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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한강 작가는 이제 취향을 떠나 의무감으로 작품을 읽어야 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나 역시 의무감으로 신작이 나오면 사는데, 이상하게 손은 가지 않는 작가였다.

<소년이 온다> 외에는, 읽은 뒤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만 머리에 남는 기분이 들어서랄까.

이 작품도 작년에 나오자마자 샀는데 이제야 펼쳤다.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 읽으면 아름답다.

묘사도 생생해서 냄새와 온도가 느껴진다

그 문장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한 장 한 장의 풍경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풍경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보니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거두절미하고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작가 또한 쓰기 정말 힘들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이 작품으로는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평론가든 누군가는 여기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겠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2년 전 퇴사 후 내가 굳이 매달려야 이어질 인연을 대부분 끊어냈다.

끊어내도 딱히 불편하진 않은 데다, 살아남기 위해 할 일도 많은데 그런 인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말이다.

내가 문학 담당 기자로 기자 커리어를 마치기 전, 노벨문학상 관련 기사를 쓸 때 많이 참조했던 사이트가 영국의 도박 사이트 레드브록스다.

발표 직전에 한강 작가도 도박 사이트에 이름이(말석이긴 하지만) 오르는 걸 보고 나중에 뭔가 일이 일어나긴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신작을 더 기다렸다.

아무래도 한강 작가는 나와 이어질 인연은 아닌가 보다.

여기까지가 내가 매달리는 노력의 마지막이다. 

어쩌다 보니 작품 제목과 반대가 됐네.


하지만 문장 하나는 건졌다.

이 문장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이경준 평전 『딥 퍼플』(그래서음악)
  •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붙잡고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시간은 딥 퍼플의 모든 스튜디오 앨범과 라이브 앨범, 레인보우의 앨범 몇 장, 화이트 스네이크 앨범 몇 장, 토미 볼린 솔로 앨범 등의 러닝 타임을 모두 합친 시간보다 더 길다.

얼추 계산해 보니 일주일가량 걸렸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 읽기였다.


딥 퍼플의 대표곡이나 대표 앨범 정도는 들어봤지만, 나머지는 지금까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핑크 플로이드에 쏟았던 열정이나 레드 제플린 듣기에 비하면, 딥 퍼플에 관한 내 관심은 거의 무관심이나 다름없었다.

왜 딥 퍼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인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반 때문이었다.

'레드 제플린보다 하드하고 블랙 사바스보다는 빠른데' 거기에 리드 기타 수준으로 끼어드는 건반 연주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을 때면 그렇게 아름다웠던 건반 연주가 왜 딥 퍼플을 들을 때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라이너 노트 삼아 딥 퍼플의 모든 앨범을 다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필 일정과 무관한 시간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 책과 더불어 딥 퍼플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방대한 해외 보도, 인터뷰, 다양한 참고 자료를 활용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앨범을 평가하는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공연장에서 다리가 부러진 프랭크 자파, 재결성 투어 도중 호텔에서 새벽에 난동을 부리다가 덩치가 들어오자 겸손해지는 밴드 멤버 들의 모습 등 다채로운 뒷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마치 딥 퍼플의 투어를 따라다닌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밴드의 음악의 원형을 딥 퍼플을 통해 뒤늦게 접하며 부끄러움도 느꼈고.

 

아쉬움이 없진 않다.

후반부 서술이 전반부보다 조금 헐겁다.

이를 저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스티브 모스가 리치 블랙모어보다 딥 퍼플에 오랜 기간 적을 뒀어도, 딥 퍼플의 전성기는 리치 블랙모어가 적을 뒀던 기간에 집중돼 있으니 말이다.

21세기의 딥 퍼플보다 20세기의 딥 퍼플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딥 퍼플의 최근 행적까지 간략하나마 빠짐없이 다뤘다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꽤 괜찮은 작품을 꾸준히 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처음 알았다.

나처럼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부지런히 활동했음을 몰랐던 사람도 부지기수일 테니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테다.


이 책의 출간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고 본다.

일부 아이돌의 앨범 외에는 유의미한 양의 피지컬 앨범이 안 팔린 지 오래된 나라, 종이책도 일부 베스트셀러 외에는 1쇄 판매를 못 하는 나라, 록을 듣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록 뮤직 아티스트의 평전, 그것도 한국인 저자가 직접 쓴 평전을 출간한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니 말이다.

이런 무모한 시도를 멋지게 해 준 저자와 출판사에 경의를 표한다.

딥 퍼플 Deep Purple
딥 퍼플 Deep Purple
윤치규 소설 『러브 플랜트』(자음과모음)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온도를 가진 연애소설 모음이다.

단편 세 편을 모은 책이니 양은 가볍지만 내용까지 가볍진 않았다.

작가는 연인, 신혼부부, 돌싱을 각 단편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랑이라는 감정의 밑바닥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주인공들은 선량해 보이지만 사랑에 있어선 꽤 이기적이다. 

연인의 비혼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 이유에 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사랑으로 연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결혼했다가 혼란을 겪으며, 자기 마음대로 결혼을 밀어붙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이혼을 결정한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는데 계획대로 하려다가 괴로워한다.

주인공들을 작가는 우리가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이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는지 보여준다.


연애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이 일치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새로운 연애를 할 때면 지난 실패를 까맣게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표제작 '러브 플랜트'에서 식물을 키우듯 조심스럽게 새로운 사랑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이혼남을 보고 든 생각이다.

러브 플랜트
러브 플랜트
최유안 장편소설 『백 오피스』(민음사)

직장을 배경으로 다룬 밀도 높은 장편소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유지하는 구성 때문에 마치 스릴러 드라마 한 시즌을 감상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은 행사 기획, 호텔,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여성 직장인 셋의 시점으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직장은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돈을 버는 공간이 아니다.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고, 그 안에서 마주치는 동료 직원은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온전히 익숙해질 수 없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직장의 속성을 잘 보여주면서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해 현장감을 높인다.


특히 이 작품은 호텔에서 고객을 대면하는 프런트 오피스 뒤에서 마케팅, 객실 예약, 행사 개최 등을 담당하는 백 오피스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 공간을 주요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이는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풍경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조명하는 구성이 기존 직장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에 조직의 이익과 구성원의 이익, 서로 다른 조직 사이의 이익,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모습의 생생한 묘사는 범죄물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넘친다.


매우 흡인력 있고 흥미로운 장편소설이었다.

내가 거쳐온 직장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편으로는 조직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씁쓸해졌다.

조직에 충성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직장에서 삐끗해도, 다른 길로 걸어도, 안 죽는다.

백 오피스
백 오피스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창비)

황정은 작가가 지난 2010년 민음사에서 출간했던 첫 장편소설을 창비에서 복간했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이번 기회에 사서 읽었다.

따뜻한 질감과 섬세한 감정 묘사는 좋았지만 글쎄...

나는 <연년세세>와 <디디의 우산>이 훨씬 좋았다.

두 작품을 읽은 후에는 "나중에 거장 소리를 듣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예전부터 워낙 평이 좋았던 작품이어서 어떤 부분이 좋은지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장편보다는 단편과 중편이 훨씬 나은 작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백의 그림자
백의 그림자
지영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광화문글방)

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모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낯선 언어를 모어처럼 말하게 된다면?

이 작품은 이런 기발한 설정을 바탕에 두고 말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전 세계에 만연한 다양한 혐오를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가 있다.

그녀는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테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총상을 입은 뒤 사경을 헤맨다.

수십여 일 만에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놀랍게도 모국어인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이 같은 그녀의 증상은 '수키 증후군'으로 불리게 되고, 전 세계 여러 테러 현장 및 분쟁 지역 생존자에게 무작위로 발생한다.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벨리즈 크리올을 말하고, 중국어를 잃어버리고 조지아어를 말하는 등 새롭게 구사하는 언어가 어떤 언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발현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신체의 일부가 먼지로 변해 사라진다.

전 세계는 '수키 증후군'을 질병으로 정의하고, 발현 경로를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떤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입양돼 미국인으로 살다가, 느닷없이 한국어를 말하게 돼 한국에서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과 상관없는 여러 과정을 거쳐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고립되는 수키의 험난한 여정.

이 작품의 서사는 대부분 다큐멘터리 감독인 화자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수키와 관련한 사람을 만나 진행한 인터뷰와 언론 보도로 진행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그린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Z>와 거의 비슷한 서사 진행인데,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소설에선 처음 보는 서사 진행이어서 신선했다.

기발한 설정뿐만 아니라 이 같은 서사 진행도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겠다 싶었다.


이 작품은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바뀌면 인간의 본질도 바뀌는가를 물으면서, 동시에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지 집요하게 탐구한다.

내겐 전자보다 후자가 더 비중 있게 다가왔다.

'수키 증후군' 발현자(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땠는지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경험했으니 말이다.

스포일러여서 더 언급하지 않겠지만, 작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 '수키 증후군' 발현자들이 사실은 사라진 게 아님을 작품의 마지막에서 강하게 암시한다.

작품 중간에 우리 모두 별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와 연결해 다시 읽으니 큰 그림이 보였다.

고독과 단절이라는 붓질로 그려낸 인간애라는 밑그림 말이다.

좋은 장편소설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성의 없는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여백의 미라기 보다는 그냥 여백 아닌가.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작 중 가장 성의 없는 표지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올해나 내년쯤에 수림문학상이 폐지되지 않을까 싶다.

장편소설 공모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인 데다, 당선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화제가 되는 경우도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창비장편소설상도 사라졌고, 문학동네가 주관하던 여러 장편소설상도 문학동네소설상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나.


이 작품은 명색이 큰 상금을 주는 장편소설 공모의 수상작인데도 지나치게 묻힌 감이 있다.

주최 측이 푸시를 제대로 안 하는 게 보이고, 출판사도 대형 문학출판사가 아니어서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형 문학출판사와 출간을 연계했다면 더 뽀대나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장편소설 공모 수상작 중 최고였다. 

이렇게 묻힐 작품은 아니라고 보는데 안타깝다.

리뷰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나라도 읽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마리 장편소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문학사상)

작품의 주된 배경이 대한민국이 아닌 시베리아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한민국, 아니 집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 부지기수인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광활하고 낯선 공간을 소설로 다루는 시도를 하다니 반가웠다.

이 공간에 북한 출신 젊은 지식인과 벌목 노동자, 대한민국 출신 초보 사업가, 러시아 현지인 등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애를 쓴다.

등장인물 모두 비슷한 또래이지만,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에 속해 있어서 저마다 다른 고민을 짊어지고 있다.

각자의 다른 고민은 각자의 다른 상황과 맞물려 갈등과 위기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철저한 취재에 바탕을 둔 현장감이다.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목재 차이에 관한 설명, 목재 업계의 현실, 시베리아의 벌목 현장, 북한의 외화벌이 벌목공의 비참한 현실, 그들을 착취하는 러시아인과 조선족, 실제 귀에 들리는 듯 실감 나는 북한말 등...

진짜 리얼하다.

이렇게 취재가 잘 이뤄진 장편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실제로 작가가 시베리아 벌목 현장을 수차례 취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장감은 역시 취재 한만큼 나온다.

얼어붙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지만, 이야기의 온도는 뜨겁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결국 실패하는데도 실패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뜨거운 온도 때문일 테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배경과 심리 묘사는 최근에 나온 그 어떤 한국 소설보다 실감 나지만, 그에 비해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약하다는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등장인물 간의 사랑과 인간애를 넘어 조금 더 묵직한 메시지를 담았다면 훨씬 무게감 있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비슷한 배경을 다룬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 이상으로 훌륭한 작품이 됐을 텐데.

덩치를 훨씬 키울 수 있었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 아름답지만 실패한 젊은이들의 눈부신 이야기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 아름답지만 실패한 젊은이들의 눈부신 이야기
박애진 장편소설 『명월비선가』(아작)

작년 말에 황모과 작가의 소설 <클락워크 도깨비>를 읽고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쓴 스팀펑크에 관심이 생겼다.

신간을 뒤지다 보니 아작 출판사에서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이라는 기획으로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작품은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의 첫 단행본이다.


엄격한 금욕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직접 기생을 관리하는 관(官),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면서도 첩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대부,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종이 내면화된 여성들. 

작품 속 조선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작품은 기생 명월의 눈으로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섬세한 필체로 짚는다.

증기를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설정은 시대적 배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치 역할을 한다.

증기 비행선이 조선의 하늘을 날고, 로봇이 기생 대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풍경을 상상해보는 일이 흥미로웠다.

여기에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 퀴어 서사까지 어우러져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스릴러인 척하는 애절한 러브스토리다.


명월은 만인의 흠모와 멸시를 동시에 받고, 비천한 신분임에도 사대부 못지않은 학문과 기예를 닦은 지식인이다.

사극은 신분제 사회를 전제로 깔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갈등을 심화해 보여주기에 좋은 틀이다.

작가는 온갖 모순의 총합인 기생이라는 신분 안에서 아슬아슬한 자유를 누리는 명월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조선 시대와 비교해 얼마나 나아졌는지 묻는다.

작품의 상당 부분이 사회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논의하는 대화로 이뤄져 있는데 그 깊이가 상당하다.

명월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복잡하고 현대적인 인물이다. 

이 작품은 사극이라는 틀을 활용한 현대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아주 스타일리시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신선했다.


p.s. 이 작품의 표지와 장다혜 작가의 장편소설 <탄금>의 표지의 느낌이 비슷해서 "이게 뭐지?" 했는데 같은 디자이너가 작업한 모양이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이 이복동생 때문에 서얼금고법을 만들었다는 언급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얼금고법이 만들어진 배경은 수조권과 관련이 있는데 요약하기 길어서 생략한다.

명월비선가 - 조선스팀펑크연작선
명월비선가 - 조선스팀펑크연작선
조남주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한겨레출판)

이 연작소설의 작가의 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소설들을 쓰는 내내 무척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습니다."

책 하드커버를 덮은 뒤 들었던 내 기분도 작가의 말과 같았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으니 말이다.


이 연작소설은 서울 소재 가상의 동네인 '서영동 동아1차 아파트'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주민과 주변인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7편을 묶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단지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주민 간 담합을 유도하고, 층간소음 때문에 일상이 무너지고 있지만 상승하는 아파트 가치를 포기할 수 없고,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하철 통로를 뚫으려고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악다구니를 부리고, 단지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인요양시설을 반대하고, 아파트 경비원에 갑질을 하면서도 갑질이란 걸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단지 안에서도 평수로 서로의 급을 나누고...


작가는 아파트(를 포함한 부동산)를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까발리며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 정말 잘살고 있는 거 맞느냐고.

노동 시장의 민낯을 들여다본 장강명 작가의 연작소설 <산 자들>과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의 먹고사니즘을 돌아보기에 훌륭한 르포다.


조남주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 게 정말 오랜만이다.

데뷔작 <귀를 기울이면>과 <고마네치를 위하여> 이후 작가가 내놓은 작품들이 워낙 당황스러웠던 터라.

<82년생 김지영>은 화제성을 떠나 과연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인 작품이었다.

지나치게 메시지를 앞세우고 읽는 재미를 도외시한 <사하맨션>도 실망스러웠고.

이번 연작소설은 읽는 재미와 메시지를 조화롭게 살린 결과물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서영동 이야기
서영동 이야기
이경희 소설집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다산책방)

블랙코미디로 시작해 사회 문제 비판을 지나 사랑으로 끝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이야기 모음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이것도 좋아할 것 같고 저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다 준비해봤는데 어때?"라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다.

나는 "아주 좋았어!"라고 대답하고 싶다.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은 설날에 가족끼리 모여서 돌려 읽기에 딱 좋은 단편이 아닐까?

근래 읽은 단편 중 가장 웃긴 단편이었는데, 꼰대의 끝이 어디인지 펼쳐내는 상상력이 유쾌하다.

'신체강탈자의 침과 입'도 읽는 내내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게 한 단편이었다

정말 하찮은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을 닮아 있어 더 웃겼다.

끝까지 진지해 보였던 '바벨의 도서관'을 읽을 때도 마지막에 인공지능이 죽어라 찾아 헤매던 책의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마냥 유쾌하기만 했다면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이 시간에 잡설을 끼적이진 않았을 테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파업 문제를 다룬 '우리가 멈추면'을 읽을 때는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로 일했던 2년여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동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르포 기사 이상으로 진지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다.

작가가 묘사하는 우주의 풍경과 기술이 정말 그럴듯해서 실감 나는 작품이었다

'다층 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은 욕망의 근원을 들여다보며 자유와 속박의 차이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마지막에 실린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였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이상적인 미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장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개인적인 사랑이 어떻게 편견과 차별을 넘어 보편적인 인류애 나아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여운이 깊게 남았던 작품이다.


최근에 챙겨 읽는 한국문학 신간 중에 SF의 비중이 늘었다.

SF라는 장르를 떠나, 그 자체로 좋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담은 신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SF 붐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단계는 넘어선 듯하다.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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