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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무진 소설집 『아폴론 저축은행』(요다)

내 경험상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등장인물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등장인물은 종종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그럴 때는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황보다 극한인 상황이 또 있겠는가.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단편은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설화, 도시괴담, 역사, 고전과 엮어 다채롭게 변주한다.

가족물인 줄 알았는데 심령물로 반전하고, 사극인 줄 알았는데 SF가 끼어들더니, 동화의 한 장면이 고어물로 돌변한다.

작가는 장르, 시대, 배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삶과 죽음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어떤 선택은 섬뜩했고, 어떤 선택은 우스웠으며, 어떤 선택은 서글펐다.


작가가 전작인 장편소설 <인더백>에서 실감 나게 보여준 두렵고 황량한 풍경에 끌렸다면, 이 소설집 또한 마음에 들 것이다.

장편 한 권을 읽을 시간에 장편 못지않게 밀도 높은 단편을 여럿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덟 단편 모두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독자보다 앞서 나가고 흡인력이 대단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집 중 가장 집중력 있게 읽었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p.s. 24페이지 여섯째 줄과 넷째 줄의 오타를 고칠 수 있게 빨리 2쇄를 찍는 날이 오기를.

아폴론 저축은행 -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아폴론 저축은행 -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송경화 장편소설 『민트 돔 아래에서』(한겨레출판)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의 후속작이다.

옴니버스 형식이었던 데뷔작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장편소설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이야기를 다루는 깊이도 데뷔작보다 깊어졌다.


작가는 인사청문회, 법안 심사, 국정감사, 예산 심사, 당 대표선거, 지방선거, 대선까지 정치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취재 현장을 두루 다루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

대한민국의 언론사 정치부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정독하면 된다.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나도 이 작품을 읽은 뒤에야 현직에 있을 때 몰랐던 정치부 기자의 일상에 관해 자세히 알았다.

작품 곳곳에 반전이 지뢰처럼 박혀 있어 느닷없이 읽는 재미를 준다.

현직에 있을 때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왜 그런지 이 작품을 읽고 실감했다.

정치부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기자가 정치판을 흔드는 특종을 마구 쏟아내는 먼치킨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설만의 재미로 이해하자.


이 작품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내용은 기업이나 정치권으로 이동한 기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업 홍보실로 이동해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 후배 기자에게 로비하고, 정치권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쓸 때 눈치를 보는 선배 기자들의 모습.

몇 년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때 가방 모찌를 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삼성의 상무급 임원이었는데, 삼성에 비판적인 언론사에서 활약했던 기자 출신이다.

어디 그뿐인가.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기자도 있었는데.

자신이 한참 선배라며 내게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자 출신 모 기업 홍보실 직원의 얼굴도 간만에 생각났다.


이 작품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지금까지 조직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비슷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정의로웠으며, 적당히 나빴고, 적당히 비겁했다.

기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개중에는 '구악'으로 불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도 있었지만, 어느 조직이든 그런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그런 군상의 모습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를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언론사의 주요 부서는 이른바 '정경사'로 불리는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다.

'정경사'는 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다루는 부서인데, 이들 부서를 두루 거쳐야 편집국장과 같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편집부, 문화부, 체육부, 국제부, 교열부, 지방부, 온라인부 등은 사내 권력에서 먼 부서다.

문화부를 더해 '정경사문'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사내 권력은 어디까지나 '정경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경제부와 산업부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사회부가 한직인 경제지에서도 정치부의 위상은 상당하다.


나는 '정경사문' 중 '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기자에게 부서 이동은 이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언론사에선 부서 간 업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정치부 경험을 전혀 해보지 못한 나는 이 작품의 내용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기자가 발휘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 훌륭한 직업물이었다. 


'시마' 시리즈처럼 후속작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 알게 된다.

민트 돔 아래에서 - 송가을 정치부 가다
민트 돔 아래에서 - 송가을 정치부 가다
정은우 장편소설 『국자전』(문학동네)

제목과 표지로 이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예상해보자.

'국자'라는 단어에 전통적 서사물을 의미하는 '전'(傳)이 붙어있다.

아마도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고, 적절한 풍자를 곁들였을 테다.

조리기구 국자와 같은 주인공의 이름, 표지에 실린 젓가락과 접시 이미지를 보니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당당히 궐련을 든 여성의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전'으로 불리는 전통적 서사물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내 예상대로 모두 들어맞았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물어보면 Nope!

안티히어로물(이견이 있겠지만 히어로물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에 따뜻한 가족 서사가 결합하면 어떤 케미가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

이 작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재미있다.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재미있어 이마를 쳤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에 곳곳에서 랜덤으로 초능력자가 태어난다는 게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정 연령을 넘기면 초능력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능력자와 일반인으로 구분된다.

능력자는 대한민국에서 어떤 쓸모에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고, 높은 등급일수록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능력자는 일반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존재이지만, 모든 능력자가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검사 결과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능력자는 사회에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철저히 탄압받는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에 좌익 사범의 가족이 연좌제로 억압을 당했던 것처럼.

시대가 바뀌어 탄압 수준은 줄어들었지만, 부적합 능력자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피 대상이다.


이 작품은 '국자'와 그녀의 딸 '미지'의 시점,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인간을 쓸모에 따라 차별하는 세태를 유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짚어나간다.

'국자'는 가족에게 능력을 숨기고 살아왔는데, 그 능력은 어처구니없게도 손맛이다.

'국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꽤 소박하다.

할리우드 히어로물과 비교하면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 소박함이 '국자'를 분투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 작품이 히어로물이었다면 작품 속 정부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며, 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를 착취하는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원고량이 상당한 작품인데, 가독성이 훌륭해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읽는 내내 눈앞에 영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예언하는데, 이 작품은 반드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제작사가 있다면 간 보지 말고 얼른 판권을 사가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나는 이 작품이 당연히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위권에 있을 거로 여겼는데 어느 서점 차트에도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국내에서 첫손을 꼽는 문학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출간했다는 버프를 받았는데도 순위에 없다니.

잘 만든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고, 못 만든 책이 안 팔리는 게 아님을 다시금 느꼈다.

국자전
국자전
구한나리 소설집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돌베개)

문방사우를 의인화한 '서재야회록'처럼 문구류를 의인화한 이야기의 모음인 줄 알고 가볍게 펼쳤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문구류를 소재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을 그리는데,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의외로 묵직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어른들의 승진 경쟁 못지않은 치열한 입시 전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향한 의문, 자녀를 마치 소유물 취급하는 어른들의 욕심, 다문화 가정 등 민감한 주제를 문구류로 엮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청소년 소설이니 뭐 별것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펼쳤다간 강한 흡인력에 꽤 놀랄 테다.


2020년대 학교의 풍경과 학생의 심리를 묘사하는 디테일도 엄청나다.

현직 교사라는 작가의 직업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나는 요즘 10대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내 20세기 말 학창 시절과 비교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성인 소설과 다른 차원의 여운이 인상 깊었다.

사소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묘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망가뜨린 친구의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려 친구의 마음을 달래고 싶고, 빌린 지우개의 모서리의 지저분해진 부분을 닦아서 돌려주고, 모두가 외면할 때 먼저 말을 걸어주며 다가오고.

이런 표현이 닭살 돋을지도 모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10대의 고민은 과거와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시절 고민의 무게가 과연 지금보다 가벼웠는가?

나이가 들면 경험과 지혜는 쌓일지 몰라도, 사람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다.

10대도 어른 이상으로 섬세한 자기만의 취향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40대인 내가 10대였던 나를 돌아보니 말이다.


여담인데, 나는 작가의 단행본을 꽤 오래 기다렸다.

작가는 지난 2012년 장편소설 <아홉 개의 붓>으로 제4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받았는데, 3회 수상자였던 나는 시상식에 참석해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넸었다.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비록 5회로 끝났지만, <아홉 개의 붓>은 역대 수상작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작품이었다.

이보다 상의 취지와 잘 어울렸던 수상작이 없었다.

그 이후 작가가 웹진에 단편을 발표하고 앤설로지에 참여하는 모습을 종종 봤지만, 단행본 소식이 한참 동안 없어 아쉬웠는데 반가웠다.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 구한나리 문구 소설집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 구한나리 문구 소설집
김쿠만 소설집 『레트로 마니아』(냉수)

한국 문학계에서 소설은 단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단편을 유의미하게 발표할 자리는 문예지 지면이나 일부 웹진밖에 없는데, 대부분 청탁으로 원고를 받는다.

청탁을 기다리다가 지쳐 좌절하는 작가가 부지기수다.


지난 2020년에 온라인상에 문을 연 '던전'은 가능한 한 많은 작가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독자와 접점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가진 문학 플랫폼이었다.

비록 작년에 운영을 중단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꽤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만났다. 

김쿠만 작가의 단편은 레트로와 B급 정서를 뒤섞은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한국 소설 신간을 체크하다가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띄어 바로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 상당수가 구면이어서 같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시절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IMF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그땐 그랬지" 하며 공감할 만한 소재가 많다.

8편의 단편을 모았는데, 각 단편마다 소재(레드애플 담배)와 등장 인물(시게루, 제임슨, 안 교수 등)이 반복해 나오는 터라 연작소설 같은 인상을 줬다.

단행본으로 작품을 모아서 읽으니 따로 읽었을 때와 비교해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것이 또 편집의 묘미 아닌가 싶다.


읽는 내내 쓸쓸했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사라진 것들을 추억으로밖에 재생할 수 없는 아련함.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없는 미래를 기다려야 하는 막막함.

마치 추석 당일 새벽에 홀로 고요한 서울 시내 한복판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레트로 마니아
레트로 마니아
김성대 음악리뷰집 『지금 내게 필요한 멜로디』(시대인)

이 책이 다루는 곡은 1980년대에서 2020년대 사이에 발표된 다양한 장르의 가요와 팝을 망라하는데, 대부분 유명한 곡이다.

음악 좀 들었다는 30대 중반 이상이라면 모르는 곡을 찾기 힘들 테다.

여름이면 메가데스, 판테라, 크래쉬, 메써드를 듣는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뒤로 미루고 어렵지 않은 언어로 친절하게 곡의 의미를 짚어나간다. 


이 책은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비롯해 6개의 대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대분류 아래에 다양한 상황과 감정에 어울리는 32개 소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세분화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곡에 관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스트리밍 사이트 벅스뮤직과 연결된 QR코드를 삽입해 책을 읽으면서 편하게 곡을 감상할 수 있게 배려했다.


우선 수록곡에 관한 자신의 의견과 저자의 의견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플레이리스트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서로 다른 주관이 만나 교집합을 이뤘을 때 특유의 즐거움이 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음악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 않는 이유다.

이를테면 천용성에게서 브로콜리너마저를, 김제형에게서 윤상과 통하는 점을 짚는 해설에서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로 저자와 다른 2002년의 기억을 추억을 더듬게 하고, 자우림 초기 앨범의 야생성을 좋아한다는 의견에선 "나도 나도!"를 외치게 한다.

퀸의 'Love of my life'를 다루며 심은하 주연 MBC 드라마 'M'을 언급할 땐 자연스럽게 무더웠던 1994년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재미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곡에 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는 재미다.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을 둘러싼 소유권 비화를 접하며 노래의 주인은 따로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성수의 '풀잎사랑'이 서울올림픽 괌 선수단 입장 때 흘렀다는 뒷이야기, 이광조의 데뷔가 홍대 미대와 서울대 미대의 체육대회 뒤풀이 자리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 등은 나중에 술자리에서 써먹기에 좋은 TMI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강인원이 작곡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부르게 된 계기가 김현식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땐 기분이 무거워진다.

다섯손가락이 '젊음의 행진' 오디션 합격 때문에 대학가요제에 못 나갔다는 비화에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작사자와 작곡자뿐만 아니라 편곡자의 의미를 짚은 해설도 의미가 있다.

조덕배의 곡을 편곡한 변성용의 커리어, 보아의 '넘버원' 가사에 얽힌 뒷이야기, 노이즈의 히트곡 '상상속의 너'와 '어제와 다른 오늘'의 편곡자가 김건모였다는 정보 등은 새삼 곡을 다시 주의 깊게 듣게 만드는 기록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뮤지션이나 곡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내겐 나태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백효은과 오창민의 '끝끝내', 얼바노 같은 뮤지션이 그런 경우였다.


학창 시절, 용돈을 아껴 모아 산 '정품' 앨범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는 건 사치였다.

나는 앨범을 몇 차례 반복해 들은 뒤 그중 마음에 드는 곡을 메모해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가 완성되면 쉬는 날에 더블데크 앞에 앉아 마치 의식을 치르듯 몇 시간에 걸쳐 공테이프로 내가 '픽'한 곡을 옮겼다.

세상에 하나뿐인 플레이리스트를 담은 공테이프가 워크맨 속에서 늘어질 때까지 나와 함께 했고, 귀하신 몸인 '정품' 앨범은 감히 케이스에 기스가 나지 않도록 보관에 신경을 썼다.


이후에도 매체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음악을 듣는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MP3플레이어가 대세였던 시절에는 제한된 용량의 메모리에 어떤 파일을 집어넣느냐를 고민했고,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즐기는 요즘에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수시로 곡을 빼거나 집어넣는다.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점점 편한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편한 음악 스트리밍 앱에도 맹점이 있다.

앱이 AI로 추천하는 곡은 기가 막히게 내 취향에 맞지만, 추천곡에만 매몰되면 AI는 또 비슷한 음악을 기가 막히게 골라와 다른 세계를 가진 음악과의 접근을 부드럽게 차단한다.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면, 이 책은 자신이 들어온 음악을 되새김질하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매일 의무처럼 신보를 허겁지겁 듣다가 오랜만에 책을 통해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거우며 유익하다.

각 잡고 앉아 짧은 시간에 눈으로만 읽는 독법은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걸쳐 플레이리스트를 따라 들으며 읽기를 추천한다.

나도 그렇게 읽었다.


p.s. 나중에 2쇄를 찍어 17페이지 8번째 줄의 '김성욱'을 '이성욱'으로 고칠 날이 오기를.

지금 내게 필요한 멜로디 - 비평과 감상이 만나는 일상의 플레이리스트
지금 내게 필요한 멜로디 - 비평과 감상이 만나는 일상의 플레이리스트
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

며칠 전 더 펼쳐보지 않을 게 확실한 한국문학 단행본을 정리하다가, 사놓고 읽지 않은 단행본을 몇 권 건졌다.

이 작품은 그때 뒤늦게 서재에서 바깥으로 나와 나를 만났다.

마침 안주 관련 산문집 출간을 준비 중이어서 이 작품의 제목에 혹했다.


"진즉 읽을걸. 재미있네."

다 읽은 뒤 살짝 후회했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만큼 술을 부르되 그보다는 산뜻한 주류(酒類) 문학이었다.


오너 셰프를 꿈꾸며 푸드 트럭을 운영하다가 망하기 전에 정리한 주인공.

망원동 일대 술집 정보에 빠삭한 주인공의 대학 동기.

모종의 이유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주인공의 사촌 언니.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주종을 가리지 않고 홈쇼핑에 등장해 갈비를 뜯는 모델처럼 맛깔나게 마셔대니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침이 고였다.

술과 음식 묘사가 보통이 아니다.

많이 마시고 먹어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묘사다.

게다가 작품의 주된 배경인 망원동이 내가 음악 기자 시절에 몇 년 동안 제집처럼 드나든 곳이어서 더 생생했다.


맛집 탐방을 기대하며 이 작품을 읽으면 곤란하다.

이 작품에서 술은 등장인물이 현실과 고민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이자,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윤활유로 쓰인다.

만약 술이 없었다면 이 작품의 톤은 다소 어두웠을 테다.

본인도 애주가임이 확실한 작가는 술이라는 요소를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 귀여운 주사를 부린다.

이 정도 주사라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다.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의 등장인물을 모두 여성으로 바꾸면 이런 느낌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밤에 읽으면 위험한 작품이다.


p.s.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술 중 수박 보드카가 가장 당겼다.

수박에 살짝 구멍을 뚫어 보드카를 쏟아붓고 재워서 퍼먹는 술이라니.

내년 여름에 시도해봐야겠다.


애주가의 결심 -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애주가의 결심 -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앤설로지 산문집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유선사)

글을 쓸 때면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게 흥미롭고 재미있어진다.

마치 학창 시절에 시험 전날이면 꼭 청소하고 싶어졌듯이.

쓰고 있는 글이 반드시 써야 하는 글인데 잘 풀리지 않으면 더 그렇다.


최근에 나는 미친 듯이 많은 책을 읽었다.

무협지에 빠져 살았던 학창 시절 이후로 이렇게 독서가 재미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땐 나무위키에 들어가 떠오르는 키워드를 닥치는대로 검색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인 드라마 각본 집필만 계속 뒤로 미뤄졌다.


집필을 미루고 있다는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읽은 책이 한국문학이면 SNS에 감상을 꼬박꼬박 남겼다.

심지어 올해 안에 마감하기 힘들 줄 알았던 첫 산문집 초고 집필까지 마감 일자보다 빨리 끝냈다.

그러다 보니 각본 집필이 더 뒤로 미뤄지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새벽에 이 산문집을 읽고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부작용의 증거다.


그래도 이 산문집이 내게 꽤 위안이 됐다.

저마다 모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나름 글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절실하게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 산문집에 실은 글조차 쓰고 싶지 않았다는 저자들의 고백이 넘쳐난다.

집필 계약을 하고 돈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이 쓴다질 않나, 글을 쓰기 싫은 이유를 수십 개나 밝히질 않나, 의식의 흐름대로 주저리주저리 문장을 늘어놓지 않나.

전부 내 이야기 같았다.


나도 계약서를 쓰고 아직 출간하지 않은 책이 무엇무엇이 있나 떠올려봤다.

아찔하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아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김혜나 소설집 『깊은숨』(한겨레출판)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사람이다.

인생에서 뒤통수를 맞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테고, 누군가는 흐름에 몸을 맡겨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흘러갈 테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부서질 걸 알면서도 달려들 테고, 누군가는 측면돌파를 시도할 테다.

 

이 소설집의 주요 등장인물은 여성이고 일부를 제외하면 청년 세대다.

그들의 심리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불안을 가라앉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로 표출하는 건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다.

불안을 야기하는 외부 요인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역치가 높아져 불안을 가중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어렵지만 근본적인 방법은 결국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일 테다.


등장인물들이 원하는 삶은 사실 대단하지 않다.

주어진 환경에서 동화책의 마지막처럼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정도로 평범한 삶이 이어지면 족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등장 인물들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만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워 난감해하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일도양단해 정의할 수 없어 당혹스러워하고, 끊어내야 하는 관계인 걸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해 무력감을 느낀다.

등장인물의 선택은 요가를 비롯해 저마다의 다양한 수련 방법으로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마치 <아함경> 같은 초기 불경에 담긴 가르침처럼. 

작가는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변화하는 심리를 포착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누군가에게는 등장인물의 선택이 지나치게 수동적이거나 체념하는 모습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하니까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다.

많은 사람이 SNS를 보며 괴로워하는 이유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 아닌가?

내가 나로 설 수 있으려면 내 중심을 세우는 게 먼저 아닌가?


모두가 혁명가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진 않다.

불완전한 나를 받아들이되, 불완전을 이유로 나를 망가뜨려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는 이 소설집을 그렇게 읽었다.

깊은숨
깊은숨
안보윤 장편소설 『여진』(문학동네)

읽는 내내 기시감이 들었다.

기억을 되돌려 보니 예전에 회사 책꽂이에 꽂혀 있던 계간 자음과모음 과월호를 들추다가 읽은 단편이 장편으로 확장된 작품이었다.

당시에 단편을 읽었을 때 꽤 여운이 깊었던 터라,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은 작품을 읽었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단편은 누나와 자신이 놀다가 일으킨 층간소음 때문에 조부모님이 살해당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 주인공의 조부모를 살해한 남자의 아들과 관련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장편으로 재탄생했다.


글쎄...

그냥 단편으로 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1부만으로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완성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작품이 있다.


여진
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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