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할매가 돌아왔다>를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이 작품도 정독하려고 챙겨뒀었는데, 무려 8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릴 줄은 몰랐다.
신간 구입을 멈추고 그동안 읽지 않은 구간을 뒤지다가 뒤늦게 이 작품을 발견했다.
이 작품도 <할매가 돌아왔다>만큼 술술 읽히는 유쾌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에 미국에서 자라 영어만 잘하는 왕따 여고생, 머리가 좋아지는 침술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잘 훈련된 개들을 몰고 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교도관 출신 카페 주인 등.
작가는 여러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워 무한 경쟁에 노출된 교육 현장의 실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렇게 빨리 페이지가 넘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고,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
작가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1963년생) 문장이 재기발랄해 다시 한번 놀랐다.
8년이나 지난 작품인데도 철 지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교육 관련 부조리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을 넘어 여전히 뜨거운 감자 아닌가.
작가는 일진의 주먹질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 평범한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임을 보여주며, 경쟁에 매몰돼 자신과 상관없는 부조리를 외면하는 무책임한 다수를 질타한다.
나 답게 사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지 무겁지 않게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일등을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일등을 하고 싶어서 슬퍼지는 것"이라는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훌륭한 성장소설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가벼운 유희가 불러온 심각한 나비효과에 휘말린 등장인물들.
그들의 행보를 따라가는 과정이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정교한 구성이 돋보였다.
최근에 읽은 장편소설 중에서 가장 치밀했다.
날이 선 문장이 아닌데도 책을 덮을 때까지 일정한 강도의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 훨씬 많은 장편을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몇 년 전에 샀지만 일부러 피해왔다.
이 작품은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본심에 내 장편소설 <침묵주의보>(공모 당시 제목은 <짖는 개가 건강하다>)와 함께 올랐었다.
데뷔 후 7년 동안 신작을 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작품 청탁을 받지 못했던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침묵주의보>를 밀어내고 수상한 이 작품과 문학동네에 화가 났었다.
얼마나 잘 써서 수상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데, 막상 책 표지를 보니 페이지를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침묵주의보>보다 훨씬 좋은 작품일까 봐 두려웠다.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앞으로 더 소설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중에 <침묵주의보>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몇 쇄를 추가로 찍고 덤으로 백호임제문학상도 받을 때, 나는 문학동네를 속으로 무척 비웃었다.
내걸 뽑았으면 훨씬 재미를 봤을 텐데 멍청한 선택을 했다며 말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몇 년이 흐르니 이제는 이 작품을 읽어도 아무렇지 않을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심사위원이었어도 이 작품에 상을 줬을 테다.
만듦새를 비교해 보니 <침묵주의보>가 나댈 작품이 아니다.
나는 이 작품처럼 세공한 보석을 닮은 장편을 쓸 자신이 없다.
다만 읽는 재미는 <침묵주의보>보다 훨씬 떨어졌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성과 뒤늦은 소재(80년대 군사정권)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가 많진 않았을 테다.
평범한 독자보다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나 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한 작품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으니 말이다.
좋은 소설이다.
서재에서 이 작품과 유난히 자주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고 실망한 터라 더 그랬다(특히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는 오버였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서재에서 읽지 않은 구간을 뒤지다가 또 이 작품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최근 한국 문학 신간을 읽는 일은 페미니즘 서사를 읽는 일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 작가가 많고 그들이 내놓는 이야기도 많다.
이야기가 많은 만큼 식상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이 작품은 '유니크'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성폭력 피해자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겐 약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 자체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등장인물 모두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할수록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새겨진다.
작가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는 과정을 대단히 솔직하고(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제하지 않은 문장으로 풀어내는데, 그 거친 호흡이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울린다.
그들이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아니었는지를 돌아보며 오롯이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간절하게 바라는 과정이 섬세하다.
무거운 주제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이야기를 쌓아 한곳으로 모아 터트리는 구성도 읽는 데 흥미를 더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헤매다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빠져나온 기분이다.
뒤늦게 읽고 머리를 한방 세게 맞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어보길 잘했다.
<대불호텔의 유령>보다 좋았던 작품이다.
훨씬 더!
작가의 신간을 더 챙겨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조직폭력배 말단 조직원이 우연한 계기로 명문대 학생으로 신분을 세탁하는 과정 묘사에 개연성이 부족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홍콩 누아르를 방불케 하는 뒷골목과 폭력 묘사, 아슬아슬한 심리 묘사가 부족한 개연성을 덮는다.
어딘가 조폭답지 않은 섬세함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매력적이고 또 애잔해서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여기에 예상하지 못한 후반부의 반전도 책을 덮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읽는 내내 눈앞에 영상이 그려졌다.
드라마보다는 영화로 만들어지면 무척 개성적인 작품이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거두절미하고 잘 읽히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여기서부터 주의! 작품과 관련 없는 썰이 훨씬 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도 의미를 부여하진 않지만, 2011년은 한국소설 시장에서 꽤 독특한 해였다고 자평한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는데, 당시에는 큰 상금을 내건 장편소설 공모가 적지 않았다.
그중 한겨레문학상, 중앙장편문학상,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현직 기자가 수상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자는 이젠 명실상부 한국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동아일보 출신 장강명 작가였고,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자는 이 작품을 쓴 세계일보 출신 심재천 작가,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자는 나였다.
당시 장강명 작가는 다른 작품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본심에도 올랐던 터라, 문학상 다관왕 경력을 몇 년 앞당길 뻔했다.
그랬다면 내가 데뷔하는 일은 없었겠지.
안타깝게도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등 일부 공모 외에 장편소설 공모 다수가 사라졌다.
오랫동안 당선작 중에 히트작이 별로 없었다는 게 큰 이유일 테다.
내가 아는 한 장편소설 공모작 중 마지막 히트작은 2013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다.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수상작이 죽을 쒔다.
그 이전에도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천명관 작가의 <고래>, 2005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김별아 작가의 <미실>, 2006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박현욱 작가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도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을 뿐이다.
상금도 회수 못하는 공모전을 오래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장편공모로 데뷔한 작가들이 한국문학 시장에서 홀대 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단편이 주류를 이루는 기형적인 문학시장도 이유일 테고.
그러다 보니 장편공모 당선 작가가 빠르게 후속작을 내거나 단편 청탁을 많이 받아 시장에 안착하는 경우가 드물다.
장강명 작가만 해도 투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장편 공모 도전에 다시 뛰어들어 상을 휩쓴 뒤에야 주목 받지 않았던가.
나 또한 데뷔작 이후 후속작을 내는 데 7년이나 걸렸고.
뒤늦게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 또한 나처럼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 또한 나처럼 작가가 데뷔작 이후 7년 만에 출간한 후속 장편소설이니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작가의 신작을 만나고 싶다.
국내 문학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소재로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온갖 불법이 활개 치는 다크웹.
그곳에서 살인자만을 위해 운영되는 쇼핑몰.
그 쇼핑몰을 두고 벌어지는 암투.
반전에 반전.
킬링타임 스릴러 액션 영화를 닮은 작품이다.
분량이 짧고 흡인력이 좋은 페이지 터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반전의 개연성과 힘이 떨어진다.
특히 결말 부분은 "이게 뭐지?" 싶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호러로 시작해 디즈니 가족 영화처럼 끝난 영화 'Thir13en Ghosts'을 다시 감상한 기분이다.
작품을 조금 더 알아보니 작가의 단편 '살인자의 쇼핑 목록'을 장편으로 확장한 결과물이었다.
그 때문에 이런 결과물이 나온 걸까.
처음 부분을 읽었을 때 가진 기대가 컸던 터라 아쉬웠다.
말하는 병아리, 다이아몬드 반지로 현신한 그레이스 켈리, 고양이로 변한 아버지, 좀비로 되살아나 등교하는 학생, 외계로 사라졌다는 어머니 등.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의 등장인물은 체제에 순응하며 살다가 느닷없이 변신하고 폭주한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은 하나 같이 우울하지만,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불안, 욕구 불만, 슬픔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적인 이야기인데, 몽환적인(때로는 황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작가의 문장 때문에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동의하긴 어렵지만,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반 좀비'에 실린 일갈이 아닌가 싶다.
"뭘 하건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지고 멸망하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죽기 위해서지. 그것 말고 이 세계는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러니까 부디 네 멋대로 살라고."
진지하게 읽기에는 가볍고, 가볍게 읽기에는 무거운? 그 어딘가에 있는 이야기의 모음이었다.
12년 전 내가 기자 초년병 시절에 겪은 일이다.
당시 나는 주말판 레저 기사 취재 때문에 한 농촌 마을을 찾았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낯선 광경을 보고 놀랐다.
어린아이들이 공터에 모여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혼혈이었다.
멀리서 누가 봐도 외모로 구분되는 혼혈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여느 도시의 한국의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떠들고 있었다.
농촌에 다문화 가정이 많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한국어로 떠드는 게 당연한데, 그땐 그 모습이 왜 그리도 낯설었는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열의 일고여덟 가정이 다문화 가정이고, 학교에서 놀림이나 차별받는 아이들이 많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아이들은 아마도 지금쯤 성인이 됐을 텐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 작품을 읽으며 오래전에 겪은 일을 생각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농촌 한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20대 여성 '예슬'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독백을 통해 드러나는 다문화 가정의 실상은 끔찍하다.
피부색이 다른데다 틱 장애에 투렛 증후군까지 앓는 예슬이 경험하는 세상은 지옥도다.
농촌 마을이라는 작은 사회, 그곳에서 다르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멸시와 학대의 이유가 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의미는 다문화 가정에서 이주민 여성이 겪는 고통스러운 삶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현장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다문화 가정 관련 보도와 다큐멘터리보다도 생생하고 처참했다.
문장의 흡인력도 좋아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가 쉽다.
한바탕 장대한 악몽을 꾼 기분이다.
그 악몽이 내 현실이 아님을 안도하며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한국 사회가 '다름'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한 번 읽어보시라.
대마에 취해 욕설을 쏟아내며 자신을 파괴하는 예슬의 절규가 슬펐다.
소설은 종종 그 어떤 매체보다 훌륭한 고발 도구가 된다.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괴롭히며 즐기는 맛에 사는 사람의 정신없는 독백이 펼쳐진다.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은 없지만, 그 이상으로 잔인하고 섬뜩했다.
소시오패스 혹은 사이코패스의 머릿속을 롤러코스터를 타고 여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타인의 불행을 방패 삼아 안도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 아니 내겐 없을까?
한 번 리듬을 타니 끝까지 쭉쭉 읽히는 게 신기하면서도 몹시 피곤하고 불편했다.
호불호를 떠나 정말 스타일리시한 작가다.
그래서 오랫동안 근처에 두고도 읽기를 망설였던 거고.
해묵은 숙제를 끝낸 기분이지만 유쾌하진 않다.
개발 독재가 진행되던 70년대와 8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의 격변하는 사회와 분위기 묘사가 생생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담긴 낭만적인 과거 묘사는 이 작품에 없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장마철만 되면 집이 물에 잠기고 개천에 똥이 떠다녔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
주인공 가족은 간신히 마련한 집을 결국 지켜냈지만, 건축가가 지었다는 그 집은 기반부터 지붕까지 모두 부실해 위태롭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이 그런 집을 닮은 게 아닐까?
이 물음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친해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화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이야기가 튀어나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나중에는 이해를 포기한 채 페이지를 넘기는 데 의미를 뒀다.
문장에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드러나지만, 그 문장만큼 서사가 매끄러웠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는 2017년 3월부터 2019년 4월까지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로 일했다.
당시 내가 기사로 비중 있게 다룬 이슈 중 하나가 플랫폼 노동이었다.
플랫폼 노동은 일거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근로계약을 바탕에 둔 노동보다 자유롭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업체와 고용 관계를 맺지 않아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지만, 일할 시간이나 장소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비대면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플랫폼 노동자의 규모도 커졌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은 플랫폼 노동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플랫폼 노동자가 플랫폼 운영 기업 소속 직원처럼 일하면서, 근로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 작품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생계 위기에 내몰린 가족이 모두 플랫폼 노동에 뛰어들면서 겪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가족이 겪은 열악한 현실 묘사는 소설인데도 그 어떤 르포 기사보다도 절절하고 생생하다.
작가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플랫폼 노동의 디테일이 작품 전체에 넘쳐난다.
그럴싸한 문장으로 일천한 경험을 숨기고 실험이나 예술인 척 포장하는 '방구석 소설'과 비교해 묘사의 차원이 다르다.
먹고 사는 일의 치열함을 다룬 장강명 작가의 연작소설 <산 자들>, 부동산 시장의 현실을 다룬 조남주 작가의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가 실감 나게 눈앞에 그려질 것이다.
플랫폼 노동 관련 보고서나 교재로 사용해도 훌륭할 작품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훌륭한 점은 가슴 답답한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이를 어둡지 않게, 때로는 경쾌하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여성인데, 이들은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며 연대한다.
끈끈하지는 않아도 은근한 이들의 연대가 아름다웠다.
사이다 엔딩을 원한다면 이 작품을 읽지 마라.
그저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고 최선 아닌가?
생뚱맞은 표지 외에는 아쉬움이 없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