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블로그
글 쓰기
448. 64 육사 (요코야마 히데오)

경찰 출입기자가 나오는 소설 중에 이보다 사실적인 작품은 보지 못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기자 초년병 시절 지방 경찰서 기자실에 가면 딱 이런 분위기였다. 한창 『재수사』를 쓰는 동안 읽은 소설인데 재미있었고, 감동 받았고, 응원과 위로도 얻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자세하게 현실적인 경찰의 모습을 그려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점, 집필 기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작품을 잘 써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64
64
447. 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경무, 인사, 비서, 감찰 등 경찰조직 내부를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집. 이색소재도 눈길을 끌고, 미스터리물로서도 깔끔하다. 씁쓸하지만 개성 있는 어른의 맛과 향. 좋아하는 작가다. 일본 원서와 한국 번역서의 표지 분위기 차이가 굉장함.

그늘의 계절
그늘의 계절
여러 줄의 우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3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여러 줄의 우연 / 글쓴이: 박현경(화가)


1.

모델의 움직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온 감정을 실어 팔을 뻗고 다리를 굽히고 목을 숙였다. 허공을 향해 던지는 눈빛에조차 어떤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받아쓰기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그날따라 내 손이랑 크레용이 뜻대로 잘 움직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누드 크로키를 마치고 청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에 혼자 웃었다.


2절지 수채화 용지를 펼치며 마음이 설렜다. 분무기 통에 물을 붓고 물감을 풀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은 후 뚜껑을 닫고 힘껏 흔들었다. 신나게 흔든 다음, 종이에 물감을 뿌렸다. 분무기 속 보랏빛 물감이 촤악촤악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한 해방감을 맛봤다. 보라색 물감이 없어 빨강과 파랑을 섞어 만든 물감의 색깔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물감이 흥건히 고이는 곳들은 고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곳들엔 물감이 마르면서 은은한 무늬가 생겼다.


크로키 북을 한 장씩 넘기며 ‘괜찮은’ 크로키들을 골랐다.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뒀다가 가위로 오렸다. 쓱싹쓱싹 잘리는 종이의 질감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인체 형상들이 종이 인형처럼 잘려 나왔다. 보랏빛 물감이 다 마른 2절지 위에 그 형상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봤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자리에 형상들을 풀로 붙였다. 형상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같이 몹시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혼자라고 느낄 때 부르는 노래’라고 제목을 붙였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힘들 때 부르는 노래’, ‘다시 일어설 때 부르는 노래’, ‘네가 보고 싶을 때 부르는 노래’ 등 노래 연작을 작업했다. 이 연작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이 연작을 작업하며 나는 우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모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더라면, 모델이 그 포즈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아예 다른 모델이 배치됐더라면, 아니면 내가 그날 크로키 모임에 가지 않았더라면, 물감 혼합이 다른 식으로 되었더라면, 이 지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 물감이 고여 무늬가 생겼더라면, 그 수많은 우연이 기가 막히게 서로 만나 주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

아기 고양이는 자꾸만 사차선 도로를 건너갔다 건너 왔다 했다. 그러다 어느 토요일 저녁, 차에 부딪혀 높이 날아 떨어졌다. 지나가던 여고생 M이 이 장면을 보았다. M은 고양이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고양이는 아직 살아 있었다. M이 신고해 고양이는 처음엔 시청으로 다음엔 반려동물보호센터로 옮겨졌다. 골반이 두 군데 부러진 채로였다. 


M의 담임교사였던 나는 별 생각 없이 M과 얘기를 주고받다가 이 고양이의 사정을 알게 됐다.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반려동물보호센터 측과 통화를 했다. 한 번 데려가면 절대 다시 데려올 수 없고, 치료하는 데 돈이 꽤 많이 들 거라고 했다. 데려가 치료해 줄 사람이 오늘 중에 나타나지 않으면 오늘 밤 안락사 조치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한 끝에 퇴근하자마자 남편과 반려동물보호센터로 갔다. 입양 신청서를 쓰고 봉순이를 데려왔다. 그렇게 봉순이는 우리 가족이 됐다.


그날 봉순이가 차에 치일 때 M이 그 길을 지나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나고 있었더라도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더라면, 보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내가 학교에서 M이랑 얘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수많은 우연이 기가 막히게 서로 만나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가족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3.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연진’에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아주 여러 줄의 우연이 있었어.”

빛나는 우연들이 만나 오늘이 되었다. 

오늘도 삶은 빛나도록 우연하다.


* 그림_박현경, 「혼자라고 느낄 때 부르는 노래」

446. 자유로서의 발전 (아마티아 센)

개발독재는 필요악일까? 민주주의는 사치재일까? 상당수 한국 지식인, 어쩌면 현대 지식인들이 은밀히 품고 있는 위험한 질문일 것이다(아니, 이른바 ‘중국 모델’이라는 것의 부상 이후에는 입 밖으로 꺼내 이야기해야만 하는 질문 같다). 이 책은 적어도 민주주의가 기근을 막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기근은 식량이 부족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논의하지 않은 채 ‘선진(developed)국’들이 모두 비슷한 것처럼 뭉뚱그려 말하곤 한다. 정의론이나 인권 개념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도 흥미로웠다.

자유로서의 발전
자유로서의 발전
445. 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종교는 종교 전쟁을 낳는가. 저자는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근대에 이르러 종교의 의미가 협소해지고 근본주의적이 되었다는 주장은 이전부터 암스트롱이 펼쳤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다시 활용한다. 세속주의의 폭력을 지적하기도 하고, 종교가 아니지만 종교 같은 성격을 띠는 이데올로기가 종교 전쟁과 흡사한 전쟁을 불러일으킴을 말하기도 한다. 근대 이후의 종교적 폭력과 종교 전쟁에서 종교를 제외한 부분을 살피기도 한다.

신의 전쟁
신의 전쟁
"벗이 감상 클럽"을 소개합니다.

벗이미술관과 그믐이 만나서 탄생한 새로운 콜라보 "벗이 감상 클럽"을 소개합니다.


“벗이 감상 클럽“은 벗이미술관<MONOLOG:독백>의 참여 작가님 3인의 이야기를 글로 들으며 전시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29일 동안 나누는 모임입니다.


정진성, 서순원, 한승민 작가님이 작업과 예술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임에서 들려주실 거에요.


관람 전이라면 전시에 관한 기대와 응원의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이미 관람하셨다면 감상평을 남겨 여러분의 예술 경험을 나눠 주세요.

작가님들께 궁금한 점도 무엇이든 물어봐 주세요.


벗이 미술관이 너무 멀어 전시를 관람하러 가기 힘드신가요? 괜찮습니다.

 “벗이 감상 클럽“을 통해 글로 작가님들과 함께 소통하며 <MONOLOG:독백>을 상상해 보는 즐거움을 누려 보세요.


글로 소통하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 작품 감상 "벗이 감상 클럽"을 시작합니다.


신청 기간: 23.03.23(목) - 03.27(월)

모임 기간: 23.03.28(화) - 04.25(화)

"벗이 감상 클럽" 함께 하기


★벗이미술관 X 그믐 특별 이벤트★

- (선착순) 모임 신청자 10명에게 벗이미술관 독백전 모바일 초대권을 드립니다.

- 모임 감상평을 뽑아 벗이미술관 독백전 도록을 드립니다. (최대 3명)



*벗이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아트브룻 (Art Brut) 및 아웃사이더아트 (Outsider Art) 전문 미술관으로 관 내의 모든 차별을 배제하고 다양한 배경의 인재들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이념으로 2015년 설립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합니다.  

<MONOLOG:독백> 전 더 알아보기

8회 그믐밤 뒷이야기

도대체 이 야심찬 기획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도스토옙스키의 3대 장편을 3개월 안에 다 읽자는! 이 어마 무시한 계획!

‘도박사’라는 이름을 처음 생각해 내신 수북강녕 책방지기님의 꼬드김에 넘어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안 읽으면 그냥 우리 둘이 읽으면 된다는 책방지기님의 호쾌상쾌한 결단에 3개월의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이름만 들어보고 책 한 권 안 읽어본 사람. 많지 않을까?

는 바로 저! 하하하. 

그래도 <죄와 벌>은 어떤 청년이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는 대략적인 줄거리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악령>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전혀 모르고요. <악령>은 영화 <엑소시스트>와 비숫할까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는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 느낌인가 싶습니다만…

 

다른 그믐밤은 제가 스탭과 진행 요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번 그믐밤은 참가자의 한 명으로 저 역시 열심히 읽고 달렸습니다. 

그믐밤 당일 방문한 수북강녕 벽에는 도 선생님의 커다란 포스터가 쫘악! 독서 토론을 하다 저게 누구냐며 작은기적 님은 흠칫 놀라시기도 하셨고요. 계속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에 다소 섬찟했습니다만 원래 도박판은 쫄리는 맛이지요? 

후시딘 모임지기님의 매끄러운 진행에 이끌려 홀린 듯이 저희들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2시간 토론이면 그래도 모자라진 않겠지 싶었는데요 역시나 등장인물 캐릭터 좀 나누니 1시간이 이미 훌쩍. 진공상태 님이 당일에 동대문 러시안 상가까지 직접 출동하셔서 구해오신 러시안 케이크와 과자를 먹으며 출출함을 달래고 2부로 이야기를 넘어갔습니다. 

2부에서는 이 책의 다른 제목으로 ‘죄와 벌과 구원’ ‘소냐의 사랑’ ‘불쌍한 사람들’ ‘살인과 8년형’ ‘인간의 조건’ 등등의 제안이 나왔고, 역시나 누구 한 사람 치우침 없이 다양하게 생각 나누는 시간이었어요. 각자의 한줄평을 나누며 기독교적 시각에서 바라본 구원의 의미, 현대 한국의 거주불안과 희한하리만치 비슷한 당시 러시아 시대상, 마광수 교수의 <죄와벌> 칼럼 등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상살이에 바빠 죽겠는 월요일 저녁 시간, 부동산 값 오르는 것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이러한 독서모임에 늦은 시간까지 참여하여 죄를 이야기하고 벌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왠지 모를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함께 해 주신 분들 모두 너무나 감사합니다!

온라인 그믐밤에서 끝까지 발제문에 답하며 생각을 나눠주신 온라인 도박사님들께도 큰 감사를 드립니다. 

고난의 행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악령>을 함께 읽으실 분들을 모집하오니 2탄에도 많은 참여 부탁드릴게요.  

 

 

444. 어두운 범람 (와카타케 나나미)

건조하면서 축축한 소설, 이라고 불러도 될까. 문장과 묘사는 건조한데,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정서는 축축하다. 좋은 축축함이다. 사회 구조의 병폐와 개인의 오래 묵은 감정들이 만나 벽에 곰팡이 피듯 악의가 자란다. 트릭의 허점을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나는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어두운 범람
어두운 범람
443. 북클럽 사용설명서 (변은혜)

저자는 30년 동안 꾸준히 독서 모임을 운영해 왔다. 그런 경험에서 나온 조언들이 도움이 됐다. 독서모임 멤버나 토론 수준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마음의 상처를 받지 말라는 것, 독서모임에도 생명 주기가 있어서 마무리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 운영규정이 있어야 모임이 활발해지고 건강한 긴장감이 생긴다는 것 등. 첫 번째로 필요한 운영규정은 참가 기준에 대한 것, 두 번째는 회원 자격 상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북클럽 사용설명서
북클럽 사용설명서
43. 비어리카노와 해녀 마을

2021년 제주 여행 첫 번째 숙소와 두 번째 숙소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좋았다. 첫 번째 숙소는 호텔이었고, 해안 절벽가에 위치해 있었고, 새 것 느낌이 나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복층 객실이었다.

두 번째 숙소는 가족이 운영하는 펜션 하우스였다. 첫 번째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주변 풍경은 꽤 달랐다. 땅은 낮았고 바다는 가까웠다. 펜션 하우스는 2층짜리 아담한 목조 건물이었는데 흰색과 녹색으로 도장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유럽풍을 내보려 했으나 결국 한국 사람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 분위기의 모습이었다.

널찍한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야자수와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한 켠에는 바베큐 공간이 있고 반대쪽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나는 그 개와 종종 놀았다. 우리가 머문 3박 4일 동안 개가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펜션 주인 가족을 탓할 수도 없는 게, 그들은 해야 할 할 업무가 너무 많았다. 2층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펜션 운영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방 일곱 개에 하루도 빠짐없이 숙박객이 든다 해도 벌 수 있는 수입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우리는 2층에 묵었다. 테라스에는 넉넉한 크기의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있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남색 바다가 정면으로 보였고 파도소리와 새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고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면 까치나 되지빠귀 같은 새들이 곁에 날아와 앉아 있다가 떠나곤 했다.

그 테라스만 한 카페를 찾을 수 없었기에 결국 체크아웃 할 때까지 우리는 다른 카페는 가지 않았다. 다른 이용객들과는 참 달랐다. 사람들은 오후에 차를 몰고 와서 저녁에 바비큐를 해먹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우리는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끼니때가 되면 바닷가 산책로를 걸어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특히 노을이 질 때는 꼭 나갔다.

그렇게 회국수, 해물파전, 전복돌솥밥, 전복해물뚝배기, 족발, 보말칼국수, 고기국수를 먹었다. 다 맛있었고 모든 가게가 친절했다. 회국수와 해물파전을 먹은 바닷가 식당은 전망이 끝내줬고 족발가게에는 젊은 해군 병사들이 벽에 남긴 낙서가 재미있었다. 제주 김만복김밥은 포장해 와서 숙소 테라스에서 먹었다.

주변에 딱히 관광 지점은 없어서 그냥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포구에 가보기도 하고 해군 기지 근처까지 가보기도 했다. 포구나 바닷가 바위 아래에서 내려다보면 몇 미터 바닥이 잘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다. 체크아웃을 하는 날에는 멸치 떼가 해안으로 밀려 들어왔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바위 사이에 갇힌 멸치들을 잡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다른 보행자를 앞지르지 않았고 다른 행인들은 우리를 부지런히 추월했다. 우리보다 걸음걸이가 느린 사람들은 딱 한 쌍 보았다. 저녁 시간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젊은 남녀가 많았고, 벤치에 앉아 혼자 기타를 치며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도 있었다. 개들은 경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땅과 풀의 냄새를 맡는 데 열중했다.

우리도 석양을 바라보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HJ는 이곳에 와서야 제주공항에 내린 뒤 처음으로 시간이 남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제주도 푸른밤〉을 여러 번 불렀다. 최성원 가수가 그 노래를 만들 때 살던 친구 집이 지금 서복전시관 자리라고 했다. ‘푸르메가 살고 있는 곳’라는 가사에서 푸르메가 그 집 딸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푸르매’가 정확한 이름인데 가사를 잘못 적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고 했는데 해녀들이 잠수복을 입고 물질을 하거나 길을 걷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해녀들은 매우 자신감 있고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소라 요리 전문 식당 주인이 걸어가는 해녀에게 “오늘은 미역이랑 해삼”이라고 말하면 그 해녀는 “미역이랑 해삼”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마치 관제탑과 조종사의 교신 같았다.

야외 벤치에서 비어리카노와 남산 에일을, 족발집에서 테라를 마셨다. 비어리카노는 스타우트에 콜드브루 커피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맥주인데, 몇몇 호프집에서 선보이는 더치 맥주보다 더 낫다고 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신제품 기획에 참여한 유동커피는 이중섭 거리에 있는 유명한 카페라고 한다.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거리를 걸었네.

‘나에게는 수천 번째 커피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원하던 한 잔의 커피일지 모른다.’ 비어리카노 캔 라벨에 그런 문구가 인쇄돼 있다. 이게 감동을 주자고 고른 문구인지, 웃자고 적은 패러디인지 알 수가 없다. 비어리카노라는 제품 이름도 좀 당황스럽다. 가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면 온갖 감성 글귀가 가득했는데 처음 몇 번은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느끼해서 어지러웠다.

 

커피 맛 맥주

시간 감각이 흐려지네

해녀 마을 느린 삶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사토루가 쓴 『나는 왜 나에게만 가혹할까』와 독일 뇌과학자인 게랄드 휘터의 『존엄하게 산다는 것』을 읽었다. 『나는 왜…』는 목차를 보고 마음이 동해 펼쳤는데, 막상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조언에 방점이 찍힌 책인데 내가 원한 것은 그 조언들에 대한 정신의학적인 근거였다.

책 앞부분에 죄책감 지수 자가 진단 테스트가 있다. ‘예, 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질문 19개에 대해 ‘예’라고 답한 횟수가 7개가 넘으면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나는 무려 17개에 해당했다.

『존엄하게…』는 뭔가 간질간질했다.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지만 끝까지 안 하는, 혹은 못하는 느낌. 통섭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모자란다. 같은 저자가 좋은 삶을 주제로 쓴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도 실망한 기억이 있다.

1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495051525354555657585960616263646566676869707172737475767778798081828384858687888990919293949596979899100101102103104105106107108109110111112113114115116117118119120121122123124125126127128129130131132133134135136137138139140141142143144145146147148149150151152153154155156157158159160161162163164165166167168169170171172173174175176177178179180181182183184185186187188189190191192193194195196197198199200201202203204205206207208209210211212213214215216217218219220221222223224225226227228229230231232233234235236237238239240241242243244245246247248249250251252253254255256257258259260261262263264265266267268269270271272273274275276277278279280281282283284285286287288289290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301302303304305306307308309310311312313314315316317318319320321322323324325326327328329330331332333334335336337338339340341342343344345346347348349350351352353354355356357358359360361362363364365366367368369370371
[책 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김영사/책증정]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닥터프렌즈의 오마이갓 세계사>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1. 속도의 안내자⭐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북토크/책 증정]경제경영도서 <소비 본능>같이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중간 참여할 수 있어요!
🎬 독립 영화 보고 이야기해요.
[인디온감] 독립영화 함께 감상하기 #1. 도시와 고독[그믐무비클럽] 5. 디어 라이프 with 서울독립영화제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조영주 작가가 고른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최하나 작가와 <반짝반짝 샛별야학>을 함께 읽어요.
6인의 평론가들이 주목한 이 계절의 소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있던 이 책, 망나니누나와 함께 되살려봐요.
[Re:Fresh]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어요. [Re:Fresh] 1. 『원미동 사람들』 다시 읽어요.
이런 주제로도 독서모임이?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그믐 라이브 채팅 : 5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편지가게 글월 사장님과 함께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수전 팔루디 『다크룸』(아르테)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2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0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
모집중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