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호주 출신의 독일사학자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이며 2015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에 영국과 독일의 관계를 위해 일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지난 번 읽었던 ‘독일 현대사’는 독일의 1870년 통일부터 1990년 재통일에 이르는 시기의 말 그대로의 ‘독일사the Hisotory of Deutschland’였다면 ‘강철 왕국 프로이센’은 약 1600년부터 1945년까지 지원진 이름의 나라 프러시아(프로이센은 Preussen이라는 독일어, Prussia는 영어식 표현이다; 익숙한 프러시아로 쓰겠다)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미국과 영국은 양차 대전의 원인을 프러시아라는 국가의 정신, 정체성에 있다고 파악하고 그 물리적 실체와 함께 그 정신(Preussentum)을 지우고자 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독일의 지명에서조차 프러시아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프러시아의 역사 발전을 그 모델로 차용했고 한국, 대만, 중국의 개혁 개방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그 근대화에 필요한 방법들을 학습해 성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프러시아는 더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호기심과 궁금증의 대상이 되는 나라였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선택지 중에서 그리고 그 격변의 시기에 어떻게 그 발전의 精粹(정수)를 찾아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에 성공하게 되었는지 정말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이 궁금증을 계속 되뇌이면서 그 답을 찾아가고 싶다.
앞서 소개한 책 ‘중세’에서 13세기 폴란드와 헝가리가 몽골의 침입으로 인구가 격감했을 때 서쪽의 부지런한 게르만족이 이주해 그 빈자리를 메웠기 때문에 오히려 몽골의 침입 이전보다 생산성이 더 올라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프로이센 정신(Preussentum, Prussia Virtues)이라고 칭송하는 독일의 국민성이 꽤 오래전부터 프러시아 지역에서 유래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의 서러시아,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폴란드에 이르는 북독일, 발트해 연안 지역은 원래 이교도들이 살던 지역이었다. 인종적으로는 슬라브족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13세기가 되면 튜튼 기사단 혹은 독일 기사단이 십자군 전쟁을 벌여 서서히 이 지역이 기독교화 된다. 이들 독일 기사단은 같은 가톨릭 국가인 에스토니아-폴란드 국가들과도 영토적 전쟁과 대치를 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 이후 템플 기사단의 숙청을 지켜 보면서 이들 기사단들은 교황과 가톨릭 교회에 엄청난 불신과 원한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훗날 종교 개혁에 이르는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8세기 출현한 프리메이슨과 그것의 급진 세력인 일루미나티는 모두 독일 가사단과 무관치 않다.
주요 프러시아의 통치자들을 간단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1525년 튜튼 기사단의 大마스터였던 알베르트가 프러시아 공작이 되며 세속국가화 된다. 알베르트는 브란데부르크를 영지로 갖는 호헨즐레른가의 귀족이었고 브란데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갖는 選(선)제후국이었다. 이후 프러시아는 호헨즐레른가의 가계로 이어진다.
1688-1713년(재위) 프리드리히 1세 시기 신성로마제국내에서 공국에서 왕국으로 도약한다.(1870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약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1713-1740(재위) 프리드리히 빌헬름 I는 군인왕이라 불리며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 전성기의 초석을 놓는 군제 개혁 등을 이룬다.
1740-1786(재위) 프리드리히 II,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다. 18세기 계몽군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와 이순신 그리고 계몽주의를 합쳐 놓은 듯한 인물처럼 보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40년 즉위하자 마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토였던 실레지엔을 공격해서 차지한다. 이는 그때까지 신성로마제국 내의 역학 관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는 대 변곡점이 된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그 결과물이 7년전쟁(1756-63)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니얼 퍼거슨에 의하면 7년 전쟁은 산업혁명 이전 시기, 20세기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대전쟁이었다고 파악한다. 프랑스가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입지를 상실하는 것과 동시에 이제 러시아는 유럽 역사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는 러시아와 프러시아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거래를 통해 프러시아의 동부 영토를 러시아에 양도하고 서쪽의 라인강 유역의 공업 지대를 획득하게 된다. 이 모든 사단이 프리드리히 2세의 슐레지안 침공에서 격발된다.
프러시아는 官民(관민)이 一體(일체)화 되는 전형적 사회였던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프러시아는 문맹률이 낮고 식자율이 대단히 놓은 사회였으며 공무원들이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계몽주의자로서 큰 역할을 담당한다. 영미 사학계의 주장처럼 시민 계급의 성장이 지체된 독일의 후진성이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는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임마누엘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치세를 계몽주의 그 자체로 파악했다. 왕이 스스로 프리메이슨의 회원이 되었고 수많은 독서회와 이념써클에 공무원들이 참여해 자신들의 의견을 언론 매체에 피력한다.
1820년대 헤겔은 프로이센이라는 국가를 ‘이성’과 동일시 하며 그의 시대에 이르러 역사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일체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이 저명한 철학자들이 자신의 조국에 대해 했던 평가를 오늘날 단순히 국수주의적 뽕이라고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 사회의 성격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18세기 영국에서는 좀도둑에게도 쉽게 사형 판결을 내려 처형했고(한 해 1천 명이 넘었다) 수 많은 경범죄자들을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오지에 갖다 버렸지만 독일에서 이 시기 사형수는 세 자리수를 넘지 않았다. 그것도 실체 처형된 경우는 아래쪽 두 자릿 수에 해당한다. 또 오늘날과 같은 사회복지 개념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바로 프로이센이라고 하는 국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 영미 사학계는 이를 단순히 융커 귀족들이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사회정책이라 폄하하지만 그런 주장은 牽强府會(견강부회)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독일 철학과 실제의 국가실체와의 유착을 보면서 독일 근대 철학을 지나치게 이상화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헤겔이 프로이센이라는 국를 통해 국가와 이성이 합체되는 역사의 종언이 이루졌다는 선언을 카피한 것이었다.또,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칼 마르크스가 헤겔의 ‘국가’를 유물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치환한다. 그 역시 자본주의 종말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헤겔을 본 뜬 것이었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서양 철학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다.
프러시아는 사회경제적으로 균질한 사회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엘베강 동쪽과 같이 융커 귀족 중심의 봉건적 사회질서가 강한 사회도 있었지만 라인강 유역의 서부처럼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사회경제 구조를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말할 수가 없다. 지배계급의 비정상적 내지 과도한 착취 구조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세기는 공산주의의 시대였지만 역사적 실험을 통해 ‘평등한 인간 사회’는 실현되기가 쉽지 않다는 역사적 교훈을 학습하게 되었다. 때문에 전국시대 유학자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것처럼 프러시아와 같은 사회 모델을 참고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노력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 이후 愚衆(우중)의 정치 시대로 접어든 것이 분명하다.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의 불만과 불안이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며 표출되기 보다는 오로지 권력만을 탐하는 정치 모리배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와중에 올바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오늘도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 듯 내 의식의 안뜰에 이렇게 봄볕과 같은 각성의 시간이 찾아 드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그 빌 풀먼이 벌써 일흔이 되셨고! 저렇게 아드님도 장성하셨구나. 성이 익숙하여 찾아보니 문득. 셋탑을 apple TV로 바꿔서 준 3개월 무료체험, btv orpheo, arte, mezzo 열심히 보다 이제 시작 ㅎㅎ 그나저나 아드님 매력은 아빠 못 따라감. 소싯적 그가 등장한 영화들 엄청 챙겨봤던 쟈^^
소설은 짧은 분량의 단편 이야기들이 뭉쳐있지만 이야기의 연결성은 전혀 흐트려지지 않는다. 장면의 서술은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속도도 일관성있게 나아간다. 또한 작중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대 소설보다 오히려 더 개성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설득력을 내어준다. 무엇보다 기나긴 이야기를 서술하면서도 작가가 이야기나 등장인물들에게 끌려가지 않는 것도 고평가할 요소라 할 수 있다.
다만 짧은 이야기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부터 주인공 돈키호테가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넘어간다던가 갑자기 등장인물들이 연이어서 등장하는건 상업적인 의도가 엿보였다.
(보르헤스는 돈키호테에 우연적인 요소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씻을 눈이 없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게 우연적인 요소가 없는 책이면 보르헤스는 운명론자임이 틀림없다. 유충렬전도 그에게는 필연적인 책일 것이다.)
후편을 읽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독자에게는 불필요할지몰라도 작가가 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는 꼭 음미할 필요가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장강명 작가의 SF 단편집. (작가는 STS SF라고 명명했다.)
수록작들이 하나같이 흥미로웠다. 이런 설정들을 어떻게 생각해내고 또 그럴싸하게 써낼 수 있을까? 역시 소설가는 똑똑하고 집요해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공부를 많이 해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표제작)
'옵터'라는 증강현실기술이 상용화된 시대이다. 옵터는 말하자면, 세상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것. 더 아름답게, 더 부드럽게, 덜 위협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야. 이런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객관적 현실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내가 보는 세상이 내 옆사람이 보는 세상과 똑같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늘 '집 잃은 개'(리링, 논어해설서)에서 본 문장이 생각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반드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아주 예전에 한 생각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다가 이 사람이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은 아주 다르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의 실재성에 대해 조금 의심했던 것 같다.
게다가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 사람들은 점점 더 외모를 가꾸고, 때로는 변형시키고, 매력적인 '애티튜드'와 '스타일링'을 고심한다. 심지어 그러한 노력을 '철저한 자기관리'로 보기도 한다. 동안이 되기 위해 피부과에 가고 몸매 관리를 위해 피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수준 높은 대화를 하기 위해 책이나 신문을 읽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니 그런 노력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손쉬운 길이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할까? 나는 어떨까?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의 부모 세대처럼 '진짜 풍경을 가짜 풍경이 이길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 각자가 인식하는 현실은 항상 주관적이었을 것이나 근래 들어 그 정도가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정보의 생산권이 일부 세력에게만 있지 않고 이제 누구나 정보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시대.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믿고 싶은) 말을 떠들어대고, 구독과 좋아요를 통해 그런 말만 듣는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연 우리 사회 개개인의 경험이 과연 동시성을 지닐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주관적 현실'이라는 설정을 상당히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설정만 들으면 말도 안 된다, 이런 가짜를 누가 원할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를 조금 낮춰보면 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그렇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음모론을 퍼뜨리고,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상만을 올려치기하는 지금의 현실과 소설 속 크루즈에 탄 사람들이 과연 다를까?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내가 이 소설의 설정을 아이에게 이야기했더니 '에이, 그런 걸 누가 해요? 어차피 가짠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가짜라는 걸 아무도 모르거나, 모두가 그 가짜를 두르고 다닌다면 과연 어떨까?
증강현실기술은 어디까지나 "실재하지 않는 것의 좋은 점과 실재하는 것의 물리적 이점을 합치는 거"(13쪽)에 불과하고,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다 주관적 현실 속에서 사"(17쪽)는 것이며, "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22쪽) 것은 아니므로 "하늘을 파란색으로 보이게 해주는 색안경을 쓰면 기분이 좋아질 텐데 그런 색안경을 쓰면 안 될 이유가 뭐"(23쪽)냐고 묻는 말에 그건 궤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소설 밖이 아니라 소설 속 세상에 있다면 과연 어디까지 옵터에 의지하게 될지... 사실은 가늠이 안 된다. 스마트폰을 남용하면 좋지 않고 쇼츠에 의지하면 도파민 중독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내가 말이다.
장기 베스트셀러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 권해주신 분이 있어 읽어보았다. 굉장히 다가오는 것이 많으면서도, 내가 지금 정신적인 과도기를 거치고 있어서 그런지 명쾌하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질문이 더 많아지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항상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때로는 눈코뜰 새도 없이 살기 때문에 세상이 굴러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정을 담아서, 그 일 속에서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물의 완벽함을 평가할 수 있고 확신까지 할 수 있는 사람도. 그걸 해낸 사람이 말하는 것이니 문장의 무게가 묵직하다만, 오히려 자신이 없어지는 부분도 있다. 어떤 분야라도 일단 완벽하다 아니다라는 눈을 기른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노력이 매우 중요하고, 하다보면 어제보다는 나아지지만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는 다르지 않은가. 일이 너무나 좋아서 평가는 관계없이 그냥 몰두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운이 나는 것은, 일단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재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은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누군가 조금은 아프게 등을 두드리며 앞으로 밀어주는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불법적인 입양으로 이슈가 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미혼모를 돌보는 시설로 포장되어 노동착취를 하거나 아이를 훔치는 일이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시작한 짧은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하드커버가 아닌 문고판으로 가격을 절반정도로 책정했다면 고마운 소설이었겠다 싶지만, 궁금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소설제목 때문에 홀리듯 구매하고 말았다.
지역사회에 영향력 있는 재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눈감아 버리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주인공 펄롱은 위태로운 평온함이 잘 묘사되었고 그가 갈등하는 마음을 서술하는데 집중한 소설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상상하기로 영화처럼 극적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구출하는 아름다운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지만, 이 소설은 펄롱의 관점에서 안온한 삶의 생채기가 생겨 돌아올 수 없을까 두려워 하는 소시민의 평범한 용기를 담았기에 더 호평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유 작가를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면 작가님의 책을 다 찾아 읽은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인데, 그렇지는 않다. 사놓고 안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한 책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좋아하는 작가이다.
은유 작가는 다양한 책을 썼고 내가 읽은 책들이 다 좋았지만, 르포나 인터뷰에서 특히 강점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전에 '출판하는 마음'이라는 인터뷰집을 읽고 너무 좋았는데, 같은 시리즈의 '문학하는 마음'은 그 책만큼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은유 작가가 얼마나 뛰어난 인터뷰어인지 알게 되었던 계기.
'해방의 밤'은 인터뷰집은 아니고 은유 작가가 책(또는 영화나 음악까지)을 소재로 쓴 에세이이다. 부제에 나온 것처럼 그냥 에세이라기보다는 편지일 수도 있겠다. 특정 대상을 편지의 수신자로 정해놓아서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시에, 그 편지가 결국 나에게도 와 닿는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울림이 깊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읽고 싶은 많은 책들이 생겨났고,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 문장 수집은 별도로 하고, 특히 인상에 남은 것은 아룬다티 로이. 아직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은유 작가가 서술해 놓은 내용만으로도 존경하는 마음과 이 사람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다. (언니가 십수 년 전에 '작은 것들의 신'을 몇 번이나 추천했는데도 읽지 않았던 나를 반성...)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이 정말 많이 생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변방의 아이들'(성태숙)은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을 통해 자꾸자꾸 내 세계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
자전적인 이야기로 성공적인 장편 데뷔작을 만든 감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편견이 있다. 사람은 자기 성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그것이 초심자의 행운과 맞물렸을 땐 벗어나기 힘든 덫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이런 소재는 <파벨만스>처럼 커리어의 끝자락에 만들어야 함.
몇몇 좋은 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연기가 참혹해서 한국인이 즐기기에 적확한 영화는 아닐 듯.
이 책을 '내 인생을 바꾼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인생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이건 일반론), 이 책을 갓 다 읽은 내가 아직 이 책을 통해 달라진 점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알려준 이는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 그런 것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독서모임에서였고, 그 말을 듣자 우리 모두는 덮어놓고 이 책을 다음 책으로 정했다. 전반부를 읽고 이미 한 회 모임을 했고, 우리 모두 이 책이 매우 엄청난 책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머지 후반부를 어제 다 읽었는데, 내 행동이 달라질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내가 그 동안 대충 알고 있거나 잘 몰랐던, 혹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던 세상에 대해 알려준 책임은 분명하다.
너무 많은,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지는 못하겠지만, 뒤로 갈수록 이 작가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고,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무력감이나 자포자기에 빠지기 쉽다. 기후위기라든가 장애인차별, 동물학대 등 여러 거대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 생각은 충분히 절박하지 않아서 쉽게 취하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났고, 장애학과 장애운동에 대해 깊이 공부한 수나우라 테일러는, 당연히 나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실제로 느꼈을 것이고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를 말하거나 쉽게 분노하거나 들고 일어나자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목소리로 어떤 지점에서 어떤 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손쉬운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가능성을 떠올리며 포기할 것도 아니다. 정말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깊이 파고들어야 하고, 여러 측면을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 적절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다시 한 번 줄을 긋고 싶다.
"서툴고 불완전하게,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