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삼체 드디어 3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삼체 3부가 제일 재미있었다.
3부의 영어 제목이 Death's End인데 '사신의 영생'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왜 그런가 했는데
이 책 원본은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였지 ㅋㅋㅋ
중국어 원제가 死神永生.
(그런데 사신의 영생보다 죽음의 끝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
3부는 「시간 밖의 과거」라는 책의 발췌분으로 시작한다.
누가 쓴 책인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자연히 밝혀진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인류 최후의 1인 아니겠나.
3부에서는 아주 기나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기나긴'이 어느 정도냐 하면...
그냥 눈 감았다 뜨면 몇 백 년이 지나있고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면 1890만 년이 지나 있고.
어우~ 나는 가뜩이나 숫자에 약한데 큰 단위의 숫자가 나오는 데다가 그냥 몇 년 지났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위기의 세기, 위협의 세기, 전송의 세기, 벙커의 세기, 은하의 세기 등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바람에 이거 끼워 맞추느라 얼마나 머리를 쓰고 계산기를 두드렸는지. 보라, 그 힘겨운 고뇌의 흔적을.
그런데 리뷰를 쓰려고 다시 책을 보니,
시대가 서기 단위로 정리되어 있었다. ㅡㅡ;;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위기의 세기는 삼체의 지구 공격이 알려진 해,
위협의 세기는 뤄지의 암흑의 숲 이론으로 삼체와 협상에 성공한 해,
포스트위협의 세기는 청신이 검잡이가 되고 임무에 실패한 해(삼체는 그걸 예상하고 재침략 준비를 했음),
전송의 세기는 우주에 나가 있던 그래비티호가 우주에 삼체의 좌표를 뿌려 버린 해,
벙커의 세기는 인류가 우주 공격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목성 기지 건설 후 살기 시작한 해,
전송의 세기와 은하의 세기는 시작이 같은데 그건 같은 사건을 시작으로 전송의 세기는 지구 인류의 시간, 은하의 세기는 우주에 나가 있는 함대 사람들의 시간.
3부는 윈텐밍(드라마의 윌)과 청신(드라마의 진청)의 이야기가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1에 잠깐 나온 것처럼 청신을 좋아하는 윈텐밍은 친구에게 엄청난 돈을 받게 되어 청신에게 몰래 별을 사주고. 청신이 근무하는 우주전략정보국에서는 삼체의 정보를 캐기 위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윈텐밍의 뇌를 우주로 보내는데, 윈텐밍의 뇌를 실은 우주선이 경로 이탈하여 미션은 실패...로 끝나는 것 같았으나.
아무튼 청신은 미래에서도 우주전략정보국 프로젝트를 지속시키라는 의도로 동면에 들어가고 264년 후 깨어난다. 깨어나자마자 청신을 미래로 보냈던 직장상사 웨이드에게 총을 맞는다. 웨이드는 청신이 유력한 '검잡이' 후보임을 알고 경쟁자를 없애려고 한 것.
검잡이란, 지구와 삼체의 좌표를 한꺼번에 우주로 송출할 수 있는 중력파 발사 스위치를 가진 사람이다. 지금까지 검잡이는 뤄지였다!!!!
2부 포스팅에서 잠깐 말했지만, 정말 지구 인류는 뤄지에게 너무 가혹하다. ㅠㅜ 이제 뤄지가 나이가 들어 검잡이를 교체해야 할 때가 되어 웨이드는 검잡이가 되고 싶었던 것인데 여러 후보들 중에 사람들은 청신을 택한다.
그런데 청신은 검잡이가 된 지 15분 만에 임무 실패. 삼체는 뤄지가 검잡이에서 내려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청신이 검잡이가 되면 삼체는 물론 지구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그 스위치를 누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청신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청신은 그런 사람이다. 인류애가 있는 사람. 사랑을 가진 사람. 2부 끝에서 삼체 감청원이 사랑은 전체 문명의 생존에 불리하다고 했는데 3부에서 청신은 총 세 번의 선택을 하고 앞 두 번의 선택은 인류의 생존을 불리하게 만든다.
그녀는 결국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두 번 모두 그녀에게 신에 버금가는 권력이 쥐여졌지만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인류 세계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삼체 3부 705쪽
첫 번째 선택은 검잡이로서 삼체 공격의 순간 중력파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것.
두 번째 선택은 (첫 번째 선택 이후 약 70년 후) 몰래 광속우주선 개발을 하고 있었던 웨이드에게서 모든 권한을 되돌려 받은 것. (이 사이 이야기도 너무 길어 다 쓸 수 없으나 만약 이때 청신이 웨이드의 편을 들었다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선택은 대우주의 빅크런치를 위해 소우주의 질량을 반환하기로 한 것. (이건 더 어마어마하게 뒤의 이야기라 역시 다 쓸 수 없음. 이 책 꼭 읽으세요~~~ ㅠㅜ)
그럼 청신은 인류를 해한 사람인가?
<삼체>는 우주라는 암흑의 숲에서 살아남으려는 억겁의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작가가 담으려는 주제는 결국 '사랑'인 것 같다. '인류애'라는 거대한 사랑도 결국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작가는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그런 메시지가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다.
2부에서 뤄지 : ˝당신 같은 정치가들은 툭하면 인류 전체를 논하죠. 하지만 내게 인류전체는 보이지 않아요. 내 눈엔 그저 개개인이 보일 뿐이죠. 나도 한 사람이고 또 보통 사람이니까. 인류 전체를 구하는 책임은 감당할 수 없어요. 그저 각자의 생활을 바랄 뿐입니다.˝ (292쪽)
청신 : "인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인류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에서 시작돼요. 먼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다하세요. 주임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자책하지 마세요." (107쪽)
청신 : "난 수십억 명과 함께 있을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수십억 명에게 동시에 닥친 일이라면 두려워할 것도 없지." (513쪽)
(웨이드 "인간의 본성을 잃으면 많은 걸 잃지만, 짐승의 본성을 잃으면 모든 걸 읽게 돼")
청신 : "난 인간의 본성을 택하겠어요." (596쪽)
관이판 : "박사님이 검잡이였다는 걸 알아요. 박사님에겐 잘못이 없어요. 인류가 박사님을 선택한 건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대하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비록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박사님은 그 세계의 바람을 실현시키고, 그 시대의 가치관을 구현해주었어요. ...중략... 사랑은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도 한 세계를 멸망시킬 순 없어요. 이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건 살아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 모두가 함께 노력한 결과예요." (756쪽)
그리고 청신에 대한 윈텐밍의 사랑은 어떠한가! ㅠㅜ
윈텐밍이 청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류에게 해결의 열쇠를 주지 않았다.
비록 그걸 인류가 늦게 알았지만.
3세기 전 청신에게 별을 선물했던 그가
3세기가 지난 지금 전 인류에게 희망을 선물한 것이다.
삼체 3부 472쪽
윈텐밍의 이름에서 이미 작가는 윈텐밍의 역할을 심어 놓았다.
윈텐밍은 한자로 雲天明, 성인 雲(云)은 구름,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이름은 하늘과 밝다.
하늘에서 빛이 되어 말하는 사람.
소설에서는 대학 시절 몇 번 마주치고 이야기 나눠본 게 전부인 사이인데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냐는 의문도 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엔, 그것만이 윈텐밍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 같다. 인간은 한 명도 없는 삼체 함대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고 괴로웠겠나. 청신을 생각하지 않으면, 청신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았겠나. 그래서 청신을 살리기 위해 그 오랜 시간 삼체인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함의를 담은 동화를 만들었겠지. 결과적으로 청신을 살리는 방법은 인류를 구하는 방법이니 '인류에 대한 사랑 =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와 맞는다.
(그나저나 청신 기억력 무엇? 그 긴 동화를 어떻게 한 번 듣고 다 외우남? ㅋ)
위의 문단에서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평소에도 인간이 가진 사명감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해왔다.
그 사명감이라는 게 본인의 안녕과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있는데 사명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삶이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에서도 그렇다.
비록 청신의 선택으로 처형되는 결과를 맞이했지만 웨이드의 사명감은 어떠한가? 그와 같이 포스트 위협의 시대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삼체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의 사명감은 어떠한가?
박사님을 위한 것도, 웨이드 선생님을 위한 것도, 이 도시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중략)
그들이 우리와 우리 후손을
반지름 50천문단위의 태양계라는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울 겁니다!
우주의 자유인이 되기 위해 싸울 겁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운 고대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끝까지 싸울 겁니다!
삼체 3부 595쪽
UN사무총장 세이의 사명감은 어떠한가. 인류가 멸망해도 인류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우주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류문명박물관을 만든다.
(그런데 그 박물관의 관장이 또 뤄지!!!! 너무한 거 아님? ㅠㅜ 200살까지 공적인 임무를 맡기는 냉정한 인간들...ㅠㅜ)
아니 다 죽어가는 마당에 그걸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으면서도
또 그 '사명감'이 '사랑'과 함께 우리가 가져야 할 인간의 기본이라는 것이 작가님의 의도 같았다.
그 사명감 때문에 청신도 살아 남았으니.
청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AA가 지구 문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이 될 것이다. 그녀가 죽는다는 건 지구 인류의 절반을 죽이는 것과 같았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이었다.
삼체 3부 706쪽
청신의 두 번의 선택은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세 번째 선택의 결과는 어떠할까.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상상은 독자의 몫.
정말 할 말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은 소설이다.
이런 얘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대체...
작가님 정말 천재!
+
뤄지가 관리하던 지구문명박물관.
데이터를 우주적 단위의 긴 시간으로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돌에 새기는 것'이었다.
과학 기술이 초고도로 발전한 시대에도 결국 가장 튼튼하고 안전한 것은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책의 주제는 다시 사랑으로 돌아간다. 그 어떤 시대가 와도 인간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은 사랑이라는.
더구나 굳이 이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는 건 또 뒤의 사건을 위한 빌드업.
작가님 진짜 美쳤....
+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위대함이 새로 보인다!
그 이유는???? 책을 읽어보시면 알 것.
아우 그냥 말하고 싶어서 입이 (손이) 근질근질하네.
+
이 책에는 한반도인이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우주 함대 블루스페이스호의 박의군 소령. 북한 출신
또 한 명은 검잡이 후보 중 한 명. 한국 외교부 차관 출신에 68세라고만 나오고 이름도 안 나온다. 왠지 아쉽.ㅋ
▶생존을 가로막는 건 무능과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삼체 3부 646p.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
삼체 3부 791p.
삼체 1~3부 전체 리뷰 https://blog.naver.com/wingssprout/223427465226
삼체 1부 리뷰 https://blog.naver.com/wingssprout/223436435470
삼체 2부 암흑의 숲에서는 삼체의 공격에 대비하려는 인류의 고군분투가 그려진다.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조금 나온 면벽자가 본격 등장.
뤄지(드라마의 사울)에게 만남을 청한 예원제. 뤄지는 예원제의 딸 양둥(드라마의 베라)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예원제는 뤄지에게 우주사회학을 연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한다. 전혀 없던 새로운 학문을 제창하고 연구하라는 말을 그냥 스쳐들었던 뤄지는 이 때문에 인류의 존멸을 짊어지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게 바로 '면벽자'
면벽자는 삼체인의 약점을 공략한 대응 방법으로 구안된 것이다.
지구를 차지하러 오고 있는 삼체인은 양성자에 새긴 컴퓨터(?)인 지자를 보내 지구인을 감시하고 있어서 지구인들이 무엇을 하든 전부 보고 들을 수 있다. 지구인이 삼체 침략에 맞서 어떤 대책을 세우는지 전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삼체인의 약점은 거짓말을 이해할 수 없고 머릿속 생각은 알 수 없다는 것.
에번스: ˝인류의 문서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떤 동의어 때문입니까?˝
자막: ‘생각하다[想]‘와 ‘말하다[說]이다. 우리는 방금 전 이 두 가지 단어가 동의어가 아님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에번스: ˝그 말들은 원래 동의어가 아닙니다.˝
자막: 우리에게 그 두 가지는 동일하다.
.
.
에번스: "당신들의 사고는 외부에 낱낱이 공개되어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막: 사고를 어떻게 숨길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를 납득할 수 없다
삼체 2부 21&24쪽
인류를 멸망을 막아줄 수도 있는 열쇠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류만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 좋게 바꿔 말해 창의력과 상상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이 2부의 면벽자를 탄생시킨 개념이기도 하면서 3부에서는 윈텐밍의 '동화'로 다시 연결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창의력이고 그 안에 또 다른 뜻을 담아놓는 것이 거짓말 아닌가. 그러니까 거짓말은 2부에서도 3부에서도 인류 구원의 핵심이었다.
UN은 그 점을 알게 되어 지자에 들키지 않고 대응 방법을 생각해낼 면벽자를 뽑는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면벽자 발표 자리에 끌려온 뤄지도 면벽자 중 한 명.
다른 면벽자는 전 미국 국방부 장관, 현 베네수엘라 대통령, 전 과학자이자 EU 집행위원장 등 경력이 어마어마한데 그저 평범한(?) 뤄지가 왜 면벽자로 뽑혔는지 모두가 심지어 본인도 의아해한다. 그것은 삼체가 유일하게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 뤄지였기 때문.
˝뤄지의 파벽자는 바로 그 자신이다.
그는 자신이 주에게 어떤 위협을 미치는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든 면벽자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자가 뤄지입니까?˝
진시황이 고개를 들어 검푸르게 변해가는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우리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면벽자 네 명 중
오직 그만이 주와 직접 대결할 거란 사실이다.˝
삼체 2부 170쪽
삼체인이 뤄지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예원제가 뤄지에게 했던 조언에 삼체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힌트가 있었기 때문.
"정말... 흥미롭군요. 우주사회학의 공리란 뭔가요?"
"첫째,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면하다."
삼체 2부 17쪽
예원제의 말에서 뤄지는 암흑의 숲, 의심의 사슬 이론을 생각해내고 멀리 떨어진 행성의 위치를 노출시켜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실험한다. 그 실험 결과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무기로 삼체와 협상 성공.
삼체가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200년도 지난 후의 일이다.ㅋ
이 책에서는 시간이 말도 안 되는 단위로 팍팍 흐른다. 뤄지도 삼체의 바이러스 공격으로 병에 걸린 채 냉동 상태에 들어갔고 200여 년 후에 깨어난 것.
몇 백 년의 시간을 버티며 뤄지는 삼체의 공격 위험에서 지구를 지켰는데.
지구 인류는 뤄지에게 참 가혹했다.
맘대로 면벽자로 뽑아 놓고.
제대로 안 한다고 아내과 아이를 데려가고.
심지어 그 아내도 뤄지의 임무를 위해 준비한 거고.
언제는 그를 구원자라고 찬양하고
또 문명의 파괴자라고 비난하고
숱하게 생명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더더더 놀랍게도 뤄지는 3부에도 등장한다.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인류는 그를 부려먹는다.
이 포스팅에서는 뤄지 얘기만 했지만 2부에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무지무지 많다.
그 인물들은 3부에도 이어서 등장하고 지구 세계 말고 우주 세계에서 또 다른 서사를 펼치게 되므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2부의 마지막에는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1부에서 예원제에게 답신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 삼체 감청원!
그는 뤄지에게 말한다(문자로 보여준다).
어젯밤 강연에서 당신이 말했다. 우주가 암흑의 숲이라는 사실을 인류가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문명이 성숙하지 못해 우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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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단어가 과학적으로는 불명확한 개념이지만 당신이 그 뒤에 한 말은 틀렸다.
당신은 말했다. 인류가 우주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아는 종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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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세계에도 사랑이 있다.
그것이 전체 문명의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에 싹이 트자마자 억눌러버리는 것뿐이다.
삼체 2부 711~712쪽
그 감청원은 사랑이 남아 있는 삼체인이었다.
2부도 1부처럼 매우 희망적으로 끝나지만,
역시 3부까지 다 읽은 다음에는 다르게 해석이 됐다.
삼체 감청원이 말한 것처럼 사랑은 전체 문명의 생존에 불리했다.
사랑이 많은 청신이 어떻게 인류를 멸망케 하는지.....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 제일 뿌듯한 삼체
책이 두꺼워서 진입장벽이 높긴 하지만 읽고 나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선택!
이 두꺼운 책을 읽어낸 자신이 대견하고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된 기쁨이 클 거다.
넷플릭스 삼체원작 SF소설 삼체는 총 세 권.
1부 삼체 문제, 2부 암흑의 숲, 3부 사신의 영생이다.
1부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을 짧게 정리
소설 삼체 1부는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1에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 1은 소설 삼체 1부의 내용에 2부, 3부의 내용 약간)
삼체는 정말 어마어마한 시간과 엄청난 사건을 다루는 소설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의 절멸을 가져온 대사건의 시초는 예원제.
예원제는 문화혁명으로 아버지를 잃고 노동교화 현장으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하다가,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덕분에 외계 문명을 찾는 비밀기지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외계 문명 삼체 세계 감청원의 교신을 받는다. 지구에 교신을 보낸 삼체 통신원은 '대답하는 순간 그곳의 위치가 파악되어 점령당할 테니 대답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지만, 예원제는 인류는 스스로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도울 테니 지구로 와서 이곳을 점령하라는 답신을 보낸다.
이 부분에서 나는 예원제가 문화대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피해자인 걸 알겠지만, 왜 중국의 문제를 인류의 문제로 확대하는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의 오만함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그리고 책에서 떨어져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정말 인류가 자정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種)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은 것이 지구 삼체 운동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삼체 1부 357p.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 예원제는 오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니가 뭔데?? 니가 왜???
예원제로 인해 삼체인들은 지구를 향해 우주 항해를 시작.
예원제를 통해 미리 삼체인의 지구 침략을 알고 있던 에번스는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을 만든다(예원제가 총사령관). 그런데 예원제처럼 오만한 사람이 예원제 하나만은 아닌지 삼체 추종 집단에는 사회 유명 인사나 각 분야의 엘리트 들이 속해 있다. 이 집단은 지구 사회에서 은밀히 사회를 와해하고 과학 기술의 발달을 저지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 중에 '환경 분파'가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환경 분파의 임무는 '환경 문제를 이용하거나 날조해서 사람들이 과학과 현대 공업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282쪽)'. 환경 운동가들의 진정성이 많이 의심되는 요즘인데, 작가가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환경운동가들을 한방 먹인 거 같다.ㅋ
삼체 소설 1부의 마지막 장면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1의 마지막 장면과 같다.
삼체인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지구에 알리며 '너희는 벌레다!'라는 문구를 띄워 경고를 보내자 지구인들은 절망에 빠진다.
좌절한 왕먀오(드라마의 오기)와 딩이(드라마의 베라 캐릭터에 해당하는 양둥의 남자친구)에게 경찰 스창은 메뚜기 떼를 보여주며 "지구인과 삼체인의 기술 수준 차이가 클까, 아니면 메뚜기와 우리의 기술 차이가 클까?" 묻는다. 우리와 삼체 문명의 기술 차이보다 벌레와 인간의 기술 차이가 훨씬 크지만 인간은 결코 벌레를 박멸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일깨우려는 질문.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삼체 1부 440p.
1부까지 읽었을 땐 나 역시도 이것이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로 보였다. 삼체인들이 아무리 지구 인류를 무시해도 인류는 끝내 살아남을 것이라는.
그런데 3부까지 다 읽고나서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벌레가 인간에 의해 박멸되지 않은 것은 (벌레도 사고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지만) 벌레는 분열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삼체 추종 집단 안에서도 파가 갈리듯이 인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닥친 거대한 문제 앞에서도 단결되지 않았다. 벌레가 의지를 가지고 서로 단결한 것은 아니라도 벌레가 살아남은 건 벌레의 목표가 오직 '생존'뿐이었기 때문인데 인간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결국 죽게 되는 것 같다.
+
대체 이걸 중국어로 어떻게 썼는지 신기
켄 리우가 번역했다고 하던데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켄 리우가 이런 내용을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어를 잊지 않았나 신기
영문학과 사랑에 빠진 스토너의 삶.
스토너는 시를 아끼는 마음을 알고, 책 속 죽은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고독의 시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순수함을 위해 살아가는 그의 삶을 사랑했다. 요즘 우리 세대의 경우 국문학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취급받고 혹여 사랑에 빠진다면 굶어죽을 거지만,,, ;// 암튼 그는 그가 쓴 하나의 책으로 남았다. 그 속에 영원히 갇혀서 죽었다.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2022년 12월 웅진지식하우스의 '빅히스토리'를 1기로 시작된 그믐북클럽은 최근 14기까지 진행이 되었다.
당시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을 과연 누가 함께 읽을까 싶었는데 무려 129명이 신청을 해서 깜짝 놀랐다. 그믐북클럽은 회를 거듭할수록 계속해서 꾸준히 참여하는 멤버들이 많아졌다. 익숙한 닉네임을 자주 만나니 반갑다. 첫 번째로 책을 통해 배우고 두 번째로는 같은 책을 읽는 멤버들을 통해 배운다.
한편 그믐북클럽이 계속되면서 현재 아쉬운 점 몇 가지를 보완하고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도 커졌다. 고민 끝에 15기부터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을 중점으로 방향성을 조금 변경했다.
1.책 증정 인원을 기존 20인에서 30인으로 늘렸다.
원래 그믐 북클럽은 출판사에서 종이책을 협찬해 주는 방식이었는데 아무래도 배송까지 담당해 주시다 보니 20권보다 더 많은 권수를 협찬하기에 출판사에서도 다소 비용적 부담이 있으셨다. 신청자는 많은데 그중 20명을 뽑기가 매번 너무 어려웠다. 안타깝게 합류하지 못한 분들에게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고. 더욱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던 차, 교보문고 sam 측에서 연락을 주셨다.
15기부터는 교보 sam 구독서비스를 통해 더 많은 참여자들에게 무료 책을 읽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기의 멤버수를 20명에서 30명으로 늘리고 또 동시에 2기 (혹은 그 이상)를 운영함으로 실질적으로 기존보다 훨씬 많은 참여자가 함께할 수 있다.
2. 그믐북클럽 도서 선정 기준을 강화했다. 그믐북클럽이 고른 책은 무조건 읽는다는 분들이 많았다. 북클럽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 여러 번 깊이 고민했고 답은 역시 '좋은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양서가 좋은 질문을 만든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좋은 책을 읽는 북클럽에서는 건강하고 깊이 있는 생각들이 쏟아진다. 그전에는 책을 신중하게 골라도 출판사에서의 협찬 여부가 확실치 않아 과감한 진행이 어려웠는데 이 문제 역시 교보문고sam과의 협업으로 많이 해결될 것 같다. sam 에 있는 책이 20만권이 넘는다.
이제 당첨자 뽑는 시간을 좀 더 좋은 책을 고르는 시간으로 쓰려 한다. 시간의 검증을 이겨낸 책들로만 진행할 예정이라 아무래도 구간 위주의 구성이 될 것 같다. 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궁금한 알쏭달쏭 신간을 파헤치는 역할은 비욘드 북클럽으로 넘겼다.
3. 모집 기간을 기존보다 길게 가져가기로 했다. (최대 29일간 멤버를 모집할 예정) 15기부터 그믐북클럽은 전자책을 제공하는데 전자책 말고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종이책 애호가들은 이 기간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거나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북클럽 시작 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었다. 또한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병렬 독서하는 그믐 회원들이 많은데 모집 기간이 넉넉하니 그 사이 그믐북클럽 도서를 미리 읽어두어도 좋겠다. 북클럽이 시작되면 그 때 책을 읽어도 되지만 여유가 있다면 책은 미리 읽고 북클럽 기간에는 다른 멤버들이 남기는 감상이나 생각을 꼼꼼히 읽고 충분히 성찰하며 함께 교류하는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4. 모집 기간도 북클럽 활동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한다. 책을 읽겠다는 마음부터가 독서의 시작이다. 책에 대한 초기의 관심과 궁금증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깝다. 관련된 주제로 워밍업 삼아 이야기하며 책의 내용을 예측하고 북클럽에 대한 기대를 서로 나눌 수 있다. 본격적인 북클럽 시작 전에 간단히 글을 쓰는 연습이 될 수도 있고 그믐이 처음인 이들은 어색함을 덜고 그믐 글쓰기 창에 익숙해지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 전 몸풀기가 필요한 것처럼 북클럽 스트레칭이라 생각해도 좋다.
5. 사전에 독서 가이드를 제공한다. 책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 책의 난이도, 유의사항을 안내한다. 이를 통해 북클럽 참가 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북클럽 책이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다. 막무가내로 도전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어려워도 어렵다는 것을 미리 알면 참여자들은 마음의 각오를 다질 수 있다. 또한 세간의 오해와 달리 유명한 책중에 생각보다 분량이 적고 쉬운 책도 많은데 이런 책들 역시 독서 가이드에서 상세히 정보를 제공할 터이니 지레 겁먹지 말고 용감하게 도전하기를 권한다.
프루스트가 왜 그토록 길고 길고 또 길게 문장을 이어나가면서 잃어버린 시간으 찾아나섰는지 그가 쓴 문장의 단어 하나만큼, 아니 한 글자만큼, 아니 한 획만큼 이해하기 시작했다. 스완이라는 인물과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스완이, 오데트가, 베르뒤랭 부인이 나인 것처럼 얼굴이 환해지고 어두워지다 그만 붉어졌다.
이카리 신지가 2000년대 초 출생이니 살아있다면 지금쯤 한국에서 군대에 갈 나이다. 사람은 자기 철학이 있어야하는데 그렇다고 자기 철학이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고 자아를 규정하는 외피나 프레임 같은 거.
이카리 신지의 경우는 이 자기 철학의 외피 껍데기가 물렁하고 희미해서 피곤하게 살았던 경우이고 아야나미 레이는 껍데기 안쪽 내부가 텅 비어있어서 곤란했던 경우. 그리고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자기 철학의 프레임이 너무 단단하게 자리잡혀있어서 난감했던 케이스였다.
그럼에도 이들 가운데 하나의 삶을 롤모델로 삼으라면 아스카를 꼽아야 한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타주의적인 관점에서 아스카의 태도가 필요한 건 아니고 사람들 안에 섞여 살아가야할 때 그래야 덜 다치고 멀쩡한 정신으로 집까지 귀가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ㅣ 서울대 김승섭 교수 특별강연 (youtube.com)
실패 속에서도 삶을 지탱해 준 가치 ㅣ 김승섭 교수 x 장일호 기자 북토크 풀영상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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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장님 따님 결혼식도 패스하고 갔던 북토크.
청첩장을 내가 만들었는데 일정이 겹쳐서 고민하다가 북토크를 선택했다.
대체로 이런 행사는 혼자 다닌다. 함께 가려는 사람도 없고 피곤하게 누군가를 설득해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괴물>을 보고 난 후, 은유 작가님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으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고민해 봐서 그럴까.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함께여야 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고민하고 기회를 봤으나 끝내 일행을 구하지 못했다.
독서 모임 친구 치킨님께 용기 내서 물어봤다.
무거운 내용에 대한 부담감에 거절하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꽤나 속상했다.
나와 함께 슬퍼해 줄 사람은 없구나.
북토크 당시에는 김승섭님의 책은 읽어보지 못하고 장일호 기자님의 팬이라 신청하게 됐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김승섭님의 번역하신 <장애의 역사>라는 책의 존재만 알고 도서관에서 빌리긴 했으나 읽지는 못했다. 장일호 기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냅다 신청했었지...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김승섭 교수님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듣고 고민하다가 두서없는 질문도 했다.
청중의 얼굴을 꼼꼼히 보려고 애쓰며 질문을 경청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내 말에 이렇게 집중해 주던 남성 어른(+지식인)을 본 적이 있었나?
그 집중은 따뜻했고 그 시선 속에선 내가 모자랄까 봐, 부족할까 봐 두렵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북토크라는 걸 막 쫓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울진에서 대구까지 버스로 3시간
대구에서 광주까지 버스로 3시간
중간중간 뜨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더 길겠지.
울진에서 광주까지 버스를 타고 쫓아갔다. 양다솔 작가님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북토크를 들으러 러브앤프리 서점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때의 북토크 후에 사인회 때 앞선 누군가가 작가님께 안아봐도 돼요? 라고 하고 포옹했다. 그걸 보고 나도 여쭤본 뒤 어색하지만 재밌게 작가님과 포옹했다. 그 경험은 낯설고 소중했다.
이후에 다른 여러 북토크를 갈 때도 상황을 보며 여성 작가님께 포옹을 부탁드렸다. 다행히 다들 흔쾌히 좋다고 해주셨고, 서로를 얼싸안고 마무리하며 기억에 온기도 남겼다.
남성 어른 강연을 들을 때는 고민해 봤으나 절대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하고 매번 말았는데. 이번 북토크 후에 김승섭 교수님 사인회 때는 가능할 것 같았다.
번호가 밀려서 끝 순서로 밀려났지만, 오히려 좋았다.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말할지 계속 고민하고 속으로 말을 굴렸다.
안아드려도 될까요.
제가 안아드려 봐도 될까요.
안아드려도 괜찮을까요.
막상 내 차례에 왔을 때 세 따님이 있다는 작가님의 일화에 다른 대화로 빠졌다. 기획되지 않은 이야기에 당황한 나는 엉망진창으로 대화를 이었고 내 책에 사인이 마무리될 즈음.
작가님을 쳐다보며 조금은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
작가님은 그럼요~하고 훌쩍 일어나셨다. 작가님의 큰 키와 대비되는 나의 작은 키에 당황하며 앗 제가 안아 '드려'야 하는데! 라고 말했다. 팔의 위치를 가늠하다가 살포시 포옹하고 작가님을 도닥였다.
"애쓰셨습니다. 건강하세요."
포옹 후에 이 말을 전하고 자리를 떴다.
사실 이 말을 더 고민했다. 이번 책이 작가님의 마지막 대중서라고 하셨다. 이 고마움과 아쉬움을, 이 소중함을 어떻게 부담 주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내 감사함이 작가님께 버겁지 않기를 바랐다. 작가님의 행적이 무척이나 대단하고 멋졌지만, 작가님을 추켜세우고 그 자리를 떠나는 걸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마음을 '잘'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지?
나름 머리를 굴리다가 강연 중 애썼다는 말이면 된다고 하셨던 말이 스치듯 떠올랐다. 감히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마음을 꾹꾹 담아서 힘줘서 이야기하되, 가볍게 전달하고 싶었다.
전해야 할 말을 전했고 어색한 포옹도 했다. 그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 뒤늦게 책을 읽으며 그때를 자주 떠올렸다. 내가 했던 말. 거부되지 않은 포옹. 안전하다는 감각.
응답받고 싶은 마음으로 쫓아갔지만 나도 응답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애썼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뻤다. 그 말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노컷뉴스에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월급사실주의 2024』가 소개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급사실주의는 우리 시대의 노동 현장을 담은 소설이 더 많이 발표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한국소설의 새로운 흐름이다. 올해 새롭게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새롭게 합류한 작가는 남궁인 손원평 이정연 임현석 정아은 천현우 최유안 한은형이다. 사회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감지해온 작가들이 작심하고 직장을 무대로 써낸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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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79/0003892796?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