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상은 늘 씁쓸하다.
그런 상상은 보통 현재의 나에 만족할 수 없는 현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랬다.
나는 주로 과거의 나를 윽박질러 현재를 바꾸는 상상을 했다.
연애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굳이 모든 사람에게 좋을 사람일 필요는 없다, 먹지 못하는 사과를 파는 회사의 주식을 사야 한다, 비트코인을 열심히 채굴해라, 영끌해서 어떻게든 서울 내 아파트를 장만해라 등...
이 작품은 그런 상상을 현실로 끌어왔다.
그렇다고 이 작품 속 상상이 내 상상처럼 속물적이란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은 30대 직장인인 '태희'가 어린 시절의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태희는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회사 조직과 배신한 연인 때문에 자존감을 잃은 상태다.
지친 태희가 별생각 없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닿고, 어린 시절의 자신이 쓴 답장이 현재의 주인공에게 닿는다.
설정만 보면 타임슬립물인데, 읽으면 딱히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주인공과 현재의 주인공은 자신이 받은 편지가 자신이 쓴 편지란 걸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너그럽게 읽으면 영화 <러브레터>처럼 이름만 같은 누군가에게 서로의 편지가 닿는 설정이라고 우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넘은 뒤,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른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탄탄한 미래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나는 10대, 20대, 30대 때와 다를 게 없다.
달라진 건 나이 든 몸뿐이다.
50대, 60대, 70대가 돼도 몸만 늙어갈 뿐 몸 안의 내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쌓아온 내 삶의 방식이 극적으로 달라질 리도 없으며, 딱히 세상에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될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은지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는데, 작품이 꽤 위안이 됐다.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고.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꼭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리는 늘 미련을 쌓고 후회를 반복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마주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작가는 태희의 입을 빌려 사려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가는 나와 성이 다르지만 이름은 같고, 나이도 같다.
작품 속 태희의 고민은 어쩌면 작가의 고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로부터 너는 너대로 그냥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음악, 연기, 연출, 소설,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예술인 52명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다.
이 인터뷰집에 실린 인터뷰이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예술인이다.
내 경험을 비춰 보면, 그런 수준에 다다른 예술인은 배울 것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훌륭한 편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엿보는 일이 흥미진진했다.
인터뷰에서 오가는 이야기의 밀도가 매우 높고, 온도도 따뜻하다.
인터뷰이는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리고, 저자는 인터뷰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저자가 인터뷰이의 마음을 여는 방법은 꼼꼼한 사전 준비와 인터뷰이를 향한 애정이다.
음악 분야 인터뷰이 중에는 내가 기자 시절에 인터뷰로 만났던 예술인도 꽤 있었다.
그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당시 내가 기사 마감에 급급해 취재를 너무 성의 없이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했다.
저자는 인터뷰를 '고백과 자각' '열정과 통찰'이라는 부제로 두 권에 나눠 담았다.
두 권을 합치면 나름 벽돌책 분량인데, 그렇다고 읽기도 전에 지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인터뷰집이기 때문에 책의 어느 페이지를 먼저 펼쳐 읽어도 문제가 없으니 말이다.
술술 읽히는 데다 이런저런 뒷이야기도 많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도 소설처럼 재미있다.
분야는 달라도 인터뷰이들이 던지는 메시지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예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우리의 삶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가슴 아픈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이 지금까지 어떤 형태의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있는지 전한다.
무자비한 고문의 후유증이 남긴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주변인을 괴롭히고 스스로 삶을 등지는 사람들, 의도치 않게 비극의 중심에 섰거나 혹은 주변부에서 떠돌던 사람들의 생생한 고백이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생생한 호남 방언이 읽는 맛을 더하고, 실제 유가족과 시민의 증언이 소설에 현장감을 부여한다.
작가는 비극의 상처와 아픔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누군가를 무작정 매도하거나 연민하지도 않는다.
그저 소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 40년 전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볼 뿐이다.
먼저 흥분하거나 울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독자가 비극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며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세월호 참사 추모가 지겹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40년 전에 벌어진 비극을 아직도 추모하는 게 지겹다는 말이 나온 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됐다.
작가는 40년이 지났든 그보다 오랜 세월이 지났든 비극을 추모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소설로 말한다.
아직도 당시 비극을 기억하고, 그 비극으로 상처 입은 수많은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그랬듯이, 소설은 기억과 역사에 생명력을 더하는 방식 중 하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런 작업을 해온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p.s.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의 대화를 인용한다.
이 대화가 지금까지 당시의 비극을 매도해 온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그때는 나도 대학을 이 년 댕겼던 때라서 뭘 쪼매 알긴 알았지. 뭣이 옳은 것인지 알긴 알겠는데 요상하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라. 그냥 빨갱이 새끼들로 매도해 뿌리는 기 내 맘이 편했든 기지. 그라이까네 뭔가 복잡한 생각이 일어날라카는 기를 단순한 걸로 덮어 뿐 거라. 와? 내 편할라꼬, 내 자존심 안 상할라꼬, 내 꿀리기 싫어가. 이때껏 그냥 쭉 그래 살아왔던 기라. 그라면서 또 홍어들을 짓밟았지. 너덜언 내 진실의 거울 같은 존재거던. 거울이 깨져 삐야 내 진실이 비치지 않을 거 아이가."(92~93페이지 '생선매운탕' 중)
어른의 사랑을 그린 독한 연애소설이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배경 화면처럼 떠오른 색깔은 보라색이었다.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고,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하며, 외면하고 싶은데 궁금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적지 않은 분량인데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이야기의 힘이다.
여기에 충분한 취재가 없으면 불가능한 기업소설의 요소가 어우러져 재미를 더한다.
가방과 관련한 업계의 다양한 용어와 방대한 설명은 마치 패션 잡지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끝까지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구성은 추리소설을 연상케 한다.
소설 속에 담긴 또 다른 소설(이건 작품 읽어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의 매력이 상당하다.
주인공인 '다정'을 비롯해 캐릭터들의 입체적인 성격도 다음 페이지 내용을 예상하지 못하게 하는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애정, 애증, 질투, 욕망 등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이 무척 섬세했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읽으면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아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결을 가진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머지않아 이 작품을 영상으로 감상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p.s.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비컨'이 조금 멋있게 소설에서 퇴장하면 좋지 않았을까.
이 책에는 머리 아픈 공식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도형을 설명의 중심에 놓고 점과 선, 그리고 면이 펼쳐내는 세계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그저 외우기만 해서 어렵게 느껴졌던 수학 개념이 쏙쏙 머릿속에 들어온다.
직각이 왜 90도이며 원의 중심각이 왜 360도인지, 삼각형의 내각은 왜 180도이며 모든 다각형의 내각은 왜 360도인지 등 다양한 수학적 개념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타깃은 중학생 이하로 보이는데, 어른이 읽어도 즐겁다.
다양한 수학적 개념이 어떻게 실생활과 연결되는지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독특하게도 3수를 하던 시절에 수학에 흥미를 느꼈다.
학창 시절에 흥미를 잃었던 수학에 다시 눈을 돌리게 해준 건 교과서였다.
집안 사정이 넉넉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입시 관련 사교육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혼자 3수를 준비해야 하니 입시 전략도 혼자 짜야 했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수학이었다.
어떤 수학 교재를 공부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서점에서 교과서를 집어 들었다.
나로서는 대단히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나는 응용문제는 그럭저럭 잘 풀었지만, 문제 유형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맥을 못 췄다.
나는 기본기가 엉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교과서로 돌아갔다.
아무리 참고서가 좋다고 해도, 교과서 집필진보다 우수한 집필진이 참여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과서는 참고서보다 훨씬 가격이 저렴했다.
나는 수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의 심정으로 교과서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문제 풀이 대신 교과서로 개념부터 차근차근 잡아나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외우지 않아도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낯선 유형의 응용문제를 푸는 일도 수월해졌고, 실제 수능 시험에서도 수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열심히 푸는 게 수학이 아니란 걸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그걸 뒤늦게 깨닫다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수학 교과서가 이 책처럼 재미가 있었으면 수포자 여럿을 구제했을 텐데."
이 책을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든 생각이다.
어쩌면 그 시절에 수학을, 아니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냈던 게 아닌가 싶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법을 알고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전의 나처럼 삽질을 안 한다.
마약의 '마'가 악마를 뜻하는 '마(魔)'가 아니라 마비를 뜻하는 '마(痲)'라는 사실을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내가 마약에 관해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궁금해져 책에 훅 빨려들었다.
이 책은 내가 마약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편견도 가지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매우 흥미롭고, 놀라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긴 책이다.
이 책은 초반에 꽤 충격적인 가설을 소개한다.
인류가 환각물질을 포함한 버섯을 먹으면서, 한마디로 약을 빨기 시작하면서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됐다는 가설이다.
검증된 가설은 아니지만, 나름 내세우는 증거에 꽤 설득력이 있다.
구석기인이 살던 동굴에 환각을 유도하는 버섯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도 마약성 식물이 발견된다.
아울러 저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마약성 식물이 종교의식과 의료 행위에 쓰였으며, 마약이 지금처럼 터부시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그 배경에 종교와 정치,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이 책은 교양서(?)라는 타이틀에서 엿보이듯이 마약에 관한 상세한 지식 전달도 잊지 않는다.
저자의 입심이 꽤나 세다.
덕분에 심각한 내용이 심각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부작용(?)이 있다.
저자는 마약의 종류부터 천연마약과 합성마약의 구분법, 마약의 효과, 영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소개되는 마약의 역사, 마약과 관련한 온갖 재미있는 일화 등을 유쾌하게 설명한다.
1954년 월드컵 결승전에 독일 선수들이 약을 빨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외면하긴 쉽지 않을 테다.
이 같은 장치는 마약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거부감 없이 이뤄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저자는 마약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약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면, 마약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고, 마약에 세금을 걷어 마약 관련 정책에 사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의 강력한 반발을 살만한 태도다.
그러니 누가 봐도 가명인 이름을 저자의 이름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테다.
하지만 저자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미국, 포르투갈 등 세계 각국의 사례와 통계를 바탕으로 마약을 법으로 금지했을 때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던 부분은 디딤돌 효과에 관한 의문이다.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대마는 술이나 담배보다 훨씬 안전하고 중독성도 적다.
그런데도 대마가 법적으로 금지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대마가 더 강한 효과를 보이는 마약으로 빠져드는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나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알아 왔기 때문에, 대마를 금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왔다.
저자는 술을 예로 들어 디딤돌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디딤돌 효과가 사실이라면, 맥주와 같은 저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맥주를 버리고 소주에 이어 위스키 같은 고도주에 빠져들어야 한다.
하지만 맥주를 즐기는 사람이 다들 위스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맥주는 싫어하지만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위스키를 싫어해도 와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술에 관한 취향이 서로 천차만별이란 걸 모두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마약 또한 서로 천차만별이어서 마약이란 하나의 범주로 묶기가 곤란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대마초를 한 사람이 반드시 헤로인이나 코카인에 손을 대는 건 아님을 밝힌다.
이 부분에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마약 중독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방안에 관한 설명은 시사점이 크다.
세계대전 당시 많은 군인이 진통제로 몰핀을 처방받았다.
몰핀 중독자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전쟁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몰핀에 의존한 군인은 소수였다.
사회 안전망과 복지, 충분한 여가를 통해 심신의 안정이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마약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
저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싶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희망을 상징하는 가사로 1970∼1980년대 청년 문화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심지어 이 노래는 1990년대 북한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다가 금지곡이 됐다고 알려졌다. 좋은 가사의 힘은 이처럼 이념과 체제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다. 좋은 가사는 그 자체로 좋은 문학이기도 하다. 운율을 품은 가사는 시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서사를 이뤄 짧은 소설이 되기도 한다.
미국 포크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가사의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가 쓴 가사 비평집 ‘이 한 줄의 가사’(열린책들)는 좋은 가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때로는 통렬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배호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들국화의 ‘행진’,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싸이의 ‘챔피언’, 아이유의 ‘가을 아침’ 등 세대를 아우르는 히트곡 41곡의 가사를 골라 가요사적 의미와 감성의 계보, 시대적 배경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저자는 뛰어난 가사는 시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새로운 감성을 연다고 강조한다. 송창식이 노래하고 최인호가 작사한 ‘고래 사냥’에 대해 저자는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라는 후렴구 덕분에 1970년대 군부 독재하에서 숨죽이던 청춘들이 ‘정신의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들국화가 부른 ‘행진’의 가사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에서 저자는 불운과 시련마저 축복으로 삼겠다는 청춘의 결기를 읽는다. 이념과 도덕적 엄숙주의에 억눌린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예고하는 뜨거운 외침이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송골매의 ‘모여라’의 가사 ‘회사 가기 싫은 사람/장사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에 대해 저자는 1990년대 개발도상국 한국 사회를 지배하던 ‘근면의 세계’에 던지는 유쾌한 돌팔매질이었다고 말한다. 혁오가 노래한 ‘톰보이’의 가사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 가는데”에서 저자는 행복과 자아실현을 기약할 수 없는 요즘 청춘들의 신산한 삶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한국 가요사에 획을 그은 아티스트들을 향한 헌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북한강에서’를 부른 정태춘을 “한(恨)과 그리움의 토착적 정서를 독보적으로 그려 온 싱어송라이터”로 정의한다. 조동진에 대해선 “한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운문의 시대가 있었음을 증언한 음악가”, 하덕규에 대해선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던 음악가”라고 찬사를 보낸다.
저자는 가사 비평과 함께 해당 가사와 곡이 실린 앨범을 소개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좋은 앨범에서 좋은 가사가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앨범 소개에는 음악가들의 창작 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들, 음반의 제작 배경,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레이블, 저자 자신이 곡을 주거나 인연을 맺은 음악인들의 소소한 일화 등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담겨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발전은 압축적으로 할 수 있지만, 성숙은 압축적으로 할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독일을 거울로 삼아 내게(어쩌면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에게) 생소한 68혁명이 현대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군사 독재의 철저한 통제 때문에 68혁명이 대한민국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68혁명의 부재 때문에 광장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와 일상에서 펼쳐지는 민주주의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생겼는지 지적한다.
저자의 분석을 통해 86세대가 주축인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남들보다 도덕적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이다.
그때 일부 지지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특히 미투 운동을 주도하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여권이 본진에서 벌어진 온갖 성추행에 보여준 태도는 얼마나 기만적이었던가.
LP 세대가 아닌 나는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낯설었다.
음악을 꽤 편식하는 편이어서 이 책에 소개된 음악의 3분의 1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지금은 딱히 물건 욕심이 없지만, 나도 한때 무언가를 열렬히 수집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집에 열을 올렸던 물건은 한국 헤비메탈 앨범이었다.
학창 시절에 나는 고향인 대전의 모든 음반 가게는 물론, 시간이 나면 시골까지 가서 음반 가게까지 뒤져 한국 헤비메탈 앨범을 찾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앨범을 분실했지만, 지금도 꽤 그때 모은 앨범이 남아있다.
그때 왜 그렇게 철 지난 한국 헤비메탈 앨범 모으기에 꽂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희귀 앨범을 손에 쥐었을 때 느낀 희열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간에 공부했으면 3수를 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열혈 LP 수집가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열렬히 수집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은 다시금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는 타임머신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덕분에 나도 용돈을 아껴가며 발품을 팔았던 시절의 추억을 오랜만에 되새겼다.
p.s. 이 책에 부록으로 담긴 '오래된 음반' 편에 나도 짧은 글을 하나 실었다.
무인도에 음반 한 장만 가지고 가야 간다면, 당연히 나는 조용필의 'The Dreams'지.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린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한빛비즈)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온갖 인터넷 밈과 개드립을 동원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룡에 관한 지식을 즐겁게 풀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놀라웠던 책이었다.
이 책은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보다 먼저 출간된 책인데, 뒤늦게 일독했다.
이 책은 고생대에 등장한 곤충이 중생대를 거쳐 신생대로 오며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풀어낸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웃긴다는 점이다.
또한 만화로 그려진 곤충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온다.
바퀴벌레조차도 귀여워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처럼 이 책에도 다양한 인터넷 밈과 개드립이 넘쳐난다.
읽다가 피식 웃게 만드는 부분이 곳곳에 넘쳐난다.
곤충에 관해 관심이 없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가볍게만 볼 책은 아니다.
곤충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는 곤충의 차원을 넘어 지구의 생물이 왜 현재 모습으로 살아가게 됐는지에 관한 통찰한다.
저자는 곤충의 생태를 설명하는 한편 식물과 곤충의 관계, 곤충의 성생활, 곤충이 번성한 이유 등 흥미로운 주제도 하나하나 살핀다.
이를 따라가며 보면, 오늘날 곤충이 지구에서 어떻게 가장 번성한 동물이 됐는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지식이 담긴다.
만화라고 가볍게 봤다가는 허를 찔릴 책이다.
진화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에 따라 이뤄질 뿐, 어떤 의지나 목적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인가.
읽고 나면 주위에 하찮게 보였던 온갖 벌레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