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넣었을 때는, '아아, 그때 비만 안 왔더라면...혹은 비가 왔더라면...' 식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 이야기도 실려있지만(히틀러 관련 이야기가 많기도 하다. 재앙같은 인간과 날씨 이야기가 맞물리니 이런 것도 기후재앙인가 별 생각이 다 든다...), 프롤로그 방향부터 생각과 좀 달랐고 읽다보니 옛날 옛적의 과학잡지 납량특집이 마음 한 구석에 떠오른다. 싸하다...
지구 온난화는 지금 살면서 피부로 느끼지만, 아직은 다행히 아예 마실 물과 곡식이 없는 사태는 경험하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그 정도 끔찍한 미래는 아직은 좀 먼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각종 사례들은 구체적이고, 일어난지 얼마 안 되는 것도 있어서 상당히 피부에 와닿게 끔찍하다. 읽다가 으음? 해서 찾아보니 경신대기근 시기도 있다. 기후 재앙이 세계를 갈아엎는 거야 수많은 책에 나오지만, 이렇게 보니 6도의 멸종 계열과는 또 다른 공포감이 있다. 그리고 이런 미친 재앙들 속에서 인류가 계속 존속이 되고 숫자도 늘어난다는 게 제일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 캘리포니아 부자들마냥 돈쓰듯이 물쓰는 입장도 아니고 소시민이 할 수 있는 환경 보호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좀 더 노력해야겠다. 뭐든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머리를 비우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렇게 새롭지 않은데, 뇌전증이나 치매, 전신마비 환자가 오히려 평온과 고요를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은 놀라웠다. 실제로 저자는 감금증후군 환자의 뇌에 센서를 부착해 이를 증명하기도 했다. 별 노력 없이도 쉽게 멍해질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저자에 따르면 대형 유인원이 대체로 갖는 협력 성향을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었던 초기 인류는 협업 파트너를 선택하면서 상호 존중의 감각을 키웠다. 그것이 ‘자연적인 2인칭 도덕’이 됐고, 이후 부족 집단이 등장하며 ‘우리’라는 개념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문화 규범이 체계화되면서 객관적 도덕 개념이 출현한 것은 훨씬 나중이라는 설명. 이렇게 기원이 다른 도덕들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있고 종종 그 양립 불가능성이 도덕적 딜레마의 원인이 된다.
일화 1: 고대 로마에 해시계가 도입된 건 기원전 3세기경이다. 당시 희극에서 어릿광대가 시계의 발명자를 저주하며 불평을 터뜨린다. “전에는 내 배가 세상 무엇보다 정확한 시계였는데, 이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시계의 허락 없이는 한 입도 못 먹는다.”
일화 2: 소인국에 포로로 잡힌 걸리버의 주머니에서 회중시계가 나왔다. 회중시계를 처음 본 소인들에게 걸리버가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소인들은 시계가 신(神)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알렉산더 데만트의 하드커버 『시간의 탄생』(북라이프)은 물리학이나 우주론에 대한 책은 아니다. 고대사 전문 역사학자인 저자는 시간과 인간이 맺어온 관계를 728쪽에 걸쳐 소개한다. 읽다 보면 위의 사례들처럼 일견 소소해 뵈지만 한편으로는 묵직한 에피소드들을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접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시간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달력과 시계는 우리 삶을 알차게 만드는 유용한 도구인가, 우리를 쉴 새 없이 다그치고 내모는 채찍인가.
책 자체는 특정 주인공이나 일정한 줄거리 없이 다소 뻣뻣한 백과사전적 구성이다. 그래서 이 밀도 높은 인문서는 단기간에 통독하기보다는 책장에 꽂아두고 ‘시간’ 날 때마다 빼들어 천천히 진도를 나아가는 게 오히려 괜찮은 독서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꼭 목차대로 소화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흥미로워 보이는 챕터부터 펼치는 것도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대, 시대정신, 종말론, 영원, 역사 등의 개념을 다룬 13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후기산업시대의 ‘후기(後期)’와 신자유주의의 ‘신(新)’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왜 지금이 후반기이며, 무엇이 새롭다는 것일까? ‘전환기’라는 표현은 한 시대를 그 자체의 상징과 특징이 없다며 깎아내리는 의미 아닐까?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현대에 올수록 점점 더 자주, 짧은 주기로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호들갑일까?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알아야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접하다 보면 자기 인식도 한 뼘 더 깊어지지 않을까.
○78쪽
완전히 잊어버린 바스크어이지만 거기에 까먹은 시간이 쓸데없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어는 그저 조금 맛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계기를 만들어 주기 마련이다.
○194쪽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로 언어를 바라보는 것이다. 일본어와 영어가 중심이고 거기에 겨우 구미나 아시아의 언어가 두세 개 추가될 뿐인데, 그것만으로 세상사를 헤아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틀려먹은 일이다. 그럴 때 코사어를 들으면 좋다. 언어를 바라보며 겸허해질 수 있다.
○212쪽
튀르키예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훌륭한 책이 있다. 만화가 다카하시 유카리가 지은 <터키에서 나도 생각했다>. 이 만화는 튀르키예를 여행하는 동안 그 매력에 사로잡혀 마침내 튀르키예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 읽다 보면 '메르하바' 앞에 펼쳐진 세계가 보인다.
○248쪽
성경 언어에 갇혀 버렸던 히브리어는 엘리에제르 벤예후다라는 초인에 의해 20세기에 다시 생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극도로 가난한 와중에도 모든 능력을 히브리어 부활에 쏟았다. 많은 사람의 몰이해에도 물러서지 않고 마침내 현대어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달리 들어 본 적이 없다.
○269쪽(옮긴이의 말-'외국어 건드리기'의 쓸모)
이 책에서는 언어가 100가지나 소개된다. 웬만해서는 언어 이름을 열 개 남짓 대기도 벅찰 텐데, 당연히 저자가 그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그 많은 언어에 손댄 것뿐이다. 외국어를 건드리기만 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쓸모없음이 우리의 삶을 아기자기하게 만든다. 오로지 쓸모만 좇는 삶이란 너무 퍽퍽하다. 바로 그렇기에 쓸모없음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고작 인사말 몇 마디나 하나, 둘, 셋 정도만 알지라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의 소소한 소통에서 작게나마 윤활유가 되니 그것도 쓸모가 없지 않다. 누구나 대문호나 달변가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들 제멋에 맞게 언어를 써먹으며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