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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2 (나태주 시인)

풀꽃2

                     나태주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연애의 법칙 ( 진은영 시인)

연애의 법칙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2008년)

사계 (강현욱)

사계

                    강현욱 

 

봄의 그대는 벚꽃이었고

여름의 그대는 바람이었으며

가을의 그대는 하늘이었고

겨울의 그대는 하얀 눈이었다.

그대는 언제나

행복 그 자체였다.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박노해 시인)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박노해 

 

일단 꼬박꼬박 밥 먹고 힘내기 

깨끗이 차려 입고 자주 웃기

슬프면 참지 말고 실컷 울기

햇살 좋은 나무 사이로 많이 걷기

고요에 잠겨 묵직한 책을 읽기

좋은 벗들과 좋은 말을 나누기

곧은 걸음으로 다시 새 길을 나서기

그릇은 필요 없어 (서효인 시인)

그릇은 필요 없어

                       서효인


선배는 술에 취하면 술집의 그릇을 가방에

넣었다 음식찌꺼기를 휴지로 훔쳐내고 책과 책 사이에

가지런히 넣었다

절도 있는 절도에

아르바이트생도 못 본 체 해주었다

예의 관습 도덕 법률 전통 같은 거 다 모르겠고

먹는 게 먼저다 아까까지 생굴이 담겼던 그릇 위에

아름다운 문장을 써 본다, 굉장히 멋진 말인데 해석하자면

맛있어 보이네, 배불러 죽겠네, 같은 거

선배는 술이 깰 즈음이면 가방에 그릇을 보고 놀라지

나는 그런 선배의 뻔뻔함에 놀란다 먹는 게 그리 중하면

더 열심히 사세요,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그릇은 중고나라에서 책보다 비싸게 팔렸다

이제 누구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아

이제 누구도 불쌍하게 생각지 않아

그릇을 훔친 좀도둑으로 볼 뿐이다

좀이라고 하여 죄가 작은 게 아니라서

무거운 조서를 간단히 쓰며 우리는

국가의 거대한 행정체계에 속해서 옴짝달짝

못하고 아까 우리의 찌꺼기를 마저

치우던 어린 학생의 신고로 지구대에 잡혀 와

엊그제 해동된 굴처럼 흐느적거리며

아름다운 문장을 적어 본다, 굉장히 멋진 말인데 이를테면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그러하지 않겠습니다, 같은 거

더 이상의

그릇은 필요 없었다

새로이 무엇을 담을지

모르겠어서

상추 (박소란 시인)

상추

                       박소란 시인

​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지려고 

 

슈퍼에서 한봉지 천오백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46~47쪽)

망한 사랑 노래 ( 문정희 시인)

망한 사랑 노래

                   문정희 

 

요즘 내겐 슬픔이 없어

무엇으로 사랑을 하고 시를 쓰지?

슬픔? 그 귀한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지

창가에 걸어 두고 흐린 달처럼

조금씩 흐느끼며 살려고 했는데

슬픔이 더 이상 나를 안아 주질 않아

멍할 뿐이야

행복도 불행도 아니야

서양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아

말하자면 폭망한 것 같아

슬픔은 안개 속에 서걱거리는 강철

그것으로 50년이나 시를 썼으니

내가 나를 뜯어 먹었으니

당연히 망하지

가시도 뼈도 없어

상처도 딱지 진 지 오래

베레부렀어

손에는 허망을 쥐려다가 찔린

핏방울...... 오오...... 향기롭고 독한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내가 본 것이 본 것이야

슬픔? 나를 두고 어디로 갔지?

아니, 슬픔이 뭐야

시? 망한 사랑 노래야 

 

-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시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메리크리스마스 (박소란시인)

메리크리스마스

                   박소란시인 

 

내가 가진 가장 두꺼운 옷,

옷을 떠올린다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나에겐 오래된 점퍼가 하나 있고 장롱 가장자리 때를 기다리듯 잠잠히 걸려 있고 

 

​언젠가 세일 중인 백화점 앞 매대에서 고른 것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하얀 패딩에 하얀 모자가 달린 것 앞자락 플라스틱 단추가 어느 선한 이의 눈망울처럼 빛나는 것 

 

​눈 쌓인 창밖으로

처연한 햇살이 젖은 성냥을 만지작거리는 빌딩 너머로 

 

​영하의 날은 계속될 것이다 옷,

옷을 떠올린다

그것을 입으면 춥지 않으리 

 

​뒤뚱거리며 걷다 무심코 디딘 빙판에 벌렁 나동그라진대로 한참을 그대로 멈춘대도

춥지 않으리 

 

​슬프지 않으리, 보세요 엄마 눈사람이에요 완전히 얼어붙은

사람이에요 공연히 빈 놀이터를 기웃대던 아이는 신이 나 웃고 

 

아이도 엄마도 춥지 않으리

장롱 속 옷을 꺼내어 입기만 하면





졸업장 - 안동찜닭 생각( 이영광 시인 )

졸업장 - 안동찜닭 생각 

 

               이영광 시인 

 

 

학력고사를 두어 주 앞두고 내가 또 칵 죽고 싶어져

학교 안 가고 술 취해 드러누워 있을 때,

벼 타작하던 아버지가 찜닭을 들고 자취방엘 왔다

삼부자가 그눔의 학교 졸업장 하나 못 받으면 무슨 망신이냐고,

이거 먹고 내일은 꼭 가라고 맛있는 거라고 

 

 

살림 잘 들어먹고 공납금 잘 안 주던 이상한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나는 말없이 그걸 먹으며, 찜닭이 맞나 닭찜이 맞나

소주나 한잔 더 했으면 좋겠네,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도 연애도 안 되어 그만,

집이고 학교고 뭐고 멀리멀리 탈출해버리고 싶던 시인 지망생, 하지만 찜닭에 누그러진 열아홉

아버지 경운기 몰고 육십리 길 돌아가자 포기했던 단원을 다시 펼쳤다 

 

 

안동고등학교 일 학년 중퇴생 아버지는 십년째 고향 앞산에 누웠고

이 학년 중퇴생 형과, 그 밤 열심히 찜닭 뜯던

누이는 민중으로 돌아가

안동 찜닭으로 부산서 먹고들 산다

닭하고 무슨 원수가 졌는진 몰라도

개업 축하하러 와 다시 찜닭 앞에 앉고 보니,

어느덧 삼십 년이 흘렀구나 

 

 

안동고등학교 삼십삼 회 졸업생, 졸업장 너무 많아 탈인 나는

누이가 익혀 낸 찜닭을 먹고는 있지만

내가 삼십 년 전 그 밤으로 돌아가 있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고는 있지만 여전히

시도 연애도 안 돼 칵 죽고 싶은 오십,

닭찜이 맞나 찜닭이 맞나 생각 중인 걸 모를 것이다 

 

 

뭐가 맞니껴, 물으면 나의 귀신 아버지는 술에 절어

횡설수설할 것이다, 그냥 맛있는 거라고, 학교는 가야 한다고

어쨌든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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