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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 장편소설 『고독사 워크숍』(민음사)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고독사는 이제 노년층을 넘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다.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청장년층 무연고 시신 비율이 이를 방증한다.

이 주제를 다룬 소설이 이제야 나온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첫인상이 서서히 지워진다.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을 내세워 각자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다.

고독사하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빈곤층 노년이 아니라 젊은 직장인, 학생, 부부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이들은 익명의 커뮤니티에 모여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서로에게 공유하는데, 그 과정이 참 시시하다.

그 시시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행위가 묘하게도 서로 의지하고 연대할 힘을 얻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요즘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자연사다.

지금까지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 중에 자연사는 드물었다.

사고사가 아니라면, 병원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시들며 죽어가는 게 전부다.

그런 죽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연사하고 싶은데 과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홀로 살든 모여 살든 죽을 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음은 홀로 걸어가야 할 확실한 결말인데, 그런 고독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서로의 고독을 지켜봐 주면 덜 외롭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고독사일지라도 말이다.

이 다정한 작품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여담인데 나와 박지영 작가 사이에 소소한 인연이 있다.

박 작가는 지난 2013년에 열린 제5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자였다.

제3회 수상자였던 나는 마침 조선일보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시상식에 참여해 박 작가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앞서 제4회 시상식에도 참석해 구한나리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넨 바 있다.


매년 여름마다 수상자에게 꽃다발을 전하는 일이 올 줄 알았는데, 제5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폐지됐다.

구한나리 작가가 장르 문학 필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있지만, 단시간 내에 후속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반향을 일으킨 작가가 없다 보니 상의 존재감도 빠르게 사라졌다.

당장 나도 후속작인 <침묵주의보>를 수상 후 7년 만에 내지 않았던가.

박 작가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수상 이후 9년 만에 낸 이렇게 신작으로 소식을 접하게 돼 반가웠다.


고독사 워크숍
고독사 워크숍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

이 작품은 장기미제로 남은 20여 년 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만 보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이며 치밀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보다 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취재가 돋보인다.

그런데도 가독성이 매우 훌륭해 읽는 데 막힘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표백> 이상으로 도발적이다.

분량만 보고 지레 겁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학부 시절에 형법을 공부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국가는 형벌을 주는 권한을 독점한다.

이를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김승연 한화 회장처럼 아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왔다고 직접 빠따를 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원칙 때문에 피해자가 형사사법시스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가해자가 지나치게 낮은 형벌을 받아 홧병으로 뒷목을 잡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가.

오래전에 홀로 며칠 동안 이 문제를 가장 공정하게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었는데, 고민 끝에 나온 해결방안은 어이없게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함무라비 법전에 명시된 이 원칙은 미개함과 거리가 멀다.

상대방이 내 강냉이를 세 개 털었으면, 나도 상대방의 강냉이를 딱 세 개만 털어야 한다는 게 이 원칙의 핵심이다.

즉 피해를 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해선 안 된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원칙이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이 원칙은 범죄 행위의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는다.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고 이런 복수법을 허용하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혼란이 벌어진다.

실제로 고려 초에 복수법이 시행돼 막장 사태가 벌어진 일이 있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됐고, 백주대낮에 누군가를 때려죽여도 복수라고 주장하면 땡이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의범에겐 국가가 대신 나서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른 형벌을 대신 가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과연 물리적인 피해만이 피해일까?

누군가에게는 맞아서 입은 상처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훨씬 클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떻게 처벌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뤄질 수 있을까?

오래전에 멈췄던 고민을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 하게 됐다.


이 작품은 분량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출판시장을 향한 도전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장편소설의 기준이 원고지 1000매에서 800매로 내려온 지 오래고, 요즘에는 400~500매에 불과한 소설도 장편소설 취급을 받는다.

나도 의도적으로 800매에서 장편소설 분량을 끊어온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원고지 3000매 이상 분량의 소설이라니 이게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에 소설을 읽으며 이 정도로 깊게 무언가를 들여다본 일이 있었던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사이고, 그런 서사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장편이다.

단편으로 아무리 문장이니 뭐니 장난을 치고, 단편을 억지로 장편으로 늘려 봐야 이런 사고실험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소설은 역시 장편이고, 취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앉은뱅이 소설로는 어림없다.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세트] 재수사 1~2 - 전2권
김혜나 장편소설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행나무)

이 장편소설을 읽으며 지난 2009년의 봄, 여름, 가을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내 곁을 떠나가던 20대의 끝물이었다.


그해 봄, 나는 초기 불경인 <아함경>을 접하고 내 잇단 불운을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내 밑바닥에 단단히 쌓인 감정의 찌꺼기까지 정리하긴 어려웠다.

마음은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초여름에 나는 3박 4일 동안 서울에서 고향인 대전까지 걸었다.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내 안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소설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다.

출간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 운이 좋아 출간해도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소설을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민이 앞섰다.

내 몸을 힘들게 내몰면 뭔가 결론이 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했다.

그런데 땡볕 아래에서 오래 걸으니 힘들다는 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보상은 없어도 한 번쯤은 미친 듯이 매달려 소설을 써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린 게 힘든 여정에서 얻은 몇 안 되는 수확이었다.


늦가을까지 절간에 머물며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과정은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구제불능에다 불완전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초고 집필을 마친 후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쓸모없는 과정은 아니었다.

내가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니 과거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졌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삶의 균형이 무너진 30대 여성이 도망치듯 떠나온 인도에서 겪는 일상과 고백을 담은 편지를 교차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도에서 주인공은 요가 수련을 통해 구원받으려 하지만, 오히려 번민만 더 깊어지고 일상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엉망이 된다.

그리고 솔직하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할수록 더 나를 모르겠다고.

더 혼란스럽다고.


시간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지만, 나이 든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나를 보니까 몸만 나이 들었을 뿐, 딱히 정신이 성숙해지지도 않았다.

나중에 내가 50대, 60대, 70대가 되어도 지금과 딱히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이유도 모른 채 가파른 차문디 언덕을 오르듯, 그렇게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른 언덕의 정상에서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며 감동했다가 언덕을 내려오고, 곧 다시 충동적으로 언덕에 오르고.

이 작품을 읽으며 나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안도했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배지영 소설집 『근린생활자』(한겨레출판)

반지하 월세를 전전하다 무리한 대출을 껴서 마련한 근생 빌라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중소기업 근로자.

북한 부동산에 투자한 뒤 통일만 기대하며 거리로 나서는 태극기 부대 노인.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독극물을 땅에 묻는 공공기관 하청업체 직원.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박카스 아줌마

생리 도벽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 받은 뒤 절도로 삶을 이어가는 초로의 여인.

자신이 개발한 철 지난 청소기를 팔러 다니는 연구원 출신 외판원.


이 소설집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성실하게 살았지만, 내리막길 밖에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현재 머무는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삶.

작가 본인의 경험에 탄탄한 취재를 바탕에 둔 간접 경험이 깊게 녹아 있어 소설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실감난다.

작가는 축축한 곰팡내가 짙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웃프게 그려내는 전략으로 심각함을 덜어내고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이 눈에 쏙쏙 들어와 가독성을 높인다.


이 소설집에 실린 6편의 단편을 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었다.

등장인물 모두 남들보다 조금 기회가 적었고 운도 따르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공통점이 나비효과처럼 이들의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 또한 삐끗하면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웃픈 연출로 감추기 어려운 살벌한 풍경이었다.


근린생활자
근린생활자
정한아 장편소설 『친밀한 이방인』(문학동네)

우리의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종의 연극과 비슷하지 않을까.

몇 년 동안 서재에 묵혀 구간이 된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평생 신분을 속이며 살아온 여자 '이유미'의 행적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여정이 작품의 큰 줄기다.

주인공은 결혼 후 출산해 몇 년째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인데, 우연히 이유미가 자신의 미발표작으로 소설가 행세를 하고 다녔음을 알게 된다.

추적 끝에 드러나는 이유미의 인생사는 기가 막히다.

가짜 대학생이었다가 피아노 학원 강사였고, 대학에서 평생교육원 강사로 일하다가 교수로 임용됐으며, 요양병원 의사 행세도 했었다.

이유미는 결혼도 세 차례 했는데 심지어 이름을 바꾸고 남성 행세를 하며 여자와 산 일도 있었다.


인정 욕구와 그 욕구를 받쳐주지 못하는 가정사가 빚어낸 무리한 거짓이었지만, 놀랍게도 이유미는 들키기 전까지 모든 거짓 신분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거짓이었고, 때로는 거짓이라고 볼 수 없는 무언가도 있었다.

반면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온 주인공의 삶은 거짓이 아닌데도 거짓처럼 위태롭다.

이 작품은 그 둘의 삶을 번갈아 보여주며 우리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게 정말 진짜인지 묻는다.


자연스럽게 십수 년 전 사회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여러 유명 인사의 학력 위조 사건이 떠올랐다.

그들 대부분은 학력 위조가 드러나기 전까지 자신이 활동해 온 영역에서 실력자로 인정받아왔다.

학력위조가 대중을 기만한 행위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남긴 모든 행적을 부정할 만큼 배경이란 게 중요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배경이 가짜인 실력 있는 사람과 배경만 진짜인 실력 없는 사람 중 진짜에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배경에 얼마나 약한 존재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묻게 해줬다.

읽는 내내 누군가가 내 뒤를 쫓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고 가독성도 대단히 훌륭하다.

재미와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좋은 장편소설이다.


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김상원 음악소설 『러브비츠 평전』(소울파트)

몇 년 전에 초반부를 읽고 페이지를 덮었다가 뒤늦게 완독했다.

'음악소설'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소설임과 동시에 하나의 앨범이다.

작가가 직접 만든 음악을 링크한 QR코드가 페이지 곳곳에 삽입돼 있어 마치 OST를 듣듯이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작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다시, 밸런타인데이>에도 내가 작곡한 Book OST가 QR코드로 삽입돼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을 따라 만든 결과물이다.

그런 작품인데 이제야 완독했다니... 반성할 일이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 음악을 넘어 인공자아 음악이 등장한 미래를 배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뮤지션 '러브비츠'의 자살 사건을 따라간다.

여기에 작가가 만든 가상의 미래 음악, 그 음악을 주제로 다룬 가상의 비평이 더해져 '러브비츠'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에 불이 붙는다.

작가는 각종 전자음과 TTS(문자-음성 자동변환)로 합성한 음성을 음악에 활용하는 한편, 인간 디자이너와 인공지능 화가가 협업한 삽화를 더해 인간과 기계가 불안하게 공존하는 디스토피아 분위기를 연출한다.

SF 소설이 대중화된 지금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인 형식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지 미래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취향이 조작되는 과정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한 알고리즘에 놀라는 일이 많아진 현재가 겹친다.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로봇도 적극적인 소비의 주체로 변모한 미래를 묘사하는 부분은 마치 예언처럼 느껴졌다.

최근에 읽은 그 어떤 SF소설보다도 뭔가 SF스러웠다.


하지만 지나치게 난해해 읽기가 쉽지 않았다.

페이지를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수시로 앞 페이지로 돌아가곤 했는데, 중간부터 그런 과정을 포기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데 의미를 뒀다.

조금 더 쉽게 풀어썼다면 더 많은 관심을 받지 않았을까.

하이브리드를 닮은 파격적인 시도에 비해 재미가 아쉬웠다.


러브비츠 평전 - 인공자아 음악의 시작
러브비츠 평전 - 인공자아 음악의 시작
김범 장편소설 『공부해서 너 가져』(웅진지식하우스)

오래전에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할매가 돌아왔다>를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이 작품도 정독하려고 챙겨뒀었는데, 무려 8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릴 줄은 몰랐다.

신간 구입을 멈추고 그동안 읽지 않은 구간을 뒤지다가 뒤늦게 이 작품을 발견했다.


이 작품도 <할매가 돌아왔다>만큼 술술 읽히는 유쾌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에 미국에서 자라 영어만 잘하는 왕따 여고생, 머리가 좋아지는 침술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잘 훈련된 개들을 몰고 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교도관 출신 카페 주인 등.

작가는 여러 독특한 캐릭터를 내세워 무한 경쟁에 노출된 교육 현장의 실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이렇게 빨리 페이지가 넘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고,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다.

작가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1963년생) 문장이 재기발랄해 다시 한번 놀랐다.


8년이나 지난 작품인데도 철 지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교육 관련 부조리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을 넘어 여전히 뜨거운 감자 아닌가.

작가는 일진의 주먹질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 평범한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임을 보여주며, 경쟁에 매몰돼 자신과 상관없는 부조리를 외면하는 무책임한 다수를 질타한다.

나 답게 사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지 무겁지 않게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일등을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일등을 하고 싶어서 슬퍼지는 것"이라는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훌륭한 성장소설이다.


공부해서 너 가져
공부해서 너 가져
황여정 장편소설 『알제리의 유령들』(문학동네)

권위주의 시대에 가벼운 유희가 불러온 심각한 나비효과에 휘말린 등장인물들.

그들의 행보를 따라가는 과정이 마치 퍼즐을 맞추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하는 정교한 구성이 돋보였다.

최근에 읽은 장편소설 중에서 가장 치밀했다.

날이 선 문장이 아닌데도 책을 덮을 때까지 일정한 강도의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 훨씬 많은 장편을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몇 년 전에 샀지만 일부러 피해왔다.

이 작품은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본심에 내 장편소설 <침묵주의보>(공모 당시 제목은 <짖는 개가 건강하다>)와 함께 올랐었다.

데뷔 후 7년 동안 신작을 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작품 청탁을 받지 못했던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침묵주의보>를 밀어내고 수상한 이 작품과 문학동네에 화가 났었다.


얼마나 잘 써서 수상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는데, 막상 책 표지를 보니 페이지를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침묵주의보>보다 훨씬 좋은 작품일까 봐 두려웠다.

그렇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앞으로 더 소설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중에 <침묵주의보>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몇 쇄를 추가로 찍고 덤으로 백호임제문학상도 받을 때, 나는 문학동네를 속으로 무척 비웃었다.

내걸 뽑았으면 훨씬 재미를 봤을 텐데 멍청한 선택을 했다며 말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몇 년이 흐르니 이제는 이 작품을 읽어도 아무렇지 않을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심사위원이었어도 이 작품에 상을 줬을 테다.

만듦새를 비교해 보니 <침묵주의보>가 나댈 작품이 아니다.

나는 이 작품처럼 세공한 보석을 닮은 장편을 쓸 자신이 없다.

다만 읽는 재미는 <침묵주의보>보다 훨씬 떨어졌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성과 뒤늦은 소재(80년대 군사정권)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가 많진 않았을 테다.

평범한 독자보다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나 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한 작품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으니 말이다.

좋은 소설이다.

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강화길 장편소설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서재에서 이 작품과 유난히 자주 마주쳤는데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고 실망한 터라 더 그랬다(특히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는 오버였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서재에서 읽지 않은 구간을 뒤지다가 또 이 작품과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최근 한국 문학 신간을 읽는 일은 페미니즘 서사를 읽는 일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 작가가 많고 그들이 내놓는 이야기도 많다.

이야기가 많은 만큼 식상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이 작품은 '유니크'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성폭력 피해자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겐 약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설정 자체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등장인물 모두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할수록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새겨진다.

작가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는 과정을 대단히 솔직하고(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제하지 않은 문장으로 풀어내는데, 그 거친 호흡이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울린다.

그들이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아니었는지를 돌아보며 오롯이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간절하게 바라는 과정이 섬세하다.

무거운 주제를 마치 추리소설처럼 이야기를 쌓아 한곳으로 모아 터트리는 구성도 읽는 데 흥미를 더했다.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헤매다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빠져나온 기분이다.

뒤늦게 읽고 머리를 한방 세게 맞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어보길 잘했다.

<대불호텔의 유령>보다 좋았던 작품이다.

훨씬 더!

작가의 신간을 더 챙겨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장편소설 『젠틀맨』(한겨레출판)

조직폭력배 말단 조직원이 우연한 계기로 명문대 학생으로 신분을 세탁하는 과정 묘사에 개연성이 부족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홍콩 누아르를 방불케 하는 뒷골목과 폭력 묘사, 아슬아슬한 심리 묘사가 부족한 개연성을 덮는다.

어딘가 조폭답지 않은 섬세함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매력적이고 또 애잔해서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여기에 예상하지 못한 후반부의 반전도 책을 덮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읽는 내내 눈앞에 영상이 그려졌다.

드라마보다는 영화로 만들어지면 무척 개성적인 작품이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거두절미하고 잘 읽히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여기서부터 주의! 작품과 관련 없는 썰이 훨씬 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도 의미를 부여하진 않지만, 2011년은 한국소설 시장에서 꽤 독특한 해였다고 자평한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는데, 당시에는 큰 상금을 내건 장편소설 공모가 적지 않았다.

그중 한겨레문학상, 중앙장편문학상,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현직 기자가 수상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자는 이젠 명실상부 한국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동아일보 출신 장강명 작가였고,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자는 이 작품을 쓴 세계일보 출신 심재천 작가,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자는 나였다.

당시 장강명 작가는 다른 작품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본심에도 올랐던 터라, 문학상 다관왕 경력을 몇 년 앞당길 뻔했다.

그랬다면 내가 데뷔하는 일은 없었겠지.


안타깝게도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 등 일부 공모 외에 장편소설 공모 다수가 사라졌다.

오랫동안 당선작 중에 히트작이 별로 없었다는 게 큰 이유일 테다.

내가 아는 한 장편소설 공모작 중 마지막 히트작은 2013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다.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수상작이 죽을 쒔다.

그 이전에도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천명관 작가의 <고래>, 2005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김별아 작가의 <미실>, 2006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박현욱 작가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도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을 뿐이다.


상금도 회수 못하는 공모전을 오래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장편공모로 데뷔한 작가들이 한국문학 시장에서 홀대 받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단편이 주류를 이루는 기형적인 문학시장도 이유일 테고.

그러다 보니 장편공모 당선 작가가 빠르게 후속작을 내거나 단편 청탁을 많이 받아 시장에 안착하는 경우가 드물다.

장강명 작가만 해도 투고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장편 공모 도전에 다시 뛰어들어 상을 휩쓴 뒤에야 주목 받지 않았던가.

나 또한 데뷔작 이후 후속작을 내는 데 7년이나 걸렸고.


뒤늦게 이 작품을 읽으며 작가 또한 나처럼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 작품 또한 나처럼 작가가 데뷔작 이후 7년 만에 출간한 후속 장편소설이니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작가의 신작을 만나고 싶다.


젠틀맨
젠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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