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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장편소설 『나의 돈키호테』(나무옆의자)

김호연 작가는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를 비롯해 모든 장편소설을 따라 읽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다.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자세와 재지 않는 문장에 스며들어 있는 온기를 사랑한다.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가 된 지금이든 덜 유명했던 과거에든, 여전히 나는 작가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는 독자다.

이번에도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 판매 중인 이 작품을 보고 바로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과거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인연을 맺었던 소년 소녀들과 가게 주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소년 소녀들이 다시 모여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돈키호테를 자처했던 가게 주인을 추적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작가의 작품답게 당연히 따뜻하고 이야기는 흥미로우며 쉽게 읽히고 희망적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메가 히트작인 <불편한 편의점>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상상하고 읽으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훨씬 커졌으니 말이다.

그만큼 볼거리도 많다.

마치 <망원동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옥탑방에서 벗어나 오만 군데를 쏘다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화동, 성심당, 대전천, 목척교, 진로집, 신도칼국수, 유성온천...

내 고향 '노잼도시' 대전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고향인 대전의 풍경이 겹쳐서 정말 반가웠고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아마도 '올해 대전시민이 함께 읽을 책'에 선정될지 모르겠다.

이뿐만 아니라 주인공 일행이 가게 주인을 추적하며 들르는 서울역 부근, 통영 다찌, 함덕 해변, 제주 선흘리도 모두 내게 익숙한 공간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함께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급기야 소설은 <돈키호테>의 본고장 스페인까지 무대를 넓히며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꿈을 향해 마음을 다해본 적 있느냐고.

지금처럼 사는 데 만족하느냐고.

식상한 질문인데 낯선 곳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니 새롭게 들린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에게 털어놓는 비디오 가게 주인의 고백을 읽고 울컥했다.


"여기 대형 서점 말이야, 마치 거대한 책들의 묘지 같아. 아주 서늘해. 책들이 저마다 자기 무덤 자리에 고이 누워 있다구. 웃기는 게 돈을 더 내면 큰 무덤을 주고 돈이 없으면 여기서 좀 누워 있다 파묘되어 죽은 듯 서 있게 되겠지. 나 있잖아, 그게 너무 무섭다. 내 모든 걸 담은, 세상을 뒤집을 책이 그냥 종이로 만든 좀비가 되어 여기 서 있게 된다고. 솔아, 너는 책을 안 내봐서 모를 거야. 내가 네 방송에 나간다고, 출판사에서 홍보하라고 해 쪼르르 간다고 책이 팔리겠니? 나는 이제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의 운명을. 이러다 서점에서 사라지고 대여점에 혹은 도서관에 꽂힌 채 가끔 돈키호테를 좋아하거나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선택해 주면 좋을, 그 정도 삶을 살려고 한다."(410페이지)


가게 주인의 고백이자 작가 본인의 고백일 테다.

작가인 독자라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읽고 나도 돈키호테처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책을 냈지만, 그 책들 모두 대형서점 신간 매대에 잠시 머물다가 '책들의 묘지'로 향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작가로 사는 걸 후회하진 않는다.

쓰는 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클로징 BGM으로 김동률의 '황금가면'을 재생하고 싶다.

나의 돈키호테
나의 돈키호테
박산호 장편소설 『오늘도 조이풀하게!』(책이라는신화)

나는 2000년대 후반 맥스 브룩스의 장편소설 <세계대전Z>에서 작가의 이름을 처음 봤다.

좀비 아포칼립스 마니아여서 관련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했는데, 작가가 변역한 <세계대전Z>는 내가 좀비물에 빠져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디스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카오스 워킹>에서도 작가의 이름을 역자로 봤다.

그 이름을 역자가 아닌 소설가로 다시 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화사한 표지를 가진 청소년 소설의 저자로 말이다.


다문화가정 차별을 비롯해 한부모 가정, 학원 폭력, 성소수자, 권력과 갑을 관계, 작은 사회 등 표지는 화사해도 다루는 주제가 꽤 무겁다.

이런 문제가 학교뿐만 아니라 학교 바깥에서도 벌어지는 사회 문제이기 때문에 마냥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로 읽히진 않는다.

곳곳에 반전과 복선이 깔려 있어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 수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성장 소설이긴 하지만 결말을 온전히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긴 애매하다.

그런 결말이 소설에 현실감을 높인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누아르'를 방불케하는 분위기가 연출됐을 테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인데, 사람은 평생 마음만은 나이들이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 아닌가 싶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인데, 내가 과연 청년 시절 아니 어린 시절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존재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나이 들어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짬밥이 있으니 생존의 지혜(라고 쓰고 잔머리로 읽는다)는 조금 늘었을지 몰라도, 학창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딱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어렸을 때 했던 고민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고민과 비교해 가볍거나 유치하지 않은 게 많다.


이 작품,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어른이 읽으면 "맞아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일 장편소설이다.

손원평 작가의 장편소설 <아몬드>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조이풀하게!
오늘도 조이풀하게!
정대건 장편소설 『급류』(민음사)

사다 놓은 지 꽤 됐는데, 이상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읽기를 미뤘던 작품이다.

책을 덮은 후에는 늦게 읽은 걸 후회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어질 인연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지독하면서도 섬세하게 보여주는 러브스토리다.

읽는 내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이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끌리게 하며, 시간이 어떻게 사랑을 성숙하게 변화시키는지를 곱씹게 만든다. 


내용과 결이 다르지만, 최진영 작가의 중편소설 <구의 증명> 속 커플이 페이지 위에 종종 겹쳐서(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은 <구의 증명>보다 훨씬 희망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개와 훌륭한 가독성(작품 제목처럼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이 매력적이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망설임 없이 급류로 뛰어드는 마음은 얼마나 지고지순한가.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다"며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256페이지)는 다짐이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훌륭한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어떤 사랑을 해봤기에 이런 연애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급류
급류
김하율 장편소설 『어쩌다 노산』(은행나무)

저출산을 우려하는 뉴스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이 문제는 기혼자와 미혼자를 나눠 판단해야 한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혼인 대비 출산 비율은 1.3명이다.

2023년 합계 출산율 0.72명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많다.

통계로 확인할 수 있듯이 기혼자는 여전히 아이를 낳으려는 경향이 크다.

다만 만혼 비율이 매년 높아지다 보니 과거보다 난임 부부와 노산이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작품은 그중 노산에 관해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계획하지 않았던 둘째 아이를 갖게 된 작가의 경험담을 그린다.

주인공 이름이 대놓고 작가 본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늦게 결혼해 난임 전문 병원에 다니며 어렵게 첫째를 가졌는데 둘째는 자연임신, 그것도 '고오령' 임신이라니.

첫째를 손이 조금 덜 가게 키워놓고 슬슬 자기 일을 해보려는 계획은 틀어졌는데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니 산넘어 산이다.


무겁게 흘러갈 수 있는 주제인데도,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시트콤처럼 유쾌하다.

온갖 자학과 농담과 드립이 난무하는 가운데, 작가 본인이 경험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이 생생해 눈길을 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의 고충, 임산부의 심리, 미지의 공간인 산후조리원에서 벌어지는 일 등을 남자인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작품은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엄살을 떨지만, 그래서 계획하지 않았던 기쁨을 만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경험자의 여유다.

늘 오가던 길도 새로운 골목을 거쳐 가면 여행처럼 흥미롭지 않던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모든 경험이 소설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다.

새삼 소설이 다른 이의 삶을 간접경험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값싼 수단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소설 속의 소설(장르가 다채롭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그중 일부는 나중에 새로운 단편이나 장편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벌써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 작품과 더불어 지난해 이맘때 출간된 김의경 작가의 장편소설 <헬로 베이비>를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노산을 다룬 이 작품과 난임을 다룬 <헬로 베이비>를 교차해 읽으면 대한민국에서 출산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형도가 그려질 테니 말이다.

소설은 종종 정부 기관이 작성한 그 어떤 보고서보다 생생하고 날카롭다.


어쩌다 노산
어쩌다 노산
차무진 산문집 『어떤, 클래식』(공출판사)

내가 클래식에 관해 아는 수준은 소박하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베토벤 교향곡 9번, 파헬벨의 카논, 비발디의 사계 등 남들이 다 아는 정도를 알 뿐이다.

그런 나도 한때 꽤 즐겨듣던 클래식이 있는데, 바로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다.

'메시아'를 찾아 듣게 된 계기는 남들이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영화 <첩혈쌍웅> 때문이다.


<쳡혈쌍웅>은 내가 지금까지 과장을 보태면 200번은 넘게 본 최애 영화인데, 그중에서 가장 명장면은 후반부의 총격 신이다.

주인공 두 명을 죽이려고 성당에 처들어온 악당이 성모 마리아상을 총으로 쏴서 부술 때, 절망하는 두 주인공의 클로즈업된 표정 위로 비장한 음악이 흐른다.

신시사이저가 연주하는 처연한 멜로디의 정체를 알아보니 '메시아'의 서곡 '신포니아'였다.

신이 필요한데 신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흐르는 멜로디가 '메시아'의 서곡이라는 아이러니.

내게 '메시아'는 2부의 합창곡 '할렐루야'보다 서곡 '신포니아'가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 산문집에 작가가 실은 이야기는 대체로 내가 경험했던 '메시아'에 관한 기억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산문집 속 클래식은 대부분 잘 알려진 곡들인데, 곡들에 관한 얽힌 사연은 무척 개인적이어서 진솔하고 흥미롭다.

폭우 속에서 옛 애인을 떠올리며 비탈리의 '샤콘느'를 소환하고, 겨울에 겪는 우울을 고백하며 쇼팽의 '녹턴'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의 뒷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새벽부터 순두부와 반주를 하려는 다급한 발길을 묘사할 땐 기가 막히게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기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작가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인 더 백>에 관한 사연에 곁들여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소개할 땐, 맡아보지도 못한 아들의 머리 냄새가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진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래식은 고상한 음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작가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돈 많은 자가 비싼 진공관 앰프로도 들을 수 있고, 가난한 자가 낡은 고무줄 둘둘 묶은 손 라디오로도 들을 수 있으며, 젊은이가 이어폰으로도, 어린이가 음악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게 클래식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끄러웠던 경험을 들어 베토벤을 열심히 듣는다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라고, 답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 들었던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태도인가.


이 산문집은 클래식에 관한 위대함이나 들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선 말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베토벤이 현악 사중주 14번에 적은 문구인 '쉬지 않고 연주하라'처럼 그저 살아 있으니 최선을 다해 살고자 애를 쓰는 거지.

그러다 보면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는 거지.


어떤, 클래식
어떤, 클래식
김보영 연작소설 『종의 기원담』(아작)

"걸작이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다.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 이후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한국 SF다.


이 작품은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가 로봇인 세상을 배경으로 살아있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를 철학한다.

작품 속에서 로봇은 당연히 자신을 생물이라고 여기고,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오염된 환경이 로봇에겐 최적의 환경이며, 산소와 유기물질은 로봇에게 위협이 되는 오염원이다.

지금 우리가 생존 문제라고 여기는 게 과연 다른 종에게도 문제일까?

작품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로봇의 시선과 심리를 집요하게 쫓으며 자아와 생존을 고민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모조리 뒤집어서 낯선 세상을 보여주는데, 그 세상이 낯설지 않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감탄했다.

로봇을 인간으로 바꿔 읽으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변하니 말이다.

차별 문제, 종교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인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로봇이 다시 인간을 되살려내 로봇의 멸망을 초래하는 순환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경이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는 로봇을 보며 떠올린 문장은 <아함경>에서 부처가 말한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였다.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종의 기원담
종의 기원담
이도형 장편소설 『국회의원 이방원』(북레시피)

한국 역사상 유일한 역성혁명을 주도한 혁명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 출신 관료, 형제는 물론 처가와 사돈까지 도륙 낸 냉혈한, 아들이 성군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명군.

조선 태종 이방원이 오랫동안 꾸준히 다양한 콘텐츠로 다뤄진다는 건 그만큼 그가 흥미롭고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방증일 테다.


만약 이방원이 대한민국에 부활해 정치인으로 활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작품은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다양하게 뻗어나간다.

작가가 오랫동안 정치부에서 일했던 일간지 기자 출신인 만큼 디테일이 좋다.

다양한 취재 경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었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지면 매력적일 작품이다.

국회의원 이방원
국회의원 이방원
김나현 소설집 『래빗 인 더 홀』(자음과모음)

이 소설집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 일하는 사람들이고 위태로우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이렇게 말하니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 노동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일하는 사람의 일상을 그리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진 않는다.

환상을 현실과 뒤섞어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을 수시로 연출하는데, 그런 연출이 현실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어쩔 땐 지독하게 핍진한데, 어쩔 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던져지면 소설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래빗 인 더 홀
래빗 인 더 홀
김혜나 중편소설 『그랑주떼』(은행나무)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이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섬세하면서도 담담한 발레 동작 묘사와 대비되는 주인공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내 지난 시간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었다.

발레에 맞는 발을 가졌는데 춤을 추지는 못하는 주인공이 과거의 상처를 용기 내 마주하고 높이 날아오르며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후회 속에 갇혀 살아가느냐, 아니면 과거를 경험이라고 부르며 앞날을 위한 발판으로 삼느냐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어렵지만 용기 내 후자를 선택한 사람에게 이 작품은 좋은 선물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은 꽤 좋은 선물이다.

마침 선물하기에도 딱 좋은 옷을 입고 나왔다.

그랑 주떼
그랑 주떼
김홍 장편소설 『프라이스 킹!!!』(문학동네)

문장과 이야기에 작가의 지문이 찍혀 있는 듯한 소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다.

여러 소설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뜯어와서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몰라도 김홍 작가의 작품은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마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처럼.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장사꾼, 베드로를 모시는 무당, 어떤 선거도 53%의 승률로 승리하게 해주는 성물 등.

이 작품 역시 기상천외한 등장인물과 소재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팔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기꺼이 구해주겠다는 장사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전개가 실소를 터트리게 하다가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함의가 무거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나는 이 작품이 자본주의, 아니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작품을 정치적인 소설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가족 서사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 작품을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소설도 아니고.

여러 독자가 모여 독서토론을 벌이면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해진다.


결론이 똑 떨어지는 소설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작품, 거두절미라고 재미있다.

굳이 의미를 찾으려 들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편소설이다.

마치 이병헌 감독의 최근작인 드라마 <닭강정>처럼.

<닭강정>의 유머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 작품도 반드시 마음에 들 것이다.


프라이스 킹!!!
프라이스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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