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로 명성이 높은 박지은 작가의 주말 드라마. 한국적인 유교와 재벌 문화를 바탕으로 소재의 줄기를 잡아가다 1화 엔딩즈음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된다.
다 읽고 난 지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
루 애런데일의 선택은 최선이었을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바라보는 톰, 루시아, 마저리의 마음은 어떨까? 물론, 루는 수술(치료?)을 통해 꿈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잘된 일이다.
루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경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지금 모습을 잃고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 두려워했다. 그러나 일련의 경험들 속에서 그는, 자폐는 그의 전부가 아니라 그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수술 같은 것이 아니어도 자신은(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 이상 변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를 시도하기로 선택한다.
'나는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 내 경험을, 그저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듯이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나는 기억에 따르는 감정들을 간직하고 싶다.'(395쪽)
그랬던 그가 왜 시도하기로 선택했는가? 이어지는 내용은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장면이다. 병이 낫기를 기다리며 치유의 연못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너는 낫고자 하느냐?' 루는 처음에 그 질문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낫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왜 치유의 연못에 갈 것인가? 혹은 그 자신은 원하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원한 것일까? 설교를 들으며 그는 자신은 낫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이 받아들여진다고 믿었던 교회에서마저 어쩌면 '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목사와의 대화에서 그는 묻는다. '그렇다면 저는 낫고자 해야 합니까? 나을 방법이 없어도요?' 그는 혼란스럽고 괴로워한다.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를 배우던 기억. 그게 루에게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이번에도 나는 두렵다. 허나 만약 내가 이 물결, 이 생물학적인 자전거를 타낸다면, 나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이 얻을 것이다'(443쪽)
'만약 내가 변한다면, 그리고 변화가 그들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라면, 어쩌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꼭 어느 한 가지가 아니다. 모든 것들, 모든 가능성들이 한번에 존재한다. "나는 지금과 같지 않을 거야." 나는 소리 내어 말하고, 편안한 중력을 놓고 그 확실함 밖으로 나와 불확실한 자유 낙하를 향해 날아오른다.'(444쪽)
마저리는 그에게 "루, 너는 지금 이대로도 좋아. 나는 지금 네 모습이 좋아. 다른 사람들처럼 되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루는 조금 더 자신의 선택을 자신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야 한다고, 자폐를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면 그는 거부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병자를 연못가에 데려다 놓는 것처럼. 그러나 루는 스스로 변화를 선택했다.
달라진 루를 보며 아마도 마저리는 매우 큰 상실감을 느꼈겠지만, 어쩌면 내가 슬픈 감정이 든 이유도 비슷한 것일지 모르지만, 루 애런데일의 입장에서는 그것 또한 폭력일지 모른다. 그대로 머무르든, 변화를 향해 나아가든, 그것은 루의 선택일 때 의미가 있다. 타인의 인정이나 강요가 아니라.
이 책은 우연히 고른 책이지만, 지금 읽기로 한 데에는 앞서 읽은 '짐을 끄는 짐승들(수나우라 테일러)'의 영향이 컸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을 이야기하는 그 책과 연관해, '침팬지와의 대화(로저 파우츠 외)'를 읽으며 동물해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고 장애해방과 연관되리라는 생각에 다음으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위 책에 수나우라 테일러가 피터 싱어와 인터뷰한 내용이 나온다. 싱어가 말한다. "저는 사람들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요. '당신이나 당신 아이의 장애를 치유할 수 있고, 그 비용도 겨우 2달러에 부작용도 전혀 없다는 것이 보증된 알약을 누군가 준다고 해도 그 알약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글쎄요. 제가 볼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 약을 사용하려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235쪽)
수나우라 테일러는, 싱어의 질문이 비장애중심주의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루는 약을 먹기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책(어둠의 속도)은 비장애중심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책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테일러는, '장애가 우리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루에게서도 드러난다. 테일러는 장애가 있는 상태가 완전하다거나 비장애의 상태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불완전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마커스의 말-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은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라는 생각에 저항한다. 게다가 그의 말은 우리가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반드시 중심에 두지는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촉구한다. (...) 장애는 해방적일 수도 있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 (238-239쪽)
뒤이어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하지만 확실히 자신에게 있는 장애를 즐기지 않는 장애인들, 장애를 "창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 장애인들, 치료된다는 말에 크게 기뻐할 장애인들은 많을 것이다. 이는 비단 비장애중심주의와 내면화된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상실, 고통, 개인적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보듯, 테일러가 장애로 인한 불편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테일러가 싱어의 질문을 경계하는 이유는, '치료의 문제는 자신의 장애에 대한 자긍심 대 의료적 개입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테일러는 여기서 앨리슨 케이퍼의 말을 인용한다. "치료에 대한 욕망이 꼭 불구를 반대하는 입장이나 장애에 대한 권리 및 정의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247쪽)
여기에서 테일러는 문제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짚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기를 원하고, 장애를 갖고 싶어 하지 않고, 장애로 인해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실들이 뜻하는 바가 장애란 객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감정들만이 장애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라고 보는, 아주 뿌리 깊고 만연한 전제 자체다.' (248쪽)
그러므로, 실험적인 치료를 받기로 루가 선택했다고 해서, 자폐는 치료되어야 할 장애이며 불완전하고 비정상인 상태이다, 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루가 그런 선택을 할 때에도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394쪽)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의 선택은 두려움을 딛고 새로운 배움으로 발을 내딛는 것, 수영을 배우거나 자전거를 배우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비장애인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오후 책을 다 읽은 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안타깝고 슬펐는데 글을 쓰다 보니 명확히 정리가 된다. 루는 선택을 했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맞았다.(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슬퍼할 게 아니라, 그 사실을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것이다. 몇 번이고 넘어지다가 자전거를 타게 된 아이를 보면 그러하듯이.
언제부턴가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는 보는 게 힘겨웠는데 현란한 의상과 미술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엔딩 타이틀 내내 대체 저 폰트는 뭘까 번뇌함.
곧 나오리라 예상되는 신기술들을 소개하는 책. 소행성 광산업이나 바이오닉 맨처럼 당연히 등장하겠지 싶은 기술도 있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처럼 개인적으로 글쎄다 싶은 기술도 있고, ‘착한 모기 만들기’나 ‘대통령 DNA 해킹하기’처럼 으스스한 이야기도 있다. 놀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던 것은 스테로이드에 대한 대목이었다. 책에 따르면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악명은 상당 부분 과장되었거나 아예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얼마나 믿을만한 얘기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