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사업 탈락으로 기분도 울적한 참에 '그믐'으로 검색했다.
나 뭐하고 있지 싶을 땐 가끔 그믐에 대해 찾아본다.
그믐을 "나의 숨통"이라고 표현해 주신 분이 있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더 많은 산소를 만들자.
- 액체근대.. 어떻게, 어디로 흐를지도 모르는 시대로 이해함. 이에 교사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교육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자주 변화하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과연 맞을까? 교육환경 속에서 체감하는 교육과정의 변화는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아 찬성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이 교육과정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나조차도 급작스러운데 학생 및 학부모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울 듯 하다.
- 평생 잘 배우는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단순히 정보전달을 위한 학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을 배워야하는가. 그것을 아는 것 조차 어렵다. 나의 배움이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계기가 되라는 책의 말은 가끔 느끼긴 하지만 무언가 함께 배워나간다는 의미보다는 나의 부족을 발견하여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 자기 정체성을 재기획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듣고 배운것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이루기위해 성장하라는 말들이였는데,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맞춰 나의 정체성까지도 유기적으로 재기획해야 한다니... 다행인것은 재기획이지 완전히 맞추라는 의미는 아니라 어느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만 무거운 주제이며 방향을 잡지 못하겠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지만하고 느끼지못하는 시간을 보내옴.
지금의 내 상황과 현재를 느끼지 못하면
내 가슴을 뛰게하는 무엇가가 가다 왔을 때
나는 시간을 되돌아 아이의 감정 상태로 돌아가
고민하고 느껴야한다.
하지만... 그것도 좋을지도?
시드니 셀던표 똑똑하고 의지와 욕망이 끓어 넘치고 돈과 권력을 지닌 인물들이 우르르 나와 막장 드라마를 펼친다. 케이트 블랙웰의 아버지나 케이트 본인의 젊은 시절 이야기까지는 흥미진진한데 불쌍한 아들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 가능하고, 사이코패스 손녀는 현실감이 없다.
식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저자는 우연한 계기로 범죄 수사를 돕고, 법의생태학 분야를 개척했다. 25년 간 참여한 사건이 300여 건이라고. 어린 시절과 노년의 감식 작업 활동을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인데 CSI 같은 자극적인 내용은 없어도 무척 몰입해 읽었다. 저자의 곧은 마음이 느껴진다. 문장도 유려하다.
알라딘에서 ‘나를 살린, 책’이라는 주제로 여러 작가들에게 에세이를 청탁했고 저도 참여했습니다. 저는 존 메설리의 『인생의 모든 의미』를 꼽았어요. 원문 링크는 글 아래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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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들 중에 나를 두고 ‘쟤는 언젠가 자살할 것 같아’ 하고 여기는 사람이 몇 있었다.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그랬는데, 친한 사람일수록 나를 더 그렇게 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적이 있다. 딱히 내가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은 없다. 그냥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모양이다. 사람이 별로 씩씩해 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솔직히 자살보다는 영생을 훨씬 더 바란다. 안전하고 저렴한 불로장생약이 개발된다면 먹을 것 같다. 언제든 자살을 선택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그 약을 복용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끔 자살에 대해 생각하기는 하는데, 내가 얽히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상상은 아니다. 어떤 추상적인 개념, 철학적 문제로서 머리에 떠오른다. 카뮈도 그게 철학의 근본적 질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자주 생각한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대개 진지해지는데, 그래서 나는 제법 진지한 기분으로 살아간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자살하게 된다면, 그때 자살 사유는 ‘괴로워서 못 살겠어’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지녔던 한줌의 씩씩함마저 나이가 들어 사라지면서 그런 질문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주 유독한 시간은 아니지만, 점점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는 밀폐된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다시 말해 천천히 자살하는 기분이다. 한편 나는 제법 진지한 사람이기에, 그런 때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괜찮고 잘하고 있어’ 따위 조언은 답이 되지 못한다. 무성의한 농담처럼 들릴 뿐.
그래서 도서관에 가면 에세이가 아니라 철학 책들이 꽂힌 100번대 서가를 기웃거린다. 결국 답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그다지 씩씩하지는 못한 발걸음으로. 필로소픽 출판사의 ‘미닝 오브 라이프(Meaning of Life) 시리즈’를 그렇게 알게 됐다. 이 시리즈는 모두 19권이 나왔는데 책이 다 좋다. ‘나와 세계 그리고 삶의 의미’라는 출판사 모토도 좋다. 특히 14번째 책인 『인생의 모든 의미』를 좋아해서 되풀이해서 읽고 있다.
『인생의 모든 의미』는 철학자이자 컴퓨터과학자인 존 메설리가 쓴 교양철학서다. 100명이 넘는 사상가들의 주장을 짧게 요약한 책이긴 하지만 ‘금방 읽는 서양철학사’ 유의 구성은 아니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가 나오지 않는 대신 덜 알려진 현대 철학자, 소설가, 시인, 신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미래학자, 물리학자, 컴퓨터과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생각들은 탄생 순이 아니라 답변의 범주 순으로 소개된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답변들, 삶에 의미가 있다는 답변들, 삶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답변들이 각각 한데 묶인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답변들은 그래서 좋다는 답과 좋지 않다는 답으로 나뉜다. 삶에 의미가 있다는 답변들은 그 의미가 신을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의미를 발명하는 건지 발견하는 건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불가지론적 답변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 질문은 의미 있지만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인지로 갈린다. 메설리는 각각의 답변 범주에 대해 적극적인 논평을 하고, 뒷부분에서는 자신의 결론도 제시한다.
아내에게도 이 책을 적극 권했고, 아내도 결국 이 책을 사랑하게 됐다. 우리 집 거실 소파 옆에는 협탁이 있는데, 거기에 늘 이 책이 놓여 있다. 나는 가끔 이 책을 펼쳐 아무 페이지나 읽어보곤 한다. 어느 날은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합리적 결심만으로는 삶을 버틸 수 없고, 충분한 증거가 없어도 선의 궁극적 회복력을 믿어야 한다는 존 코팅엄의 주장을 마주친다. 어느 날은 대답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이며 따라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행위 역시 무의미하다는 폴 에드워즈의 견해를 맞닥뜨린다. 나는 코팅엄이나 에드워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쉽게 반박하지도 못하기에, 그 자리에 서서 오래 생각한다. 큰 질문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는 성서를 조금씩 읽으며 묵상하는 습관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종이책을 무척 깨끗하게 읽는 나와 달리 아내는 책에 포스트잇을 많이 붙이고, 밑줄도 치고, 메모도 한다. 덕분에 아내가 인상 깊게 읽은 문장들이 뭔지 알 수 있다. 금욕적인 전사 성향인 아내는 빅토르 프랑클, 마이클리스 마이클, 피터 콜드웰을 좋아한다. 도발적인 생각들에 끌리는 나는 결국 인생의 의미는 원하는 바를 얻어 만족하는 것―그게 ‘빠른 자동차와 멋진 여자’라 할지라도―이라는 레이먼드 마틴의 주장을 곰곰 들여다본다. 밑줄은 치지 않지만.
아내도 나도 좋아하는 대목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가 나오는 부분이다. 테니슨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를 떠나며 자신의 목적은 ‘죽을 때까지 항해하는 것’이라고 읊는다. 메설리는 ‘우리는 집을 발견할 희망 없이 싸우면서 우리 삶의 의미와 짜릿함을 발견한다. 율리시스에게 의미란 몸부림이다.’라고 썼다. 아내보다 좀 더 의심이 많은 나는 ‘정말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기는 한다. 그래도 멋진 항해까지는 아니더라도,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나무 등걸을 붙잡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기분이 든다. 천천히 자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이다.
https://tobe.aladin.co.kr/n/177662
아무리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합격 메일.
중요한 무언가를 내가 놓친 걸까?
자괴감이 드는 날.
작가의 표현대로 공장이나 마찬가지인 환경에서 자란 과일들이 소비되는 시대에, 과일의 역사를 논한다고 하면 그냥 농업 노동의 역사를 좀 낭만과 섞어서 - 대개는 낭만의 대가로 더 빡센 노동을 하며 - 풀어주는 책이려나 지레짐작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편견과 지식 부족을 반성하면서 즐겁게 잘 읽었다. 과일 길들이기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과일을 먹고 과수원을 발전시키려던 인간의 노력을 생각하면 과일의 인간 길들이기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무가 씨앗을 퍼트리려 단 맛의 과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주 언급되지만, 그걸 먹으려고 머리를 굴리면서 영장류의 지적 능력과 뇌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는 시작부터 놀랍다. 당분 들어간 식량을 먹겠다는 절박함이, 지금의 뇌와 더불어 식탐, 뱃살로 계승된 것일까...약간 낯선 야자나무 농업, 고대의 정원들(높은 수준만큼 정원사들 노동 강도도 빡셌던...), 아르간나무가 그냥 모로코 특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것, 루이 15세는 프랑스에서 키운 파인애플을 먹었다는 것 등등, 관련된 재미난 정보들이 빼곡하다. 그리고 과일에 대한 작가들의 글, 미술작품도 많이 실려서 시각적인 재미도 쏠쏠하다. 명말의 과일 목판화에 나온 불수귤의 모습을 믿을 수가 없어서 검색해보고 더 놀랐다. (그림이 좀 필터링이 되고 훨씬 운치가 있다) 그리고 참 슬픈 서바이버, 코르비니안 아이그너의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나는 이 책에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
먹거리, 문화적 자산, 자연과 함께 사는 미래에의 투자...저자가 말한 것들을 기억속에 얼마나 오래 간직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진열된 과일들을 볼 때마다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4. 4. 17. 작성 글.
#걸어가는늑대들
#자존감의기반 #자기효능감
걸어가던 늑대들은
우연히 오름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 오름은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날 마을로 찾아온 기계들이
너무 큰 편의를 제공했기에..
리모콘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이 결국 조금씩 몸집이
커지고 또 자꾸 커져서..
오름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는데요.
물론..
건강도 덩달아
나빠질 수 밖에 없었겠죠.
"밤이 되니 오름 하나가 없어졌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조금씩 병이 들어서 하나씩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를 비추고 있는 달빛이
왠지 차갑게 느껴진다."
늑대들은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하고..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리고 어렵사리 구한 꽃을
화분에 담아 선물합니다.
사람들은 그 꽃을
정성스레 키우며..
조금씩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늑대들이 안내한 다른 땅을
찾아가서 새로운 터를 잡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느낄 수 있는
보람이 이렇게 눈물 나는 건지를
왜 예전엔 알지 못했을까.."
물론 중간에..
기계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늑대들의 도움으로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
단순화 해서 설명했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 정도면 거의 다뤘다고 생각됩니다.
8살 이수 군이 만든
<꼬마악어 타코>처럼..
짧지만 울림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8살 이수 군이 환경을 생각하며
그린 책이 전작 이었다면..
9살의 이수 군은..
어떤 배경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저런
지혜로운 해결책까지 책에서
표현할 수 있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여러 자기계발서나
각종 강연의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내적 동기와
자기 효능감 입니다.
저는 자기 효능감의
기초가 튼튼해야만..
자존감이 비로소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효능감을 매우 단순화
해서 표현하자면 자기 스스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자기 효능감이 매우 높으면..
시도 할 수 있는 힘이 커지고,
자기 효능감이 매우 낮다면
그 어떤것도 시도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이 책에 나오는 오름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자기 효능감이 낮아진 상태의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겁니다.
자기 효능감이 낮다면
내적 동기 역시 낮을 수밖에 없겠죠.
내적 동기는..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 입니다.
능동적인 태도를 뜻하죠.
반대 개념은 외적 동기입니다.
시켜야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태도를 뜻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결국에..
이런 상태까지 되었죠.
"나는 숨 쉬기 조차 힘들어."
"리모콘 누르는 것조차 힘들어."
"눈 깜빡이는 것도 힘들어."
"말하는 것도 힘들다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늑대들은 꽃을
선물하고, 그 꽃을 가꾸며 생긴
자기 효능감으로 내적 동기가 커져..
사람들은 결국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른 땅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겁니다.
생각보다 우리를 더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커다란 시도가 아니라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였을 때'라는
것을 9살 이수 군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조금 더 지혜로운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요즘이라 더욱 더 울림이
크게 느껴졌던 책이었습니다.
...
덧.
어제 날짜 이수 군의
SNS 글을 봤습니다.
역시 그 아픔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신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실은 침몰하지 않을거라는..
기대를 품으며 이쯤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