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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화 장편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한겨레출판)

티를 내지는 않아도 기자들은 서로를 매우 궁금하게 여긴다.

기자가 현장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타사 기자다.

타사 기자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논조가 다른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서로 반목할 것 같지만, 사실 논조는 기자들의 친소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사 소속 기자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이 고생하는데 동료 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직 기자가 썼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다는 소설.

취재 현장을 떠났지만, 매우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설이었다.

공교롭게도 내 지난 행보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소설이 더 궁금했다.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접한 한국 기자를 다룬 작품 중에서 가장 현실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에피소드에 담긴 취재 현장과 과정을 따라 읽으며 마치 다시 현장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에피소드 대부분이 실제 기사화 된 사건을 바탕에 두고 있어서 생생함을 더했다.

기대했던 대로 가독성도 매우 훌륭했다.

담백한 문장과 절묘하게 맞물린 팩트의 힘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더한다.


작품 곳곳에서 느껴지는 온기 때문에 읽으면서 자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온기 속에서 사람과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선이 엿보인다.

그 때문에 에피소드마다 여운이 짙었다.

특히 여운이 깊었던 건 북한 여공을 다룬 에피소드였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스포일러는 안 하겠다.

편견과 오해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궁금하면 책을 사서 읽어보자.


작가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한겨레의 조직 문화를 간접적으로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니며 지역지, 경제지, 종합지를 모두 경험했다.

조간에서도 일했고, 석간에서도 일했으며, 편집에서도 일했고, 취재에서도 일했다.

이는 딱히 전문성을 쌓지는 못했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것저것 다 살짝 맛만 본 터라 썰을 푸는 능력만 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직 문화가 서로 크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어느 조직이든 돌아가는 꼴은 서로 비슷했다.

소설은 조금 정제된 이야기를 담고 있겠지만, 한겨레는 꽤 괜찮은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은 어떤 식으로든 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직접 만난 일은 없지만, 글을 통해 만난 작가는 기자로서도 자연인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끊임없이 자기 일의 옳고 그름을 고민하고, 사람에 실망하면서도 사람을 향한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아니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은 시간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마스타니 후미오 『아함경』(현암사)

오랜만에 이 책을 꺼내 다시 페이지를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데 이어, 오랜 첫사랑마저 내 곁을 떠나고, 아무것도 이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20대 말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당시 나는 왜 내게 견디기 힘든 시련이 연이어 찾아오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싶었다.


휴학을 밥 먹듯이 해 나이 서른을 앞두고도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던 나는 졸업 학기 수업을 대부분 인문대에서 수강했다.

그때 수강한 과목 중 하나가 불교와 관련 교양 수업이었고, 이 책은 그때 만난 책이다.


<아함경>은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저자는 동명의 불교 경전의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해 독자의 이해를 보탠다.

이 책에 등장하는 붓다는 대단히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한 인물이다.

초기 불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 책 안의 붓다는 극락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내세를 확신하지도 않는다.

그저 현실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논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 책의 핵심은 연기론에 관한 설명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하므로 일체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을 향한 집착이 분노와 무지, 어리석음을 불러오고 삶에 고통을 준다.

그렇다고 붓다의 가르침을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므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로 오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채찍질에 가까운 가르침이다.


연기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저 홀로 독립한 존재란 없다.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다스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인과의 법칙을 다루는 연기론의 가르침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말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들린다.

그 당연한 가르침이 그때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지난 일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일단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게 했고,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때 쓴 소설이 '아함경'을 내가 소화한 대로 풀어낸 『도화촌기행』이다.

이 소설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받으며 내 데뷔작이 됐다.


몇 년 전 출간한 새 장편소설 『젠가』의 반응이 내 기대보다 많이 미지근해 의기소침했다.

나는 『젠가』가 어떤 독자가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라고 자신했었다.

쑥스럽지만 내가 읽어도 재미있는 내 소설은 『젠가』가 처음이었다.

독자 리뷰를 살펴봐도 대부분 호불호가 없는 호평인데, 판매 속도는 그에 미치지 못해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펼치니 심란한 마음이 조금 풀렸고, 다음 작품 집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혹시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미래에 고민이 많다면 『아함경』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아함경
아함경
생텍쥐페리 지음, 최현애 옮김 『애린 왕자』(이팝)

애린 왕자가 이바구해따. "내』 친구들을 찾는다카이. '질들인다' 카는 기 먼 뜻이냐꼬?"


"그기는 마카다 까묵고 있는 긴데." 미구가 이바구해따. "그긴 '관계를 맺는다' 카는 뜻인데." "관계를 맺는다꼬?"


"하모." 미구가 이바구했다. "니는 여즉 내한테는 흔한 여러 얼라들하고 다를 기 없는 한 얼라일 뿌인기라. 그래가 나는 니가 필요없데이. 니도 역시 내가 필요없제. 나도 마 시상에 흔해빠진 다른 미구하고 다를끼 하나도 없능기라. 군데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서로 필요하게 안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



이 책의 일부분을 발췌했다.

읽으면 머릿속에 생생하게 경상도 사투리가 재생된다.

오랜만에 눈이 아닌 입으로 읽으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설일 테니 내용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다 아는 소설이라고 해서 읽는 즐거움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경상도 사투리를 타지역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중에 잘 알려진 소설이기 때문에 사투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작품을 사투리로 번역한 건 매우 훌륭한 전략이라고 본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포항 지역 출판사다.

지역 출판사가 출간한 책 중에서 최근에 이렇게 화제에 오른 책이 있었던가.

이 책은 소규모 지역 출판사의 색깔 있는 생존 전략을 아주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애린 왕자 - 갱상도 (Gyeongsang-do Dialect)
애린 왕자 - 갱상도 (Gyeongsang-do Dialect)
이소영 『식물의 책』(책읽는수요일)

내가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따로 찾아 읽었던 유일한 칼럼은 서울신문에 연재된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이다.

나도 몇 년 전 신문 지면에 2년간 매주 '식물왕'이란 타이틀로 꽃을 주제로 다룬 칼럼을 연재했던 터라 이 칼럼을 관심 있게 읽었었다.

책이 출간된 지 1년이 넘었는데, 게으르게도 이제야 펼쳤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보여 잘 안다고 여겨왔지만, 실은 잘 알지는 못하는 식물을 다룬다.

이 책의 매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페이지 곳곳에 실린 다양한 식물세밀화다.

처음에 나는 굳이 식물을 세밀화로 그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었다.

나는 오랫동안 들꽃 사진을 찍어왔다.

그림보다 사진이 더 생생하게 식물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일례로 이 책은 향나무 여러 종을 세밀화로 하나하나 구별해 보여주는데, 만약 사진으로 이 나무들을 봤다면 다른 점을 구별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테다.


야생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 많다.

씀바귀와 고들빼기 꽃 사진을 동시에 봐도 이를 구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난이도를 좀 올려서 양지꽃과 뱀딸기꽃을 직접 눈앞에서 봐도 구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세밀화는 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진보다 훨씬 생생하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됐다.

도시의 개나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상수리나무의 유래, 주목이 암꽃과 수꽃을 따로 피운다는 사실, 동백꽃 수분을 곤충이 아닌 동박새가 한다는 사실 등은 이 책을 통해 내가 새로 얻은 지식이다.

봄이면 지천에 널리 솟아나는 쑥도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책에 실린 세밀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부끄럽게도 포도꽃은 이번에 세밀화를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언젠가 내가 꼭 쓰고 싶은 책이 들꽃에 관한 책인데, 이 책은 내가 '식물왕'이라고 뻐기려면 아직 갈 길이 멀음을 일깨워줬다.


이 책에도 언급돼 있듯이, 열강들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식물을 세밀화로 기록해왔다.

자국에서 자라는 식물이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지 일찍 깨달았기 때문이다.

봄이면 거리를 향으로 채우는 미스킴라일락, 전 세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악한 구상나무 등 우리 땅이 원산지인데도 우리 것이라고 큰소리치지 못하는 식물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페이지 곳곳에서 느껴진다.

작가의 사려 깊은 따뜻한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식물의 책 -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도시식물 이야기
식물의 책 -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도시식물 이야기
파올로 조르다노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은행나무)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10만 명이 되지 않았던 시절에 쓰였지만, 지금도 곱씹어 읽어야 할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어려운 비유 없이 심각한 사안을 설명해주고, 이와 동시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일례로 저자는 75억 인류를 구슬에 빗대 확진자가 어느 순간 급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구슬 하나가 안정적으로 모여 있는 75억 개 구슬 중 하나와 전속력으로 부딪힌다.

부딪힌 구슬이 다른 두 구슬에 부딪히면, 두 구슬은 튕겨 나가 각각 다른 두 구슬과 거듭 부딪힌다.

이 같은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되면서 75억 개 구슬 전체가 흔들리는 건 금방이다.

이미 다양한 뉴스를 접해 아는 내용인데도 사태의 심각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문득 숫자 2가 몇 번 거듭제곱해야 인류의 숫자를 넘기는지 궁금해졌다.

2가 33번 거듭제곱하자(85억8993만4592) 인류의 숫자를 넘겼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1명의 감염자가 전 세계 인류를 감염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달여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는 코로나19 감염자가 평균 2.5명의 추가 감염자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왜 이동을 최소화해야 하는지 마음에 확 와닿았다.


저자는 펜데믹 시대에 연대감 부재는 상상력의 결여에서 온다고 지적한다.

75억 인류 각자의 행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체 결과로 이어지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이 책은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책이다.

분량이 작아 가벼워 보이지만, 개인적인 선택을 할 때도 타인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내용까지 가벼운 책은 아니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손병현 장편소설 『동문다리 브라더스』(문학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조금 색다른 시선으로 다루는 소설이다.

내가 그동안 접한 5.18을 다룬 작품은 영화 <화려한 휴가> <26년>, 드라마 <제5공화국>처럼 당시에 벌어진 상황을 적나라하게 다룬 게 대부분이었다.

이 소설은 5.18의 격랑에 휩쓸렸던 평범한 광주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5.18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지만 주체는 아니었던 사람들.

소설은 역사가 남긴 상처 주변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겨우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서글픈 군상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아울러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호남 방언이 소설에 생생함을 더한다.

역사의 큰 물줄기와 합류하는 지류에 주목한 점도 좋았지만, 그 지류가 결코 가벼운 흐름이 아니었음을 조명하는 시선이 더 좋았던 작품이다.

동문다리 브라더스
동문다리 브라더스
밥 버먼 『거의 모든 것의 종말』(예문아카이브)

내게 1992년은 휴거로 기억되는 해다.

당시 다미선교회라는 종교단체가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도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꽤 시끄러웠다.

다미선교회는 구체적으로 10월 28일이라는 휴거 일자까지 제시하는 바람에 더 주목을 받았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내가 사는 대전의 변두리 동네까지 휴거 관련 책자가 뿌려졌다.

주말마다 간식을 먹으러 교회에 다녔던 나는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며 혼자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마침내 휴거일자가 다가왔고, 내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세상에 온갖 종말론이 판을 쳤다.

대부분 웃어넘길 이야기였지만, Y2K만큼은 꽤나 신빙성 있게 들렸다.

나는 코딩에 꽤 능숙한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컴퓨터의 날짜 표기 방식은 월-일-년이었고, 년은 네 자리 중 뒷부분 두 자리의 수만 입력했다.

저장장치의 용량이 턱없이 적어 1바이트라도 줄이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이 그때까지 남은 거다.

이 경우 1900년과 2000년은 똑같이 00으로 처리된다.

컴퓨터의 오작동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사 및 우주용 컴퓨터의 스펙은 안정성 문제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의 금융망이 마비되고, 원자력 발전소의 컴퓨터가 오작동해 방사능이 누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핵폭탄이 갑자기 발사될지도 모른다는 괴담도 퍼졌었다.

나는 1999년 12월 31일 밤에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도시 전체에 정전이 발생하고, 핵폭탄이 날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할지 걱정하면서.

마침내 2000년 1월 1일 0시가 됐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었다.

이 책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내가 앞서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과 비슷하다.

이 책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종말이라는 자극적이고도 궁금한 소재를 바탕으로 우주와 지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흥미롭게 전하는 교양 과학 서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저자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대격변들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대격변이 다가올지 과학적인 근거로 예측하고 설명한다.

그중에는 일식이나 토성과 목성의 만남처럼 근거가 없는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고, 태양의 거대화 등 언젠가는 반드시 벌어질 종말론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종말론 시나리오 대부분은 우리가 생전에 경험할 일이 없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빅뱅, 초신성, 대멸종, 은하의 충돌을 우리 생에 겪을 일은 없지 않은가.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던 석유 고갈로 인한 대혼란 우려도 쑥 들어간 지 오래다.

돌이 사라져서 석기시대가 끝난 건 아니니 말이다.


우주 기준으로는 10만 년, 100만 년도 찰나의 시간인데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그런 우주적인 사건을 두려워하는 건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이 우주에서 하루살이 만큼의 존재감도 없는 무의미한 생일까.

이 책을 읽으니 오히려 종말에 관한 두려움보다는,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세계에 관한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세상을 궁금해 하는 게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종말을 걱정하는 일보다 훨씬 즐거운 일 아니겠나.

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거의 모든 것의 종말 - 과학으로 보는 지구 대재앙
[그믐북클럽Xsam] 17. 카프카 사후 100주년, 카프카의 소설 읽고 답해요.

그믐북클럽 17기를 모집합니다!


그믐북클럽에서는 그믐이 엄선한 좋은 책을 끝까지 읽고 질문에 대답하며 사유하는 힘을 기르실 수 있습니다. 그믐에서 추천하는 책을 함께 읽으며,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나누기 원하시는 독자 30명을 초대합니다.


*그믐북클럽은 15기부터 교보문고 구독서비스 sam 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작가들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꼭 100년 전인 1924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믐에서는 바로 그날, 6월 3일부터 29일 동안 카프카의 대표 소설 38편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38편이라고 하지만 종이책 기준으로는 568쪽에 불과(?)하니 아주 힘든 목표는 아닙니다. 엽편이라고 해야 할 짧은 단편들이 많거든요. (심지어 여섯 문장짜리 작품도 있습니다) 게다가 카프카는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가 아니라서, 이 38편을 읽고 나면 어디 가서 “나 카프카 좀 읽었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29일 동안 책 두 권을 연이어 읽으려 해요. 살림출판사의 『변신·소송』과 범우출판사에서 나온 『카프카 단편집』입니다. 전자는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지낸 진형준 교수님이, 후자는 독일에서 십자훈장을 받기도 한 독문학자 박환덕 교수님이 번역하셨습니다. 두 책에는 겹치는 작품이 없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다른 출판사에서도 많이 번역되어 나왔으니 어느 출판사 책으로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38편을 다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기회에 카프카를 읽어보고는 싶은데 부담스러우시다고요.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우시다고요.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목표뿐이다.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에 불과하다.” 망설이지 말고 신청하세요!


● 신청안내 ●


- 모집 기간: 5월 4일(일) ~ 6월 2일(월) 오후 2시까지

- 모집 인원 : 30명 + a


그믐북클럽 17기 더 알아보기




우다영 소설집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문학과지성사)

이 소설집을 읽으며 마치 시규어 로스의 앨범을 듣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을 느꼈다.

시간과 공간이 두서 없이 뒤얽히다가 느닷없이 한 곳으로 모이고 여러 곳으로 흩어진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도에 없는 미지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였다가 우연히 빠져나온 느낌이다.

낯설고 때로는 당황스러웠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8편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절묘하게 연결돼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연히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각각의 세계가 변화한다.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평행우주와 양자역학 개념을 활용한 묘사는 뒤얽힌 시간과 공간의 당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마치 SF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줬다.

매우 독특한 구성인데도 서로 어색하지 않게 유기적으로 이어져 놀라웠다.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로 불러도 어울리고, 나아가 형식을 부드럽게 파괴한 장편소설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은하 필라멘트를 떠올렸다.

무수한 별들을 품은 은하가 수백에서 수천여 개 모이면 은하단을 이룬다.

이런 은하단이 모여 군집을 이루면 초은하단이 되고, 초은하단이 모인 구조를 은하 필라멘트라고 부른다.

은하 필라멘트의 크기는 수십억 광년에 달한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바라보면 서로 연결된 거시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존재하지만, 서로의 중력이 연결돼 만들어지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다.


삶은 예측할 수 없어서 두렵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아름답다는 메시지가 소설 곳곳에서 변주돼 드러난다.

그래서 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도와야죠"라는 문장을 작품 곳곳에 남겼을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시작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니까.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김다은 『영감의 글쓰기』(무블출판사)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영감을 어디에서 얻느냐?"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가진 지인뿐만 아니라 언론사와 인터뷰할 때도 이런 질문이 빠지는 일이 없다.

그 질문에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나는 쓰고 싶은 소설의 주제를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 동안 생각하며 정리한 뒤 짧은 기간에 글로 쏟아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 과정에 딱히 영감이란 게 내게 영향을 미친 일은 없었다.

내겐 소설 쓰기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소설의 영감을 얻는지 무척 궁금한 사람이다.

나도 영감이란 걸 받아서 소설을 쓰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쳤다.

작가가 최근에 쓴 장편소설 『손의 왕관』을 읽었을 때 왠지 모를 영성(?)을 느낀 터라, 왠지 이 책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한번 읽는다고 없던 영감이 샘처럼 솟아나지는 않는다.

작가는 이 책의 머리말에 "영감에 대한 일방통행적인 기술이나 정해진 해답을 원하는 독자라면, 부탁드리건대 이 책을 사지 않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경고한다.

이 책은 소설을 쓸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해야하는지 헤매는 사람들에게 꽤 훌륭한 길잡이가 돼주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란 결국 사고 실험이니 말이다.


이 책은 수동적으로 내용을 따라가야 하는 책이 아니다.

자주 페이지에 머물러 생각해야 하고, 순서대로 페이지를 넘길 필요도 없다.

때로는 무언가를 책에 적어야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해야한다.

실제로 이 책에는 공책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여백이 많다

언어 감각을 익히기 위해 끝말잇기를 제안하고, 모르는 단어를 접하면 사전을 뒤지기에 앞서 먼저 상상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작가의 소설을 비롯해 중앙지와 지역지를 망라한 다양한 단편소설, 국내외 유명작가의 소설이 사례로 등장해 이해를 돕는다.

영감으로 글을 쓰는 능력을 가르치기보다는, 영감을 키우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는 책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은 책이다.

아껴 읽는 책이 아니라, 막 읽어서 제본이 뜯어져야 하는 책이다.

처음에는 전체를 통독하고, 필요할 때마다 목차를 보며 발췌독하면 활용도가 높은 책이다.


작가는 영감 훈련은 사유의 훈련이므로 자기 내부에서 길어올린 글을 쓰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영감 훈련이 돼 있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몰라서 재미있는 표현이나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 헤매니 글의 원천을 외부에 두게 되며, 자신이 창의적이지 않음을 아니까 빠르게 지치고 쓰는 기쁨을 잃어가게 된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곱씹을수록 옳은 말이다.


자신이 소설을 쓸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스스로 질문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래. 세상에 뭐든 거저 얻는 건 없다.

영감의 글쓰기 - 프로처럼 배우고 예술가처럼 무너뜨려라
영감의 글쓰기 - 프로처럼 배우고 예술가처럼 무너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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