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작가들이 자신의 작가 생활에 대해 쓴 에세이를 읽는 건 나에게 길티 플레저다. 내 작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읽으면 다 재미있다. 저자가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읽어본 한국 소설가들의 소설가 생활 에세이 중 이보다 더 솔직한 책은 없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쓰시다니.
수명 연장과 노화 방지 연구를 소재로 하는 알찬 교양과학서. 저자가 입담이 좋고 ‘뭐 먹으면 오래 산다’ 유의 조언을 피하는 터라 신뢰가 간다. 절식을 포함해 여러 가지 좋다는 습관이나 음식에 대해 대부분 ‘영향이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 것은 역시나 운동과 식이 섬유 섭취라고.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무신론자들은 이런 사상에 빠져 파멸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신 없이 도덕과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믿었다.
『도덕의 궤적』(바다출판사)은 이런 믿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인류가 앞으로 종교적인 기반 없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적 저작이다. 작가는 리처드 도킨스 등과 함께 종교를 공개 비판하는 무신론자 지성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셔머.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을 위한 잡지 《스켑틱》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768쪽짜리 책의 앞부분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내용이 겹친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꾸준히 감소했고, 그런 진보의 동력은 종교가 아닌 과학과 이성이었다는 분석이다. 참고로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속편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이 책”이라고 『도덕의 궤적』을 호평했다.
셔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인류의 도덕적 발전에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는 견해를 펼친다. 일부 계층에서 전체 인류, 더 나아가 동물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를 포괄하려는 길로 우리가 구불구불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는 문명의 단계별로 인간을 제어하는 힘이 기본 감정에서 원시적 정의감, 형사사법제도로 발전하며, 다음 목표는 응보가 아닌 회복을 추구하는 정의라고 주장한다.
인류 전체에 초점을 맞췄기에, 도스토옙스키가 고민한 ‘왜 나 개인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어물쩍 넘어간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치밀한 사유와 꼼꼼하게 수집한 근거들은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문명 2.0’과 외계인에 대한 논의까지 펼치는 말미에는 장쾌하다는 탄성도 나온다.
책을 펴낸 바다출판사는 한국판 《스켑틱》도 2015년부터 내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왜 다윈이 중요한가』 등 셔머의 다른 저작도 출간했다. 김인호 대표는 “셔머의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우리 출판사의 지향성이고, 제 개인적인 지향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책은 나온 지 한 달 만에 초판 1쇄가 다 팔렸다고 한다.
인도.
계급.
정치.
여론이 몰고 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변화.
지반, 러블리, 체육선생 사이에 등장하는 막간극들.
한 명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씁쓸하고 슬프고 화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허무를.
마지막 챕터에서 글이 짧아지면서 작가님 목소리가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마지막 산문과 에필로그 통해서 다시 충전 되었다.
좋은 문장, 마음에 남는 문장이 많은 산문집.
북마크 한 부분만 종종 열어봐도 좋겠다.
외계인.
여성 노동자.
이 두 단어 만으로 설명이 가능 하지만 그 깊이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신비하고, 가슴 아프며, 재미있기까지 하다.
삶과 죽음.
현 제도에 대한 시선.
커뮤니티. 공동 생활에 대한 이야기.
진정한 복지.
의료와 돌봄의 차이. 떨어뜨릴 수 없는 연결고리.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과연, 웰 데스라는 건?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좋은 책이야.
“때론 진실보다 거짓 섞인 사실이 더 진짜같다”
영화 후반부 웹소설 ‘댓글부대’로 인해 찡뻤킹과 팹택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주인공이 받은 피해와 허무함은 진짜고, 그들을 보며 느낀 내 감정도 남는다.
허위조작정보는 그래서 문제다. 대안적 사실은 존재해선 안된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는 영국 출신이고 아일랜드의 대학에서 주로 가르친 소련 역사학자다. 또 과기대의 김남섭 교수는 이 책을 아주 깔끔하게 잘 번역했다. 잘된 번역의 책을 대할 때마다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하게 된다.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한국 사람에게 소련을 연상시키는 러시아 역사는 냉전 이후에도 일정한 선입관 속에서 바라 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6. 25사변 때문이지만 그 밖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보도에서 서방 언론의 영향에 일방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냉전 구조에만 함몰될 수 없을 만큼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도 깊어졌다. 따라서, 서방의 편향된 대러시아 시각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러시아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스탈린이 한국 전쟁을 사주했다는 事實(사실)은 불변의 史實(사실)이었다. 소련이 6.25 사변을 주도한 마스터 국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의 성장이 러시아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러시아 또는 소련에 대해 우리 내부가 기존의 관점으로부터 변화된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주로 스탈린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다. 20세기말 크레믈린 정부는 과거 소비에트 시절 대량의 공문서들을 공개하고 보다 풍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서 보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는 대표적으로 이들 러시아 사료들을 바탕으로 스탈린 주도 하에 독일 나찌와 벌인 소위, “大祖國(대조국)전쟁”에 대해서 상술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을 통해 세계2차 대전의 實像(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헐리우드 영화의 세뇌? 속에서 제2차 대전은 영미 연합군과 추축국 독일, 일본의 싸움이란 구도가 지배적인 이미지였지만 실제 유럽에서 벌어진 2차 대전의 주전장은 독일 나찌와 소비에트가 동부 전선이었다는 역사적 眞相(진상)이다.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은 그 첫해 소련의 전사자가 5백만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4년 내내 1천만 명의 전사자 그리고 민간인 사망자 2천만 명을 포함해 3천만 명이 전쟁에서 죽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인구가 1억 7천만 명이었다. 사망자에 더해 부상자를 포함하면 이 전쟁의 참상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큰 시련이었을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한국 전쟁 당시 사상자는 1천만 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사이즈로 따지면 역시 상당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독일 나치군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군대였다. 그들의 강력한 기갑부대, 독일군의 엄격한 규율과 독일 군인들 개개인의 탁월한 자질 등에 대해 스탈린은 전쟁 기간 내내 거듭 칭찬하면서 전후 독일의 완전한 해체 또는 약체화를 주장한다.
스탈린은 영미에게 유럽 대륙에서 제2전선을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국은 꾸물대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하는데 이는 수에즈 운하 등과 관련한 영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1944년 여름에나 가능하게 된다. 소련군이 독일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에 의한 强姦(강간)이 수백만 건이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다. 쇼킹이 아닐 수 없다. 독일 나치는 독일 민족의 순수성, 우수성 등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하고 있었는데 승리의 여신은 분명 독일 편이 아니었던 듯 싶다. 아니 여신의 보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이 전쟁 중 동유럽 국가들 중 ‘폴란드’라는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는 전쟁 기간 내내 런던의 망명 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런던 망명 정부를 중심으로 소련이 반격으로 국면 전환을 할 때 폴란드 국내에서 독일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지만 무참히 실패하게 된다. 망명 정부는 폴란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현재, 유럽의 정치 지형에서 폴란드의 입지는 미국과의 이해관계에 가장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 밖에 핀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이 모두 독일과 연합한 추축국으로서 소련과 싸웠던 패전 국가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쿠릴열도 문제가 러시아에게 중요한 것은 블라디보스톡 등으로부터 오호츠크해로의 진입이 차단되어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었다. 때문에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쿠릴열도는 일본보다는 러시아에게 더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 그곳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아야 하는 또다른 절체절명의 전략 요충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은 러시아, 중국, 한국의 태평양 진출을 모두 제어할 수 있는 전략적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이래 저래 한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을 필요로 한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는 대조국전쟁을 진두 지휘하며 승리로 이끈 스탈린의 능력과 리더십을 전쟁에 대한 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동서 냉전의 심화 속에서 스탈린 체제의 경직화 그리고 그 숙청에 대한 서술은 조금 소극적이다. 종전후에도 스탈린은 영미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끌고 싶어 했다고 저자는 주장하지만 실제 서방과 제3세계 국가들에 공산주의 체제의 수출을 도모함과 동시에 서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논리는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스탈린은 처칠 또는 루스벨트의 관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대단히 솔직하고, 명민하며, 겸손한 인격을 갖춘 지도자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당연히 소련의 국익을 위해 노심초사한 지도자였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빌 클린턴이 푸틴을 처음 만난 뒤 대단히 스마트한 인물이라 평했던 어떤 미디어 매체의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스탈린에 대해 궁금했던 것은 푸틴이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의 연장선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산주의 사회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적이고 위협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 위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자유 민주주의적이었고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의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 부자들의 존재론적 위협도 사라지게 되었다. 거칠 것 없이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세계질서의 방침을 결단하고 실행하게 된다. 물론, 한때 소련이라 불리던 소비에트 제국 역시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는 슬픈 영광에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의 음악, 문학 등 문화에서 느껴지는 哀調(애조)는 그런 역사 때문인 것 같다. 그 슬픔이 빚어내는 찬연한 아름다움은 너무나 극적이고 유혹적이라 차마 떨쳐낼 수가 없다.
상실의 기록을 담은 책들은 아주 많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다르고 특별하다. 죽음과 이별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만 그 여로도 고인과의 관계도 다르니까. 어찌되건 절절한 책들은 반드시 한 두 군데는, 너무 똑같은 생각이라 전기같은 충격을 주는 구절들이 있다. 이 책도 그렇다. 그리고 그냥 내 짐작이지만, 치매와 조력자살이라는 특수한 부분이 있어도 사랑하는 이의 상실과 그에 대한 저자의 전혀 아름답지 못한 괴로움과 몸부림이 코로나 직후 울고 싶은 미국 독자들의 뺨을 때린 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는 남편과 가족들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천사도 아니고 신경질도 낸다. 정신적 버팀목이어야 할 내 남편이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내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며 챙겨야하는 존재가 되는 것도 모자라 조력자살을 알아보는 과정은 더 험난하다. 피로가 쌓인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게 되고, 노인들이 이런 류의 지저분함에 왜 익숙해지는지 깨닫는다. 간신히 남편을 보내고 난 뒤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와 메스꺼움도 느낀다. 이런 감정들은 사실 사람들한테 내보이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더군다나 세상은 깔끔하게 빨리 애도하고, 열심히 살라고 너무 쉽게 말하고, 주체 못 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싫어하니까. 하지만 나의 세계의 기둥이 하나 무너졌는데, 감정의 폭발이나 가끔은 부조리할 정도의 왜곡된 생각을 한 번도 안 할 수도 있을까? 그런 면에서 와닿는 것들이 있는 책이었다.
그냥 우연이지만, 마침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보는 중인데 작품에도 언급이 되어서 순간 더 복받치는 것도 있었다. (한 잔 술과 쉼보르스카면 정말 눈이 안 떠질 때까지 울 수도 있지 않을까)
애도는 사실상 끝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남편의 말대로 이 여정을 글로 썼고, 힘든 이야기를 세상과 공유했다. 에이미 블룸의 책을 처음 읽는 일개 독자인 나에게는, 이미 충분히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