌 자본가 따위의 이해와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ㅋㅋ) 해원이 가지고 있는 자본가로서의 현실 타산과 이해를 한참 벗어난 '예술가들(준연과 하진)'의 판단과 선택은 해원을 그야말로 미치게 만들어 버린다. (준연과 하진은 모두 해원의 예상과 기대를 벗어난 선택들을 해댄다. 역시 제 잘난 맛에 죽고 사는 예술가들! ㅋㅋ)
그런데 자본가들이 누구인가?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싶어하는 욕망의 화신이 아니던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들 때문에 미쳐버린 해원은 강제로라도 그 대상 - 예술 또는 사랑 -을 자신의 통제 아래 들어오게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그 욕망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건설자본가!)가 어머니에 대한 폭력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하다. 해원은 '아버지의 세계'를 거부하고자 해왔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 어느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와의 사냥 에피소드)
돈을 좇아온 해원의 삶은 사실 아버지의 세계 - 자본가의 세계 - 와 그다지 멀지 않았던 것이고,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해원의 내면은 통제에 대한 폭력적인 욕망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은 바로 소설의 결말이 보여주듯 해원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이 보여주는 비극적 결말은, ‘진정한 예술(가)은 자본(가)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게 나만의 좀 과한 해석과 감상이었다.^^ 끝없는 통제의 욕망이 빚어낸 자본가의 자기 파멸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고.
일부 독자들은 후반부에 벌어지는 사건들의 빠른 전개를 보며 등장인물들이 좀 폭주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듯 하다. 나는 작가가 소설의 전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꼼꼼하게 구축해 냄으로써, 후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이 비극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개연성을 부여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고전 비극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신이 부여한 운명'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반해 비극적 결말로 이끌려간다. 그런데 현대 소설에 '신탁(예언)'을 동원할 수 없으므로, 고전 비극에서 '운명'이 맡았던 역할은 등장 인물이 겪게 되는 경험과 그것 때문에 만들어지는 '성격'이 맡게 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는 가족 관계에서 상실과 결핍의 경험이 있고,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인물들이다. 그래서 얼핏 이해 안 되는 등장인물들의 선택이 캐릭터의 성격(트라우마)을 통해 이해가 되고 개연성이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하진이 준연을 자신의 증류소에 함께 머물도록 하는 결정은 해원의 주장대로 통상적인 남녀관계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하진이 경험한 상실들(동생,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잃은 경험)에 비춰보면 이해할만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바로 해원을 폭주하게 만들었고 비극의 도화선이 되어 버리는 것인데, 이런 요소가 나에게는 이 소설이 굉장히 고전적인 플롯을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 소설 후반부에서 그려지는 '광기'에 대해서는 책표지 뒷면 문구에 살짝 스포가 담겨 있다. 인용하자면 "사랑의 세레나데는 어쩌다 광염 소나타가 됐을까?", "불안과 질투, 분노와 망상, 이윽고 광기로 치닫는 사랑과 실연, 그리고 사람과 심연' 이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광염 소나타'가 담고 있는 이중적 의미는 나중에 깨닫게 되는데 책 뒷면에 쓰기에는 좀 과한 문구였다는 느낌)
* 등장인물들의 장광설도 어느 정도 기능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즉 경험을 통해 형성된 캐릭터의 성격을 등장인물들의 대사 - 좀 장광설이긴 하지만 -를 통해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소설에서 복선(떡밥)의 요소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이지만, 그믐에도 올려봅니다.
https://blog.naver.com/roadout
문학동네시인선 204 (240228~240303)
❝ 별점: ★★★★★
❝ 한줄평: 영원히 알 수 없을지라도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묻고 궁금해하고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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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여는 첫 시부터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 그리고 소유정 문학평론가의 해설까지 완벽했던 시집. 현실의 슬픔과 맞닿아 있으나 그럼에도 사랑을 향하며 본질과 존재에 관해 질문하고 탐구해 나가는 화자. 그렇기 때문에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까지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24/03/04]
(*문학동네 우필사 특별반 이벤트 당첨자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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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내 삶의 절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미래에도 더 아래로
사람들은 모든 서사에 절정이 필요한 것처럼 말하지만
강렬한 클라이맥스 없이도 아름다운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단조롭거나 자연스러워도 좋을 텐데
자연사처럼 쉽지 않겠지
/ 「클라이맥스 없는 영화처럼」 부분 (p.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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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너의 본질은 뭔지
자신다워지는 게 뭔지
자신이 꼭 있어야 하는지
네가 사랑하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 「올스파이스」 부분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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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대부분이 이십대였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조율하고 연습만 했던 이들이 많았다 생애 동안 준비만 했던 이들이 많았다
객석의 사람들이 구경만 한 건 아니었다 몇몇 부상자가 있었다 별로 실력도 없는 교향악단 연주회에 왜 갔느냐고 비난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다 나는 계속 야상곡을 틀어놓은 채 선잠이 들었었다 눈물을 닦는다 꿈이 아닌 것 같다
/ 「신년 청춘음악회」 부분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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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계속 살아나가게 하는 무언가가 사랑일 수 있을 거란 낙관적인 믿음은 어쩌면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본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 속에서 무엇으로 ‘나’의 실존을 회복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김이듬의 시는 아직 쓰이지 않은 사랑의 본질을 향해간다.
/ 해설: 복행(復行)의 시 | 소유정(문학평론가)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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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던 시
1부 | 여기 내 살갗의 무늬가 있다
✎ 「폐가식(閉架式) 도서관에서」 ⛤
✎ 「법원에서」
✎ 「간절기」 ⛤
✎ 「저지대」
✎ 「다행은 계속된다」 ⛤
✎ 「사랑의 역사」
2부 | 우리의 몸속엔 각자의 바다가 있다
✎ 「십일월」 ⛤
✎ 「저속」 ⛤
✎ 「카프리치오」 ⛤
✎ 「귓속말」
✎ 「당신의 문」
3부 | 나는 내 생애 최고의 시를 쓰고 있어요
✎ 「내일 쓸 시」 ⛤
✎ 「후배에게」 ⛤
✎ 「클라이맥스 없는 영화처럼」 ⛤
✎ 「드라이클리닝」 ⛤
✎ 「내가 던진 반지」
✎ 「필균의 침대」
✎ 「문라이트」 ⛤
✎ 「여름 효과음악」
4부 | 아직 나의 영혼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유 리드 미」 ⛤
✎ 「도로시아」
✎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서투르고 무력한가」
✎ 「너는 여기에 없었다」 ⛤
5부 | 악몽은 잘 이루어진다
✎ 「사악한 천사의 시」 ⛤
✎ 「올스파이스」 ⛤
✎ 「조용한 겨울」
✎ 「현지인」
6부 | 어쩌면 시에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 「신년 청춘음악회」 ⛤
✎ 「켤레」
✎ 「모르는 지인」 ⛤
✎ 「그림자 없는 여자」
✎ 「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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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시리즈 《덱스터》는 2시즌부터 억지 전개로 수준이 추락한다. 원작 2편은 TV 시리즈와 완전히 다른 내용인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이야기하는 건 별 의미 없는 일이지 싶다. 드라마도, 소설도 그 다음 편들은 보지 않았다. 소설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범행은 어떻게 하면 인간을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뜨릴 수 있을지 오래 상상한 결과물 같다. 실제로 당하면 정신이 버틸 수가 없을 듯.
내게 최고의 TV 시리즈는 《덱스터》 1시즌이었는데, 원작이 궁금해져서 찾아 읽었다. 결과는 실망. 연쇄살인마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라는 아이디어와 여러 가지 재치 있는 설정은 물론 원작의 공이지만 이야기의 깊이가 완전히 다르다. 타고난 이방인으로서 ‘정상인’들을 부러워하고, 가면을 쓰고 살며 고뇌하는 주인공은 원작에 없다.
한달살기는 3박4일의 여행과는 다르다.
일단 챙겨가야 하는 물건들이 내 기준 몇 개 있다.
1. 손톱깎이
여행만 가면 멀쩡하던 손톱 옆에 거스러미가 왜 갑자기 생기는 건지! 튼튼했던 발톱 끝은 왜 갑자기 깨져서 신경이 쓰이는 건지! 나는 이것을 ‘손톱깎이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옆에서 그게 바로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노노! 여행 중에 머피는 필요 없고 필요한 건 손톱깎이) 의외로 손톱깎이를 구비한 숙소가 많지 않다. 과일칼이나 가위 등은 리셉션에서 빌려주기도 하는데 반해 손톱깎이는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밤 12시에 손톱깎이 혹시 있냐고 물어보는 손님이 되지 말자.
2. 머그컵
호텔에 있는 앙증맞고 하얀 찻잔은 커피 두 모금이면 끝난다. 커다란 머그컵에 커피를 타야 좀 마실만한 양이 나온다. 마음에 들고 아끼는 예쁜 머그잔 말고 버리기 직전의 낡은 컵이면 여행 내내 잘 사용하다가 집에 가기 전 작별해도 괜찮다.
3. 옷걸이
옷장이나 행어를 갖춰 놓고서는 막상 옷을 걸 옷걸이가 없는 숙소도 종종 있다. 짧은 여행이면 갈아입을 옷도 몇 벌 안 되니 대충 의자 등받이에 걸거나 침대 위에 펼쳐놔도 되지만 한달살기 같은 긴 여행이나 날씨가 추운 지역으로 떠날 때는 두꺼운 외투를 걸어 놓을 옷걸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세탁소 옷걸이라도 몇 개 챙겨가면 좋다. 양말, 속옷을 간단히 빨아서 널어 말리기에도 유용.
4. 머리 자르기 : 물건은 아니고 필요한 서비스라고나 할까?
긴 여행을 하다 보면 머리카락이 그 기간 동안 자라 다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행지에서 머리를 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 베트남 물가가 한국보다 많이 싸니 미용실도 저렴하지 싶어 조사해 봤다. 남자 커트가 5천원~1만원, 염색은 2만원~6만원. 나의 예상보다 아주 많이 싸지는 않았다. 나 같은 경우 염색을 집에서 직접 하기 때문에 굳이 이곳에서 비용을 들여 해야 할까 싶었지만 남편은 머리를 좀 자르고 싶다길래 나트랑에서 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세 번째로 머물렀던 숙소 바로 앞에 이발소가 있었다. 바버샵 아카데미.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남자 커트 2만 동. (한화 1천원 조금 넘는다.) 너무 싼 것 같아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내 머리도 아닌데 ㅋㅋㅋ
들어가 보니 어린 청년들이 앉아 있었다. ‘바버샵 아카데미’라는 이름도 그렇고 현지 물가를 고려해도 너무 낮은 가격인데 미용학교 실습생들이 연습 겸해서 머리를 잘라주는 곳인 걸까? 하지만 뭐 어떤가! 내 머리도 아닌데 ㅋㅋㅋ
머리 다듬는 것을 옆에서 봤는데 의외로 이발사분이 세심하고 신경 써서 가위질을 하더라. 최종 결과물(?)도 깔끔하고 괜찮았다. 별도의 비용이 필요한 샴푸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아 1천원에 이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