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기준, p. 20)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30만 년 전에 출현했다. 30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연에 익숙했던 뇌가 정보와 소음으로 가득 찬 인공적인 생활공간에 적응하기에 200년(산업혁명)이라는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환경은 초록에서 회색으로 급격하게 바뀌었지만 우리의 뇌는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뇌의 많은 부분이 구석기 시대 푸르른 대평원을 달리던 수렵 채집민의 상태를 간직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용마산 데크길을 얼른 걷고 싶어졌다. 마음이 복잡할 때, 삶이 의 미없는 것 같을 때, 남편과 싸웠거나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까지 울적할 때마다 내가 왜 중랑천 강변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어했는지 알게 됐다. 사람은 원래 자연이 가까워지도록 설계된 생물이고, 일때문에 부득이 도시로 몰리게 된 현세대는 더더욱 자연을 그리워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말엔 꼭 몸을 일으켜서 용마산 데크길을 걸어야겠다.
올해 알게된 또 한명의 소중한 작가.
모국어는 너무나 당연한 공기 같아서 단어 하나 하나 혹은 문장의 만듦새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사용한다. Hi 나 Hello 에 상응하는 한국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매번 '안녕하세요' 또는 '안녕'이라고는 알려주면서도 '안녕'의 뜻이 무엇인지는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건 그냥 인사말일 뿐이라고, 별다른 의미는 포함하지 않은 '누군가 만났을 때 처음 하는 말' 뿐이라고.
'안녕하세요'를 'Are you in piece?' 의 의미로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한국어라는 모국어는 또다른 세계로 확장된다. 문장의 주어가 상대방인 'you'로 분명해지면서 내 앞에 있는 (혹은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당신의 안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더 나아가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까지 담기게 되는.
모국어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소설 속 화자는 끊임 없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데, 외국이라는 소설 속 배경 덕분에 그 불안감, 자조 섞인 실망감, 막막함이 훨씬 더 잘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책을 읽는 내내 여러 번 웃고 재미난 순간들이 많음에도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나 역시 언젠가 느꼈던 그 막막함이 고스란히 기억나서인것 같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건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건지..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고작 이것 뿐인 현실이 혹시라도 끝인거면 어떡하나.. 했던 시간들.
그래도 가끔씩은 소설 속 화자와 같은 인물이 부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끝없이 고민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좋아하는 일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그 일을 너무나 잘 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마지막 결말은 <젊은 근희의 행진> 과 함께 올해 읽은 최고의 마무리 문장이었고, 이 작품에 이보다 더 훌륭한 마무리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작가의 말 역시 인상적이었다. 모처럼 여러 번 소리 내어 곱씹어 읽은 문장들이다.
p.184
나는 소설이 꾸며 낸 이야기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소설은 삶을 반영한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소설은 삶보다 작지 않고, 소설이 삶에 속한 게 아니라 삶이야말로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쓰고 있는' 소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우주와 영원이 써 내려가는 거대한 소설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소설을 쓴다는 건 일종의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는 행위이며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과 소설은 둘로 갈라져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다.
양자물리학자가 쓴 과학 교양서. 우연이라는 열쇠말로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천문학, 통계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질문 형태인 제목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아주 많이’다.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한 기업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우연이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 없고, 기실 인생 자체가 우연 게임이나 다름없다는 거다.
얇은 책인데 내용이 무척 알차다. 포퓰리즘의 핵심에는 ‘순수한 민중 대 부패한 엘리트’라는 피해망상적인 구분 짓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구분 짓기는 이데올로기로서 홀로 설 정도의 중심이나 내용이 없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숙주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며, 그때 좌파 포퓰리즘이냐 우파 포퓰리즘이냐 하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2023. 8. 26.
#그사람에대한가장쉬운평가방법은
#그사람의곁에누가있는지보는것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자칫, 무엇을 믿어야 할 지
머리가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지금껏
계속 반복되어 왔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어쩌면..
과거보다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가기
좋은 환경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이럴까요??
저는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왜곡되기 쉬운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SNS가 그것을 가속화
시켰다고도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들의 인생에서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지니지
않으면 쉽게 왜곡된 정보를 자동으로
습득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다른 게 아니라..
이게 가스라이팅 아닌가요?
그것도 국가가 장기간에
걸쳐서 국민을 상대로 하는
가스라이팅 같습니다.
인간은 모두 사회화 과정을
겪고 성인으로 자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환경의
교육을 받았는지에 따라..
그에 맞는 생각을 하게 될겁니다.
이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어쩌면 교육권 밖의 인생을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주 조금 더 쉬웠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것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컴의 면도날'을
들어보셨나요??
오컴의 면도날이란..
어떤 사실 또는 현상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을 의미합니다.
(출처: 네이버 경제 상식)
저는 의심하고 질문하는
삶의 태도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가기 부족하기 때문에..
사실충실성이 중요한 기준점이
되어준다고 평소에 생각합니다.
(영어로는 '팩트풀니스'죠..)
팩트 위주의 사고를
하려면 해당 내용의
근거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소금은 일반적인 소금보다 더 짜."
라고만 말하면 단순 주장이겠지만..
기준으로 평균 소금들의 염도와
비교치가 나와 있는 데이터를
제시한다면..
조금 더 사실처럼 보일겁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 데이터를 검증해봐야죠.
그 데이터를 낸 기관의
신뢰도를 볼 때 신뢰가 있다면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지녔다면 여기서도
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직접 염도를..
비교 측정 해볼 수도 있겠죠.
...
너무 빡빡한가요??
이만큼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서
사실 조금 오바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진실에 다가가기가 기질적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어렵다면..
차선책도 있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의 말을
신뢰하는 겁니다.
이건 말 그대로
차선책 입니다만..
저는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직한 사람은..
그간 믿음직한 태도를
고수해 온 사람일겁니다.
물론 사람에게 완벽을
기대해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건 그냥 제 경험에 따른
느낌입니다만.. 그래도 왠지
그런 것 같지 않나요??
...;;;
주말 새벽 글은 매번
길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얼만큼 메시지는
전달한 것 같으니,
결론으로 가보자면..
이 책에서 가장
제가 찾고 싶었던 구절은..
유시민 작가님과
김어준 총수와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너무 길어지는 듯 하여..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책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스크롤을 내리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탁현민산문집 #사소한추억의힘
#독서 #집권7년차 #문재인정부
#이쯤되면연임제아닌가????
#탁현민 #김어준 #유시민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에게
#희망이하나있다면그것또한우리
#사실충실성 #오컴의면도날
#과학 #의심하고질문하기
#말보다는행동에주목하라
#그의곁에누가있는지보라
#끝까지포기하지마세요
#미래는우리가바꿀수있습니다
#개똥철학 #두번째삶 #바닿늘
#메디치미디어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요약, 수정 하였음을
참조 바랍니다.
평가에 관하여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삶 전체로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 남을 평가할 때는 매우 신중
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종종 써왔다. 그러다
언젠가 유시민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말을
했더니 그는, "그건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지 신중하라는 말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아! 그렇구나' 싶었다. 퇴임하고 1년이 지
난 지금, 나는 우리 정치 현실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대통
령이 퇴임하기도 전에 시작되었고, 복기와 회고는
전혀 지표로 쓰이지 않았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
의 모든 걸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부정의 이
면에는 증오가 있었다. 지난 정책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지난 정부의 사람들에 대한 증오였다. 그
리고 이를 부추기는 것은 보수를 참칭한 매체들이
었다. 이를 소비하고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일단의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평가는 정치 공세였고, 새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전
정부의 모든 게 가공되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을 생각하면 드라마 〈웨스트 윙〉
시리즈에 나온 러디어드 키플링의 말이 떠오른다.
문 전 대통령 스스로도 "무척 공교로운 일이 되었
다"고 언급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탄생은 민주당
선거 전략의 실패였을까? 아니면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손바닥에 새긴 '왕'자처럼 그가 애초에
왕이 될 운명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문재인 정부
인사 실패로 인한 후과일까? 언젠가 이 고민을 두
고 "유권자가 열쇠를 쥔 것이 아닐 때가 있다. 환경
과 역사가 쥐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
다. 문재인 정부의 과오도, 지지하는 세력의 힘이
부족해서도 아닌 역사와 역사를 둘러싼 환경의 변
화가 윤석열 정부를 탄생하게 만든 것이라는 논리
였다.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피로감과 신냉전 질서
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졌고, 지난 5년 동안 어느 정
도 충족된 수평적 리더십에 대한 아쉬움과 답답함
같은 것들이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하는 분석이
었다. 이러한 분석이 맞건 틀리건 달라지는 건 없
다. 나는 지난 5년 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아
왔다. 대통령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일 앞에
놓였고, 국정은 언제나 처음 맞닥뜨린 일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대안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새 대통령과
새 정부는 이전 정부의 공과를 통찰해 나아지는 방
법밖에 없다. 모쪼록 윤석열 정부가 정신 차리길
바란다. 바뀌길 바라고, 잘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
해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전
임 대통령과 전 정부에 대한 콤플렉스, 증오, 분노
를 버리는 것이 가장 먼저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마스터 요다의 가르침
분노가 없는 사람이 분노만 가득한 사람보다 행복
하고 건강하며 무엇보다 삶이 즐거울 것이다. 분노
의 종국이 고통인 까닭은 마스터 요다가 이미 말했
다. 분노는 두려움에서 시작되어 증오로 나아가고,
상대를 향한 증오는 결국 나의 고통에 이른다는 가
르침이다. 우리가 겪는 정치적인 분노 역시 그 발단
은 두려움이지 않을까 싶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그
간 지켜온 사회적 합의와 상식, 가치를 부정하면서
까지 이전 정부의 정책을 폄훼하고, 이전 정부의 사
람들을 사법적·정치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목격하면
슬그머니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 했을 때, 사람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
다. 순응하거나 분노하 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마땅치가 않다. 순응한다고 해도
갑자기 마음이 바뀔리 없으니 결국 뉴스를 보지 않
거나 침묵을 선택하는 것 정도일 텐데, 그렇게는
오래 버티기 쉽지 않다. 분노하게 되면 시간이 지
날수록 더욱 분노하게 되어, 어느 순간 분노의 대
상을 증오하게 된다. 이쯤 되면 상대는 절대 '악'이
되어버리고, 나 또한 흑화해 버린다. 문제는 영화
와 달리 현실에서는 저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증오
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라
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 남탓으로 잠시 웃거
나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뿐이다. 세
상은 커녕 한 개인의 삶도 절대 바뀌지 않는다. 증
오는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 학습해야 하는 지식이 아니고 대단한 철
학도 아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알게 되고, 심지어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다. 상대
를 이기고 싶다면 저주보다는 성찰이 필요하고, 상
대보다 나아지고 싶다면 증오보다는 노력이 필요
하다는 것. 이것이 현실을 넘어 세상을 바꾼 사람
들의 성공 비결인 셈이다. 일전에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 <다스뵈이다>에 출연했을 당시, 영화 <스타
워즈>에 등장하는 마스터 요다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김어준을 놓고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증오가 없는 분노, '순수한 분노'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분노가 그렇게 '순수'하면 강
한 힘을 갖게 된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내가 생각
하는 순수한 분노란 일단 득실을 따지지 않는 분노
여야 한다.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때로는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가 순수한 분노다.
사람 자체에 대한 분노여서는 안 된다. 사람의 행
위와 행위 뒤편에 있는 의도에 분노할 수는 있어
도, 사람에 대한 연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
이 순수한 분노다. 분노가 증오로 확장돼서는 안
된다. 분노가 오직 분노로만 존재하고 있어 마침
내 분노가 해소되었을 때, 뒤끝이 남아있지 않아
야 한다. 그것이 순수한 분노다. 살면서 여러 사람
을 만났지만, 분노와 증오의 문제에 관해서 김어준
만큼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 나는 이명
박·박근혜 시대를 거쳐 이제는 윤석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제외하
고는 영 마땅찮은 시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기질 탓이 클 것이다. 김어준은 언뜻 대충대충 무
심해 보이지만 매우 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
언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방의 거절 의사가 분명할
때는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넘기고 더는 이야기하
지 않는다. 뒷담화는 물론 군말도 없다. 믿기 어렵
겠지만 생각보다 막말도 쓰지 않는다. '씨바' 정도
가 그의 막말 한계선이다. 요즘 그의 방송을 보면
'바보', '멍충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그와 나는
<나는 꼼수다> 콘서트 때부터 인연이었으니,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이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을 주고 받지만, 일이 없으면 몇 달씩 서
로 연락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인
데 별로 개의치 않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
지 나를 '탁'이나 '자기'라 불렀고, 나는 그를 '김
어준'이나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한 호칭과 관계
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이야기
한 적도 없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다. 그의 순수함
은 이런 '뒤끝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가 증오가 되기 딱 좋은 시대다. 모쪼록 그의
순수한 분노를 많이들 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