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크기를 매크로와 마이크로로 구분지을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마이크로 스트레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간과하지만 누적되면 치명적인 미세 스트레스의 영역인데 읽고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목적 의식을 갖자 등등의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김동식 작가의 픽션이 아닌 글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잘 쓴 에세이. 좋은 글은 역시나 솔직함. 초기 작품들을 봤을 때 과연 이 작가가 지속 가능할까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에세이를 읽으니 충분히 지속가능하고도 남을 듯.
위즈덤하우스의 사기 世家세가는 김원중 선생이 번역을 했는 데 본기를 읽을 때 신동준 선생의 번역이 익숙해져 그만 올재에서 나온 신동준 선생의 세가와 열전으로 바꿔 읽게 되었다.
세가의 내용을 편의상 세 부분으로 구분해 보았다. 고우영 화백의 열국지로 익숙한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의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고 두 번째 제후는 아니지만 공자의 일대기와 머슴 출신으로 통일된 秦(진)나라에서 처음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었던 진섭의 세가 그리고 한나라의 개국 공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姓氏(성씨)의 유래는 주나라의 봉건제도와 관계가 깊다. 주나라는 왕실은 姬(희)라는 姓(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봉국 제후들은 魯(노)씨, 宋(송)씨와 같은 같은 氏(씨)의 씨족사회를 이루며 성 대신 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둘을 합쳐 姓氏가 되었다. 이들 주나라 왕실의 姬희 姓성을 가진 왕녀들과 각 봉국의 제후들이 결혼을 하면서 훗날 여자 이름에 희를 사용하는 유래가 되었다. 요즘은 ‘희’자를 써서 딸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촌스러워 보이지만 원래 이는 왕족을 의미하는 존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世家세가의 의미는 제후국과 같이 世襲을 통해 一家(일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을 이들 세가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 보면 이것이 단순히 2천년 전의 인간사라고 보기 힘들 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 팔리는 그 수많은 처세술과 성공술에 대한 책들의 상당수는 바로 이 사기의 내용을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사마천의 사기와 북송 시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가장 중요한 역사서라 꼽았다고 한다. 이 책들을 17번씩이나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1949년 이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기와 같은 역사서의 이해는 중요해 보인다. 사기와 자치통감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관이 여전히 현대의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모두 유교적 사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正閏論(정윤론)에 바탕하고 있다. 이 말은 정통성과 명분을 말하는 것이다. 閏(윤)자는 음력의 윤달과 같이 태음력의 부족한 날수를 채우는 것과 같이 불완전한 것을 말한다.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말하는 역사관의 효시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된다. 이민족의 왕조가 한족을 지배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심화될수록 이와 같은 시각은 점점 더 경직화 된다. 역사를 통해 인간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판단하기 보다 선악의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하는 폐해가 심해지게 된다.
동서양의 차이를 가르는 분수령은 12세기였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아랍 사회를 통해 전래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이들 고전과 아랍 텍스트에 대한 번역이 들불처럼 일어나며 일종의 정신 혁명이 이루어진다. 이 결실이 르네상스, 근대과학, 산업혁명,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요(거란), 금, 원과 같은 이민족의 한족 지배에 대한 반동으로 한족 민족주의가 강렬하게 일어난다. 12세기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정치적으로는 이민족의 지배, 사상적으로 불교에 의해 한족의 정통 유학이 말살되는 것에 커다란 존재론적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주자학이라는 열매로 맺어진 것은 동서양의 역사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된다. 서양에서도 이 시기는 바이킹이라고 하는 이민족의 침입과 지배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는 공통점을 갖기 때문에 그 대응 방식의 차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野合(야합)이란 말이 공자의 출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야합은 野地(야지)에서 남녀가 교합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는 은나라 후손인 것처럼 보인다. 그 조상은 은나라 후손이 세운 송나라 출신인 데 그의 아버지는 몇 명의 부인을 통해서도 아들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노나라에 한 巫女(무녀)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사정을 말하니 그녀의 셋째 딸이 자원을 했다고 한다. 그 셋째 딸은 시집을 가면 남편이 죽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받아 들인 사정이 있었고 그렇게 야합을 통해 얻은 자식이 바로 공자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역시 무녀였다.
공자는 怪力亂神(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다. 天(천)과 같이 신학적, 형이상학적 주제를 논하지 않은 것은 무녀를 어머니로 둔 그의 출생 배경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참 궁금한 내용이다. 공자시대에는 순장과 함께 인신공양이 여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는 그와 같은 풍속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순장의 희생 대신에 넣는 인형에 대해서도 무섭게 비판을 한다. 그리고 동이족의 무릎을 꿇고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풍습에 대해서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상당히 신랄한 지적을 했다. 유교적 합리주의, 휴머니즘은 중요한 정신혁명이었다. 사실, 가톨릭의 미사에서 성찬이라는 전례 역시 일종의 인신공양의 遺制(유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가톨릭은 예수를 인간의 원죄에 대한 인류 전체의 속죄양이라 파악한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사를 통해 종래의 인신공양의 유습을 인류 구원의 신화로 재창조, 승화시킨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은나라는 무속에 바탕한 祭政一致(제정일치) 사회였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청동기 사회에 대한 철기 문명의 우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유교적 합리주의와 같은 휴머니즘, 인간 존중의 승리일 가능성도 크다. 은나라를 대신한 주나라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역사의 웅변처럼 들린다.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라고 하는 속담은 진섭 세가의 기사 “燕雀安知鴻鵠之志”에서 온 것이다. “제비와 참새가 홍학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가 원문의 해석이다. 머슴으로 일하던 진섭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나중에 잘 되면 서로 잊지 맙시다”하고 덕담을 건넸지만 주변의 동료들은 머슴이나 하고 있는 주제에 무슨 흰소리를 지껄이느냐 하는 식으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때 진섭이 던진 말이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도 바로 이 진섭 세가의 기사에서 비롯된다. 비록 진섭이 왕노릇을 한 것은 6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사마천이 그를 세가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미천한 출신 배경에서 왕후의 지위까지 이른 그의 인생 역정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와 같이 역경을 딛고 일어 선 인간사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자신의 삶과 오버랩되며 사기 전체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고난과 실의에 빠진 인생의 험로에서 끊임없이 용기와 인내를 북돋아주고 분발의 격려를 보내주고 있는 듯 하다. 사마천의 사기는 아마도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한 불멸의 기록으로 인류에게 남을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이 공자와 진섭의 세가는 기전체의 역사서의 편제 원칙상 열전에 속해야 할 기록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이들의 기사를 열전으로 돌렸다고 한다. 이것이 사마천 특유의 관점이고 개성일 것이다. 2천년의 시공을 넘어 그 울림이 전달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세가를 읽고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공자와 진섭에 집중하게 되었다. 물론, 사기의 세가는 당연히 열국의 제후들과 漢(한)나라의 건국공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그렇지만 독후감이라는 것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의 感想(감상)인한 기억에 크게 남은 내용을 적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기 한글 번역서가 완간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기에 대해 포스팅한 인터넷 컨텐츠가 많은 듯 하면서도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예를 들면 열전 등에 소제목으로 등장하는 사자성어를 검색해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꽤 많다.
논어와 같은 경서를 읽는 것보다 이 ‘사기’를 읽을 때 비로소 고전의 가치와 진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앞으로 살면서 몇 회를 더 반복해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재독 삼독 이상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실용성을 절감했다.
페니실린이 발견된 게 1928년이다. 메리 멜런은 1869년에 태어났다. 장티푸스균을 지니고 있었지만 본인은 병에 걸리지 않는 무증상 보균자였다. 실명이 공개되고 ‘장티푸스 메리’라는 악명이 붙은 그녀는 신분을 숨기고 도망 다니며 요리사로 일했고,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장티푸스 사망자들이 나왔다. 끝내 보건당국에 붙잡힌 그녀는 26년 동안 격리병동에서 살아야 했다. 메리를 위해 슬퍼하고 그녀가 당한 부당함에 분노하거나 명예욕에 눈이 먼 의사나 잔인한 언론, 군중심리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공안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할 때 어떻게 선을 그을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