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졌다시피 이 책의 저자는 특수청소업체 대표다.
오물이나 쓰레기로 뒤덮인 공간을 치우는 특수청소업체를 불러야 할 정도의 사안이라면 예사로운 일일 리가 없다.
저자가 자주 만나는 공간은 누군가가 죽은 공간,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시신이 발견된 공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죽음은 대체로 안쓰럽고 처연하며 참담하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줄을 놓기 전에 깨끗하게 방을 치우고 재활용 쓰레기까지 분류해 버렸고, 누군가는 전기와 가스까지 끊길 정도로 곤궁한 처지 속에서 홀로 죽음을 택하거나 혹은 함께 죽었다. 서랍에는 먹다 남은 약봉지가 수북하고, 우편함에는 수많은 세금 독촉장과 미납 고지서가 꽂혀 있다. 대개 가난하고 외롭게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바깥으로 새 나오는 시취다.
이 책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이런 죽음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런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전한다. 저자의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망자의 흔적은, 그들의 삶이 처음부터 우리와 다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순간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게 일상임을 실감했다.
에세이를 읽으며 문장이 좋다는 느낌을 받은 일이 많지 않은데, 이 에세이는 달랐다.
냄새와 풍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생생하게 묘사한 문장이 놀라웠다.
저자의 약력을 살피니 시를 전공한 문학도 출신이다.
문학도 출신 특수청소업체 대표라...
저자의 삶도 만만치 않았겠구나.
이렇게 땅에 발을 깊숙하게 디딘 사람들은 어떤 문학 세계를 보여줄까.
문득 저자가 나중에 혹시라도 쓰게 될 시나 소설이 궁금해졌다.
이 작품은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조금 더 알아보니 같은 해에 대상 수상작이 있었고, 우수상 수상작은 무려 이 작품을 포함해 다섯 편이나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수상작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작품은 이 작품뿐이다.
또한 역대 세계문학상 수상작에서도 마지막 히트작이 이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오랜 시간 소설이 살아남았다면 이유가 있는 거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30대 만화가인 주인공이 사는 망원동 옥탑방이다.
여기에 40대 기러기 아빠, 50대 한물간 만화 스토리 작가, 20대 고시생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하나둘씩 모인다.
코딱지만 한 옥탑방에 찌질한 네 남자가 뒤엉켜 사는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리가 있나.
이들은 가난하지만, 그 가난에 굴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지도 않는다.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대책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있어 강하다.
그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들이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피붙이보다 더 피붙이같이 서로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구원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고 넉넉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도 작품 속 망원동 옥탑방 앞 평상에 벌어진 술자리에 끼어서 한 잔 얻어 마시고 이런저런 썰을 풀고 싶었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 통일하고 5년이 지난 후를 배경으로 한다.
통일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혼란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 떠오르지만, 그보다 훨씬 매운맛이다.
작품 속 통일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갑작스러운 통일 때문에 호구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한반도에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북한 주민인 '대포인간'이 넘쳐난다.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북한군 출신 대포인간은 범죄조직을 구성해 사회를 어지럽히고, 도시에선 남북한 지역 갈등이 극단화된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니 북한 지역은 당연히 통제 불능 상태다.
작가는 북한군 출신 범죄조직에서 벌어진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며, 준비 없는 통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소설이긴 하지만, 통일 이후 벌어질 미래를 개연성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해볼 만하다.
통일만 되면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여전히 읽어볼 만한 메시지가 가득 담긴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는 여러 이유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는 상처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내는 이들의 내면을 밑바닥까지 파고든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남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세상과 벽을 쌓아두고 사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그런 사람의 심리와 그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공교롭게도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이 내가 과거에 느껴봤거나 현재 느끼는 감정과 많은 부분 겹쳐 읽는 내내 몰입할 수 있었다.
소설은 막연했던 감정을 구체화해 내게 보여줬다.
몇몇 작품을 읽을 때는 마치 심리 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다른 이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상처 입은 사람이다.
살면서 꽤 많은 상처를 입었고 또 그 상처를 들여다봤구나...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리다가 들은 생각이다.
소설보다 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좋은 거울이 과연 있을까.
좋은 소설을 읽으면 조금이나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처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건 결국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아닐까.
책장을 덮으며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소설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작품은 몽골 설화로 시작한다.
아주 오래전 신께서 낙타에게 뿔을 주셨다.
마음이 착해 상을 주신 것이다.
어느 날 꾀보 사슴이 낙타에게 와 말했다.
"뿔 좀 빌려다오. 잘 차리고 서역 잔치에 가련다."
낙타는 곧이 믿고 뿔을 빌려주었다.
사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낙타는 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사슴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 설화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바다에 빠져 실종된(죽은 게 확실한) 연인이 살아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20대 여성 효은, 효은의 아버지와 결혼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된 뒤 비자와 유산을 받으려고 버티는 조선족 여성 애선, 애선을 등처먹다가 빚을 갚겠다며 뻔뻔하게 효은의 집에 눌러앉은 사기꾼 구 씨. 뿔을 잃은 낙타를 닮은 이들이 낡은 빌라에 모여 기묘한 동거를 하며 각자의 사슴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이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모습이 처음에는 긴장감 있게 그려지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전개가 인상 깊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짜증이 났는데, 소설의 끝에 다다를수록 이들이 오래도록 기묘한 동거를 지속하며 행복해지기를 응원하게 됐다. 아울러 곳곳에 숨어있는 반전은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한다.
소설은 효은은 말없이 집을 나간 애선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하지만 연인을 잃고 오랫동안 상실감에 빠져있던 과거와는 다른 기다림이다. 취업해 열심히 일하고, 언제든지 애선이 돌아올 수 있도록 낡은 빌라를 지킨다. 소식은 끊겼어도 애선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작가가 소설로 하고 싶었던 말은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내일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꽤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가세가 기운 집안이 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며 어떻게 해체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작가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소외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린다.
독특한 시점 활용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은 '김만수'임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김만수가 발화자로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김만수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들 모두에게 서사가 있고, 그들 누구도 소설 속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이런 독특한 시점 활용은 소설과 주인공 사이에 자연스럽게 거리를 둬 신파로 흐르지 않게 연출한다. 그저 묵묵히 희생을 감내하는 주인공의 모습만 여러 인물의 입으로 들려줄 뿐이다. 주인공이 직접 울게 하지 않는 연출은 소설을 읽을 때 오히려 더 가슴을 저리게 했다.
정밀하게 세공한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만든 시대극이고, 곳곳에서 고어와 방언이 튀어나오는데도, 고루한 인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작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집필에 공을 들였는지 느껴져 혀를 내둘렀다.
시대극 특유의 온갖 사회적 제약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갈등, 그 갈등 속에서 결핍과 비틀린 욕망에 잠식되거나 불나방처럼 파멸을 알면서도 사랑에 몸을 던지는 주인공들.
그들의 몸부림이 가슴 아프고 처절한데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반전에 반전이 계속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들 모두 입체적이면서도 매력적이어서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치명적인 사랑을 다룬 김진규 작가의 장편소설 『달을 먹다』(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를 떠올렸는데, 당대 생활상을 묘사하는 디테일은 몰라도 이야기의 흡인력은 이 작품이 더 좋았다.
양이 상당한 소설이어서 2~3일 나눠 읽을 생각이었는데 실패했다.
읽다 지쳐 몇십 페이지만 남긴 채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저 읽었다.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니.
정말 많이 놀랐다.
책장을 덮은 뒤 뭐랄까... 뒤통수를 거하게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젊은 작가는 현재를 이야기해야 하고, 시대극은 어느 정도 경륜을 가진 작가가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젊은 작가가 시대극을 다루는 건 현재에서 소설로 다룰 이야기를 찾지 못해 변명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왔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내 의심이 오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내가 지나치게 쫓기듯 급하게 소설을 써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나는 지금 쓰는 소설이 내가 마지막으로 쓰는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산다.
먹고 살기 위해 월급쟁이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언제나 돼 있고, 그 전에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늘 사로잡혀 있다.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쓸 기회가 생기면 밤을 새우든 굶든 어떻게든 1~2달 사이에 장편소설 집필을 끝내는 게 패턴이었다.
그렇게 집필을 마친 원고는 다시 들여다보기 싫을 정도로 질려서, 고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더 원고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면,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녹지 않는 눈으로 뒤덮인 세상.
이 독특한 설정만으로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이미지를 펼쳐낸다.
방부제처럼 수분을 흡수하면서 살갗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
소설 속 재난의 모습이 코로나 펜데믹과 겹쳐 보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각하거나 묻어야 사라지는 눈이 내린 지 7년이 넘었지만, 세상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재난 이전부터 쓰레기 매립지를 가지고 있었던 도시로 녹지 않는 눈이 몰려들었고, 가난한 청춘들은 눈을 처리하는 작업에 소모품처럼 쓰인다.
이 소설은 눈 소각장에서 재회한 중학교 동창 '모루'와 '이월'의 시선을 교차해 환경문제, 자연재해, 노동인권, 동물권, 님비현상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는다.
실종된 '모루'의 이모를 추적하는 과정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있지만, 그 과정이 뚜렷하지 않아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소설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은 세상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묻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배경도 성격도 모두 다른 두 주인공의 선택은 연대다.
마지막에 둘은 소재는커녕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모루'의 이모를 찾아 목적지 없는 방랑을 감행한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무모하지만, 둘의 뒷모습은 따뜻해 보였다.
소설은 녹지 않는 눈을 녹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 펜데믹을 통해 깨달았지 않았는가.
내 이웃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내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일상을 회복하는 힘은 연대의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참담한 장면의 연속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식했다.
동시에 뿌리내릴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완강한 생명력이 눈물겨웠다.
이 작품은 1937년 소련에서 벌어진 고려인 강제 이주를 다룬다.
소련은 연해주 일대 일본의 간첩 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흩어지거나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막처럼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겨우 생존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대강 알고 있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역사다.
작가는 고려인들을 싣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화물열차 한 칸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긴 노래를 듣는 기분을 느꼈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등장인물 저마다의 목소리가 설명이나 묘사를 대신한다.
누구인지 분명한 목소리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뒤섞여 돌림노래처럼 울린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담은 목소리들이 뭉쳐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한 덩어리를 이룬다.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해결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동토를 떠돌며 벌이는 슬픈 굿판.
지금까지 접해본 적 없는 독특한 연출에 전율했다.
마지막 장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속에서 생과 사가 이어지는 모습이 무심한 시선으로 교차하는데, 독자는 결코 무심해질 수 없다.
비참한 역사를 특정 이념에 기대는 대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풀어낸 연출이 소설에 울림과 깊이를 더한다.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신경숙. 마주하면 기분이 복잡해지는 이름이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감성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신경숙 작가가 이문열, 김훈 작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탁월한 문장을 쓰는 소설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누가 봐도 명백한 표절 앞에서 변명하던 작가의 모습도 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말 같지도 않은 논리로 작가를 옹호하느라 바빴던 문단의 실망스러운 모습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도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출간되자마자 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손에 쥔 책은 3쇄 본이었다.
여전히 신경숙의 신작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일 테다.
작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인 <엄마를 부탁해>를 작가의 최고작으로 꼽는 독자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고백하자면 나는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많이 울었다.
공교롭게도 작품이 출간된 해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였던 터라.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가 <외딴방>이나 <깊은 슬픔>보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말은 못 하겠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안타깝지만 <엄마를 부탁해>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란 게 내 의견이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해 많은 부분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약간 수정해 가져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은 여전했지만, 곳곳에서 기시감이 많이 느껴졌다.
문장 곳곳에서 감정에 큰 진폭을 일으켰던 <엄마를 부탁해>와 비교해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잔잔한 편이다.
게다가 분량도 적지 않은 편이어서 집중해 읽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치게 올드한 느낌도 아쉬운 점이다.
작가를 둘러싼 논란이 컸던 만큼, 가장 성공적이었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복귀하는 게 안전하다고 여긴 걸까.
조금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