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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설로지 『보라색 사과의 마음』(다산책방)

이 앤설로지에는 우울증을 테마로 쓴 단편 6편이 실려 있다.

누군가에게는 잔잔하게, 누군가에게는 격렬하게.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우울증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다.

6편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은 표제작인 최민우의 '보라색 사과의 마음'과 조수경의 '알폰시나와 바다'다.

아마도 두 작품 속 주인공의 경험이 내 경험과 상당 부분 비슷했기 때문일 테다.


두 작품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떠나보낸 주인공, 가깝게 지냈던 사람의 자살로 충격을 받고 방황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지만, 끝까지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공들은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별로 슬프지 않아 죄책감이 들고, 때로는 지독하게 슬퍼져 괴롭다.

때로는 지독하게 외로워 괴로워 하다가도, 때로는 외로워지기 위해 모든 사람과 멀어진다.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혼자 멀쩡하게 살아가는 게 옳은 일인가 의문이 든다.

주인공들의 심정과 내 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번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소설 읽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데 훌륭한 수단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읽을 때는 우울한데, 묘하게도 읽고 나면 우울함이 잦아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소설이 무언가에 정답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짊어진 이들이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인식해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지내니?"

소설의 역할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일기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이건 소설 같지 않은데?"라는 의문을 품었다면, 그 의문은 아마도 억측은 아닐 것이라고 그에게 슬그머니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어디까지가 사실이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앤설로지에 실린 남궁지혜의 단편 '당신을 가늠하는 일'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 대신하고 싶다.


"너무 날 확정 짓지는 마."/"가늠하는 정도가 좋은 것 같아"

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보라색 사과의 마음 - 테마소설 멜랑콜리
함정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문학동네)

다 읽고 나니, 홀로 여기가 아닌 먼 어딘가를 여행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용인', '스페인 여행', '해운대', '영도' 등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에는 지명이 제목으로 붙은 작품이 많다.

이 소설집에서 장소는 삶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의미를 깨닫는 장치로 쓰인다.

권지예 작가의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까이 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게, 멀리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작품 속 곳곳에 배경으로 깔린 장소는 읽는 내내 생생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해운대'처럼 내게도 익숙한 장소가 등장하는 작품에선 풍경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놀라웠다.


작가는 삶이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는 여행과 같지 않으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래서 우연처럼 깨닫고 만나는 사랑이 소중하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작가 자신과 고 김소진 작가를 교차해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자 소설집의 마지막에 실린 '영도'를 읽고 문득 든 생각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사랑을 사랑하는 것 - ��함정임 소설
앤설로지 『일상감시구역』(책담)

이 앤설로지는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다룬 SF 단편 네 작품을 담고 있다.


김동식 작가의 '살인게임'은 이 작품은 고객의 뇌를 백업해 건강한 신체로 이식하는 기술로 벌이는 일탈을 다룬 작품이다. 기술만 실용화된다면 얼마든지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했다. 단막극으로 만들면 괜찮은 작품이 만들어질 듯하다.


박애진 작가의 '목격자'는 복제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과 클론의 관계를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기술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더해지는데,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차별과 배제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 작품이었다.


김이환 작가의 '친구와 싸우지 맙시다'는 SF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동화 같은 작품이었다. 정명섭의 '코드제로 알파'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다음 내용을 예상하기 힘든 작품이었다. 마치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본 느낌이다.


앤솔로지는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단행본에 싣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인지. 힘을 뺀 작품이 많고 소재가 다양하다.

작가들의 부캐 활동을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일상 감시 구역
일상 감시 구역
앤설로지 『모두가 사라질 때』(요다)

정명섭 작가가 쓴 표제작 '모두가 사라질 때'는 슬래셔 무비 뺨치는 복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이 멸망할 날이 오면 소설보다 훨씬 잔인한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며칠 전에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위트홈'이 떠올랐다.

조영주 작가의 '멸망하는 세계, 망설이는 여자'를 읽으며 세계의 끝을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봤다. 세계의 끝이 다가온다면, 아마 나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혹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겠지.

마지막에 실린 김동식 작가의 '에필로그'에선 피식했다. 함께 한 작가들을 디스하는 단편이라니. 김 작가의 단행본에 접한 촌철살인이 여기에서도 빛을 발한다. 어쩌면 이게 진짜 종말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앤솔로지는 작가가 부담 없이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낼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사라질 때 - 지구 종말 앤솔러지
모두가 사라질 때 - 지구 종말 앤솔러지
김초엽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나는 문학기자 시절에 김초엽 작가를 취재로 만난 일이 있다.

당시 나는 김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기사로 다루면서, 소설에 '심장을 가진 SF'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온전히 내가 만든 수식어라고는 볼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렉트로닉 듀오 캐스커의 음악을 가리키는 수식어 '심장을 가진 기계음악'에서 따온 표현이니 말이다.

나는 묘하게 따스한 느낌을 주는 캐스커의 일렉트로닉 뮤직과 김 작가의 소설에서 비슷한 질감을 느꼈다.

소설을 읽은 뒤 캐스커의 음악과 함께 불쑥 '심장을 가진 SF'라는 수식어가 떠올라 그 수식어를 기사에 담았던 기억이 난다.

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 또한 또한 '심장을 가진 SF'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주인공은 대멸종 이후 겨우 재건된 생태계를 연구하면서, 생태계 재건에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수수께끼 식물의 기원을 추적한다.

소설은 잘못된 과학 실험에서 비롯된 더스트라는 미세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벌어진 대멸종 시대, 그 시대에 벌어진 살아남기 위한 아귀다툼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인류 대부분이 사망했고, 그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재앙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들의 후손으로서 일종의 원죄 의식을 가진 주인공은 온실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희망을 나누던 대안 공동체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살아남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생존을 자축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생태계 재건의 시작이 주변부로 밀려나 대안 공동체에 모여 연대하며 서로를 보듬어주던 약자들이었음을 밝혀나간다.


소설 속 상황이 묘하게도 최근 코로나 펜데믹 상황과 겹친다.

우리는 이미 소설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걸 목도했다.

펜데믹 초기에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던 대구를 향해 얼마나 많은 쏟아졌던 혐오 발언이 쏟아졌던가.

코로나 완치 후 직장과 사회에서 바이러스 취급을 받으며 차별을 받았다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일상이 무너질수록 관대함보다 배제와 혐오의 정서가 넘쳐난다는 걸 우리는 똑똑히 봤다.

코로나 펜데믹을 넘어 소설과 비슷한 대멸종이 다가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소설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소설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은 우리가 아는 얼굴과 다르게 보여 종종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얼굴은 우리가 아는 얼굴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얼굴이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봐야 우리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다.

약자를 배척하는 사회가 강자에게도 좋을 리가 없다.

살아남은 강자 사이에서도 상대적인 약자는 주변부로 밀려날 테고, 그런 사태는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반복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따뜻한 문장으로 독자에게 보내는 우려다.

지구 끝의 온실
지구 끝의 온실
이문열 장편소설 『시인』(민음사)

이 소설은 조선 후기 시인 김병연(김삿갓)의 생을 가상의 평전 형태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이문열 작가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힌다.

부끄럽게도 이 소설을 여태 읽지 못해 이제야 겨우 펼쳤다.


내 감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름다운 소설'이다.

작가는 역적의 자손으로 숨어 살던 김병연이 다시 신분 상승을 꿈꾸며 호방하게 시를 쓰던 청년기, 신분상승이 좌절된 뒤 세간에 잘 알려진 민중 시인으로 유랑하던 장년기, 더 시를 쓰지 않아도 삶 자체가 시가 된 노년기를 유려한 문장으로 펼쳐낸다.

특히 소설 마지막 부분의 노년기를 묘사한 문장은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아련했다.


이문열 작가의 문장이 훌륭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금 그 맛을 느꼈다.

한동안 요즘 한국 작가들의 소설만 집중해 읽다가 오랜만에 이문열 작가의 소설을 읽으니 그런 부분이 더 돋보인다.

이문열 작가만큼 눈에 잘 들어오고 읽을 때 맛깔나는 문장을 쓰는 작가가 극히 드묾을 말이다.

간만에 문장의 맛에 집중할 수 있어 좋은 소설이었다.


김병연의 생에 관한 작가만의 해석도 매력적이다.

작가는 큰 틀에선 역사와 민담을 바탕으로 김병연의 생애를 따라가지만, 그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는 김병연이 방랑하며 세상을 떠돌게 된 계기에 관한 다른 해석이다.

세간에는 김병연이 조부 김익순의 정체를 모른 채 백일장에서 조부를 탄핵하는 글로 장원을 받았다가 나중에 충격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가는 김병연이 조부의 정체를 알고도 조부를 탄핵하는 글을 썼다는 해석을 설득력 있게 내놓는다.

그리고 이 해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적의 자손이 돼 나라를 향한 충(忠)과 부모를 향한 효(孝) 사이에서 방황하는 김병연의 생애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소설 곳곳에서 김병연의 삶과 겹쳐 보이는 작가의 삶(워낙 유명하니 설명을 생략한다)은 소설에 현재성을 부여한다.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썼을 때 나이가 불과 43세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이더라...

부끄럽네.

시인
시인
장강명 산문집 『책 한번 써봅시다』(한겨레출판)

나는 유튜브에 올라온 장강명 작가의 글쓰기 강의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가끔 내게도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해줄 말이 많지 않아 난감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소설을 써왔다.

첫째 주제를 정한다.

둘째 마지막 장면을 정한다.

셋째 마지막 장면을 향해 열나게 쓴다.


이렇게 답하면, 상대방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정말 이렇게 써왔는데 어쩌라고!!

남들이 소설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면, 조금 폼 나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유튜브에서 글쓰기 강의를 이것저것 많이 찾아 시청했다.

장 작가의 글쓰기 강의도 그렇게 찾아 듣게 됐다.

그 강의가 책으로 나왔으니 사지 않을 수 있나.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둔 조언인 만큼 흥미롭고 잘 읽히는 책이다.

장 작가는 글쓰기에 공식이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글쓰기 방법을 제안한다.

개요는 어떻게 짜느니, 공모에 응모할 때 폰트와 제본은 어떻게 하느니 등 증명되지도 않고 지엽적인 설명은 이 책에 없다.

다수의 문학상을 석권한 유명 작가가 자신만의 글쓰기 비법을 공개했을 거라고 기대하며 책을 구매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읽기 전보다 글쓰기가 만만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듯이 골프가 취미인 사람에게 프로가 되기에 늦었는데 골프를 뭐하러 치냐고 묻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 땅에는 글쓰기에는 대단한 재능이 필요하며,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이상한 선입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런데 그 재능에 실체란 게 존재하나?

학창 시절 짧은 글짓기나 동시 쓰기로 과연 그 사람의 글쓰기 재능을 판단할 수 있나?

당장 나부터도 학창 시절에 글짓기에서 칭찬 한 번 듣지 못했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긴 글을 한 번도 제대로 써 본 일이 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다 보니, 나는 단편에는 부적합해도 장편에는 그럭저럭 어울리는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학창 시절에는 절대로 알 수 없었다.

장 작가는 당신이 타고난 재능을 가졌는 지 아닌 지는 작품을 몇 번 써봐야 안다고 부드럽게 조언한다.

쓸 사람은 쓰게 되고, 써야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이다.

글쓰기를 해보고 싶은데 망설이기만 해왔다면 일독을 추천한다.

용기를 주는 친절하고 사려 깊은 책이다.

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앤설로지 『떨리는 손』(사계절)

천문학자, 물리학자 등 과학자들이 직접 쓴 SF 단편을 모았다.

기대했던 대로 과학자들이 펼쳐낸 상상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로 옮기는 기술은 먼 우주를 동경하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확장한다. 이를 소설로 다루는 과정에서 폴리아모리(다자 간 사랑), 존엄사 등 민감한 주제가 더해져 논의의 영역을 넓힌다.

외계인이 화자로 등장해 제3자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며 여성에게 미뤄진 육아 문제의 공정성을 화두로 던지기도 한다.

산소가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불시착해 벌이는 생존 경쟁 묘사는 긴장감이 넘치고, 양자역학과 평행우주를 가상의 역사와 엮어 펼쳐내는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소설에 익숙한 작가가 아닌 만큼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아는 분야를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등장인물이 관련 과학 지식을 길게 설명하는 모습은,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적에게 자세하게 초식을 설명하는 무협지의 등장 인물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부분은 더 많은 작품을 쓰면 자연스럽게 고쳐질 부분이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더 많은 직업인이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소설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이야기다.

국내 소설이 독자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에서 문체, 문장의 미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이야기가 과연 독자의 마음을 얼마나 열 수 있을까.

당장 나부터도 방구석에서 출발해 온갖 고민을 하다가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오는 소설(특히 단편소설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하다)은 문장이나 구성이 아무리 좋아도 참아내기가 힘들다.


이건 꽤 승산이 있는 도전이다.

체육, 음악, 미술, 시와 달리 소설에는 천재가 없다는 게 이 바닥의 말이다.

엉덩이가 가장 중요하다.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출판사가 밀어줬던 소설도 아닌 『침묵주의보』의 드라마 판권을 팔았을 때, 나는 기획사에 왜 내 소설을 샀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론계를 드라마로 다루려고 관련 소설을 다 찾아봤는데, 내 소설보다 더 리얼하게 언론계를 묘사한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판, 공무원 세계, 중소기업의 실상, 교육현장 등. 주위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소재가 수두룩하다.

해당 분야에 깊이 발을 들였던 작가가 쓴 글은 그렇지 않은 작가가 쓴 글보다 디테일이 강하다.

간접 경험이나 머릿속으로 상상해 써 내려가는 글과 비교해 무게감이 다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던 직업인이 쓴 소설이 많아지면, 국내 문학 시장의 지형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떨리는 손
떨리는 손
앤설로지 『좀비썰록』(시공사)

'정철의 관동별곡', '만복사 저포기', '사랑 손님과 어머니', '운수 좋은 날', '소나기' 등 고전을 좀비와 엮어 비틀어 풀어내는 작가들의 입담이 즐거웠다.

읽으면서 장면이 하나하나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려져 오싹할 때가 많았다.


김치가 좀비 감염을 막는 특효약으로 등장하고, 좀비의 입장에서 좀비를 그려내기도 한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어머니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 뺨치는 여전사로 변신하고, 채식주의자 좀비라는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진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소나기'의 소녀와 소년의 사랑은 오싹하기보다 서글펐다.


소설 속 좀비는 언제 어떻게 전염을 일으킬지 알 수 없어 우리를 고립시키는 존재다.

좀비의 존재는 두렵지만, 그렇다고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소설 속 좀비를 코로나19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게 읽혔다.

코로나 펜데믹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좀비 썰록
좀비 썰록
송지현 소설집 『이를테면 에필로그 방식으로』(문학과지성사)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가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나아질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청년 세대의 불안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시로 등장하는 죽음, 가족의 해체, 불안정한 경제적 지위, 이어질 듯 말듯 겨우 연결된 관계 등 무거운 소재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내 생각보다 청년 세대가 훨씬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 시대를 통과하고 있구나.

책장을 덮으며 든 생각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마냥 우울하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스며든 유머와 따뜻함 때문이었다.

힐링과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이야기인데, 읽고 나면 묘하게 웃음을 유발하는 힘이 있었다.

우화를 읽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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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최하나 작가와 <반짝반짝 샛별야학>을 함께 읽어요.
6인의 평론가들이 주목한 이 계절의 소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있던 이 책, 망나니누나와 함께 되살려봐요.
[Re:Fresh]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어요. [Re:Fresh] 1. 『원미동 사람들』 다시 읽어요.
이런 주제로도 독서모임이?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그믐 라이브 채팅 : 5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편지가게 글월 사장님과 함께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수전 팔루디 『다크룸』(아르테)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2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0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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