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에게는 도시가 커다란 책과 같겠구나 싶다. 한국 학교 디자인, 초고층 빌딩, 상가 교회에 대한 분석도 신선하고, 서울숲과 로데오거리를 잇는 보행교는 진심으로 생기면 좋겠다. 11장 ‘포켓몬고와 도시의 미래’에 나온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도 흥미로웠다.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
유현준 교수의 책을 좋아한다. 크고 작은 공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에 이렇게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구나 하고 놀란다. 건축이나 공간에 관한 게 아닌 내용도 다 재미있게 잘 쓰신다. 골목이 많은 거리는 ‘이벤트 밀도’가 높고, 그만큼 보행자는 다양한 가능성과 주도권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한국인의 주거 환경이 바뀐 만큼 부엌을 창가로 옮겨야 한다거나 아파트 동과 동 사이를 띄우는 건축 규제를 손봐서 발코니가 많이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끄덕끄덕.
자본주의를 넘어 돈이 지배하는 황금만능주의적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몇십년전 프랑스에서 펼쳐진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살아낸 삶은, 돈과 지위 보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훨씬 더 필요하고도 소중하다는 당연한 진실을 퍼뜩 다시 깨닫게 한다.
그들의 삶이 때론 처참하고 비루하기도 했지만, 그 고된 삶속에서 서로를 위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생이 한없이 숭고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 다른 환경,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이질감이 없지 않지만, 이성과 감정을 가진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생명체로서, 그들의 인간적인 삶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에밀 아자르의 삶에 대한 깊은 고뇌와 다양한 경험으로부터 우러났을,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슬프고도 해학적인 장면들과 삶의 지혜를 간직한 표현들은, 읽음을 잠깐잠깐 멈추게 하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있다.
본인 강아지를 팔아 번 거액을 하수구에 버린 사건으로 로자 아줌마가 모모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며 카츠 선생님에게데려갔을 때 오히려 아줌마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한 의사의 모습에서, 지금 이시대의 어른들이 어린아이에 비해 오염되고 비인간적인 삶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아닐까하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고통을 함께 나눠 가질수 있으니 또 지금 결혼하면 서로 미워할 시간도 없으니 로자 아줌마와 하밀 할아버지의 결혼을 바라는 모모의 순수한 결혼관에서는 우리가 결혼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원하는지 그 큰 욕심을 들여다 보게 된다.
큰 죄를 짓고 남남으로 떨어져 살아온 기간마저도 아이가 본인이 가진 종교를 가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모 아빠의 종교적 집착을 보면서 또 그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에 빠지는 장면에서 과연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하게한다.
로자 아줌마가 많이 아파 힘들어할 때 집밖을 뛰쳐나가 상상속의 힘센 경찰을 불러내는 모모의 모습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노력이 우선이겠지만 때론 현실을 벗어나 이상을 꿈꾸는 상상의 나래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든 환경에서 삶의 깊은 애환을 느끼면서 고되게 살아가지만 인간적으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깊은 슬픔과 절망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오히려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살아갈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증오, 증오의 시대다. 온 세상에 타인에 대한 증오가 흘러 넘치고 있다. 여기서는 저들의 잘못된 선택이 정치권력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하고 저기서는 사회적인 신분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이 그 대상을 사물화시키며 물욕을 드러내고있다. 흥미로운 점은 저들이 말하는 증오의 대상이 언제나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항상 『그들』이라고 언급되는 존재의 오류로 인하여 자신들이 고통당하고 있다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마 자신들도 모르는 듯했다.
현재에 대한 안정, 사회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비전이 모두 결여된 이 세상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는 놀이는 징벌이다. 특정한 오류를 공개적으로 반박하면서 타인을 깔아뭉개는 행위는 자신이 올바른 행위를 한다는 느낌을 주게한다는 점에서 수지맞는 장사이다. 지불하는 대가는 없을뿐더러, 다수가 즐거워하는 놀이를 왜 그만둬야한단 말인가?
이런 놀이야 이 세상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씩 언급되지만 특히나 자꾸 맴도는 글이 하나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은 우익 자유주의적 프로파간다'라는 글이 작성되었다. 물론 조지 오웰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이 오류가 있다는 사실 정도야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리하여 명예로운 오웰의 지지자들이 결연히 일어나 해당 포스트에 잔인한 폭격을 가했다.
반박의 요지는 간단했다. 오웰의 글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자였음을 지적하는 글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옵션이었을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이 '고전'이지, 괴벨스나 즈다노프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은 정치적 글쓰기와 예술을 결합한 최초의 시도였다."라거나 "이 시대에 정치적이지 않은 글을 쓴다는 것은 허튼 소리다."라고 발언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읽고 빅 브라더(오웰의 키는 180cm를 훌쩍 넘겼다.)를 공격하는 오브라이언을 2분동안 증오하는 것이다. 그리고 2분이 지나면 어슬렁거리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 동안 풍요부의 배급량 감소, 애정부의 통제 강화, 평화부의 전쟁 준비에 대한 부조리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할 일을 열심히 한다.
여기까지 작성하니 나도 어느새 증오의 놀이에 합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만 한가지 첨언하고싶은 것이 있는데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류를 지적하는 행위가 말초적인 감정의 응어리를 해소하는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는 이상인 경우가 드물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의 표출이 마치 정당한 행위고 의미를 가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실제로는 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회람될 뿐인데도 말이다. 그러한 행위에서 증오란 현실의 부조리에 도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들이 그 문제점을 어느 순간 선언된 '약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해소시키려는 미완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분노가 항상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분노가 없었다면 조지 오웰이 '카탈루냐 찬가'를 쓸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조지 오웰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의용군으로 참전했을 정도로 지조있던 사람이었다. 허나 오늘날에는 용기는 커녕 자신의 얼굴과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채 인터넷에서만 숨어 누군가를 찌르기만을 원하는 기회주의자들만이 넘치는 판국이다. 이런 세상에서 오웰이 만약 살아있다면 그는 필경 '자신의 지지자'들을 더욱 증오했으리라.
만세전(萬歲傳)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이 배경이다. 나약하고 감상적이면서 차가운 주인공 이인화는 놀랍도록 현대적인 인물이어서 낯설지가 않다. 그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한심하다고 욕하기에는 주변 풍경이 아주 징글징글하게 암담하다. 그렇다 해도 아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는 이해가 안 가고. 냉담한 수준을 넘어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은 정도다.
28년 만에 다시 읽었고, 28년 전보다 더 슬펐다. 이번에도 28년 전과 마찬가지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었다. 28년 전보다 더 좋았다. 28년 전에 이상하게 여긴 부분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작품이 써진 시절과 지금의 한국 사회가 달라진 게 없다는 식의 관성적인 독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히 달라졌다. 나아진 부분이 있고 악화된 면도 있다. 그 다른 점, 우리 시대의 특징을 찾아야 한다. ‘값싼 기계 취급을 받았어, 인간이’라는 문장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은 다음 집으로 건너가기 전에 꼽추네 식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고, 아무도 울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무서움을 주었다.’
‘사람들은 집단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야.’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2022년 11월 22일(음력 10월 29일) 19시 29분에 '국자와주걱'에서 1시간 29분 동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석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믐밤 4회 이야기는 아래에 있습니다.
HJ와 한 달간 제주 여행을 하다 묵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발견하고 함께 읽은 책. 음식도 맛깔나게 소개하지만 함께 곁들이는 제주 생활 이야기도 재미있다. 정우열 작가를 좋아한다. 이후에 이 책에 나온 음식들을 찾아 읽었는데 덕분에 각재깃국과 빙떡을 알게 됐다. 우리 부부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감탄한 제주 요리는 몸국.
영어 제목은 ‘Stress and the City’.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전문 분야인 정신과 의사 저자가 도시인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분석하고 흥미로운 질문도 제기한다. 홍콩 사람들은 높은 인구밀도를 당연히 여기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도시마다 사람들이 걷는 속도가 다른데, 20년 전과 비교하면 평균 10퍼센트 빨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