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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창비)

단편으로 이효석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남산 아래 오래된 상가 건물에 갑자기 함께 살게 된 할머니와 손녀 이야기를 그린다.

할머니의 이름은 '사귀자', 손녀의 이름은 '아세로라'

임성한 작가의 독특한 작명 센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인데, 그 이름처럼 이 작품은 꽤 무거운 주제를 시종일관 무겁지 않게 다룬다.


사귀자는 하숙집을 운영하다 간첩으로 몰렸던 과거를 숨긴 채 조용히 살아가는 노인이고, 아세로라는 햇살을 피해야 하고 가공식품을 먹지 못하는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겉돈다.

둘은 상가 건물 2층의 등기부상 미등록 공간에서 동거하며 서로 츤데레처럼 굴다가도 의지한다.


사귀자의 지난 삶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비극의 교집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움이 짧아 몇 차례 사기를 당하고, 재개발에 밀려나 머물던 곳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이고, 그저 글씨를 베껴 쓴 것뿐인데 간첩으로 몰린다.

이쯤 되면 차라리 없는 사람처럼 숨어 사는 게 편하다.

세상이 바뀌었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이미 여러 단편에서 보여줬던 발랄한 필치로 민감한 주제를 민감하지 않게 묘사하며 세대를 넘어 두 주인공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읽기 부담스럽지 않고 유쾌하지만, 김애란 작가처럼 장편보다 단편이 더 좋은 작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겐 이 작품이 무게감과 유쾌함을 온전히 결합했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다.

이 작품처럼 현대사와 가족 서사를 엮으면서도 무게감과 유쾌함을 동시에 훌륭하게 살린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 같은 작품도 있었으니 말이다.

없는 층의 하이쎈스
없는 층의 하이쎈스
한소범 산문집 『청춘유감』(문학동네)

작가는 언론계는 물론 출판계에서 소문난 문학기자였고, 그 소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언론사는 보통 중견 기자를 문학 담당 기자로 배치한다. 그만큼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지는 자리에 나이 서른도 안 된 젊은 기자가 불과 몇 년 만에 업계가 인정하는 훌륭한 문학기자가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김훈 선생님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보통 사건이 아니다. 


하필 나는 짧았던 문학기자 시절에 작가와 함께 필드에서 뛰었다. 그리고 백전백패였다. 내가 그 시절에 가장 많이 참고한 기사는 작가가 쓴 한국일보 기사였다. 부지런하고, 관심사가 넓었으며, 이슈의 핵심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했고, 무엇보다도 기사를 참 잘 썼다. 이러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있나. 그렇게 작가는 현재 대한민국 출판, 문학 시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자가 됐다.


작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문학 기자를 꿈꾼 일이 없었다. 소싯적부터 문학에 빠져 소설가를 꿈꿨고, 그 사이에 영화에도 마음을 빼앗겨 버려 한 시절을 불태웠다. 작가는 그저 실패를 거듭하며 이곳저곳을 헤매다 보니 얼떨결에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른바 예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언제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고,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인정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다 보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게 되고, 자기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능 없는 열정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실패와 타협하며 플레이어 자리를 욕심내지 않기로 한다. 이 선택이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문학기자로 이어질 줄은 작가도 몰랐다. 지난 실패가 모두 문학기자로 빠르게 성장하는 자양분이 될 줄은 더 몰랐다.


이 산문집을 읽으며 작가가 훌륭한 문학기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살았고, 많이 울었고, 많이 넘어져봤다. 글 어디에도 과장이 없고, 일부러 겸손한 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진솔하고 담담하게 털어놓을 뿐이다. 깨져 봤으니 안다. 자신이 끝까지 걷지 못한 길을 걷는 이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응원할 줄 안다. 섬세하고 다정한 응원의 문장이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대법원이 명예훼손죄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 법리는 전파가능성이다. 판례는 기자 단 한 명에게 정보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전파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 기자는 국가 공인 떠버리다. 그런 떠버리들이 모인 언론계에서 얼마나 소문이 빠르게 돌겠는가. 어느 매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어떤 사고를 쳤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이는 어떤 기자가 취재를 잘하고 좋은 기사를 쓰는지에 관해서도 금방 소문이 난다는 말과 같다. 단지 서로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다. 기자들은 대체로 질투가 많아 칭찬에 인색한 편이거든.


기자나 기자 출신 작가가 쓴 책을 잘 보도하지 않는 문화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산문집, 솔직히 잘 쓴 책 아닌가? 많이들 기사화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먼저 나서서 떠버리 흉내를 내봤다. 읽는 내내 입가에 머무는 잔잔한 미소를 지울 수 없었던 좋은 산문집이었다.


청춘유감 - 울면서 걷기, 넘어지며 자라기
청춘유감 - 울면서 걷기, 넘어지며 자라기
김종연 장편소설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자음과모음)

재난 발생 후 이재민의 일상과 심리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 속에서 발생한 지진은 대한민국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는 아니다.

아포칼립스 수준으로 모든 국민의 삶을 무너뜨린 재해가 아니어서 오히려 묘사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제목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의 배경은 대형마트다.

정부는 임시로 이재민을 대형마트와 같은 공공시설에 집어넣고 곧 주거 공간을 제공해 주겠다며 달랜다.

재해 때문에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 바뀌었어도 사람들은 여전하다.

자연스럽게 파벌이 갈리고, 반목하고, 싸우고.

이런 가운데 느닷없이 화장실에서 낯선 아기가 발견돼 분위기를 반전한다.


재난을 주제로 다룬 장편이지만, 이야기 전개는 의외로 잔잔하다.

우울하지도, 웃기지도 않는다.

그저 일상의 사소한 기쁨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집중한다.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나을 거라는 작은 희망 하나만을 믿는.

"그 삶이 무너진 순간이 아니라 그 삶이 무너진 이후를 살아내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을 잘 요약한다.


동시에 이 작품은 삶은 결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마음대로 멈출 수도 이어갈 수도 없고, 그저 버텨내는 것일 뿐이라는 걸 냉정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가족과 종교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고 뛰쳐나온 인물인데, 오히려 가족과 함께했던 일상보다 마트에서 보내는 낯선 일상에서 더 즐거움을 느낀다.

낯선 곳에서 만난 타인보다 가족이 더 자신을 힘들게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될 정도로.


문장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어 쉽게 읽히진 않았다.

10분이면 걸어갈 길을 이곳저곳을 복잡하게 거쳐 1시간이나 돌아서 가는 듯한?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다.

그래서 쉽게 읽히진 않았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문미순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나무옆의자)

이 작품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간병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고령화 문제는 빈약한 사회 안전망 및 저출산 문제와 맞물려 간병 파산이나 살인과 같은 비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치매 어머니를 돌보는 중년 여성 '명주'와 뇌졸중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는 청년 남성 '준성'의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주며 복지의 사각지대를 조명한다.


두 주인공의 삶은 비극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대아파트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살던 명주는 어머니가 죽자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참고해 시신을 미라로 만든다. 어머니 앞으로 나오던 연금이 끊기면 자신도 살길이 막막해진다는 이유로. 뉴스로 보도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연금부정수급 사례가 오버랩된다.

준성은 아버지를 돌보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대리운전을 뛴다. 형은 사업을 핑계로 외국으로 떠나 돌봄은 오로지 준성의 몫이다. 아무리 일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데, 벤틀리를 대리운전하다가 거액의 수리비를 물게 될 처지에 놓이고, 아버지도 집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다. 이때 옆집에 사는 명주가 준성에게 손을 내민다.


둘의 선택은 불법이고 패륜이지만 이를 대놓고 비난하긴 어렵다. 전 직장에서 일하다가 발에 화상을 입은 명주는 사실상 노동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명주는 사회복지망에서 걸려들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나밖에 없는 철없는 딸은 호시탐탐 명주의 주머니를 털을 궁리만 한다. 준성이 물어야 할 수리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인데, 대리운전업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든 책임을 준성에게 미룬다. 


이렇게 표현하니 절박하고 잔혹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막상 소설을 읽으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후반부는 경쾌하기까지 하다. 심각한 주제에 짓눌리지 않는 작가의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이로써 작가는 간병 문제를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 두어야 하는지 무겁지 않게 화두를 던진다.


장편소설 공모가 화제성을 잃은 지 꽤 됐다.

창비장편소설상은 폐지됐고, 문학동네가 주관하던 여러 장편 문학상이 문학동네소설상 하나로 합쳐진 지 몇 년 됐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도 예전만큼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수림문학상도 마찬가지고.

세계문학상 수상작도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 이후로는 많이 팔린 작품이 없다.

<망원동 브라더스>의 선전은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감투보다는 김호연 작가의 개인기에 더 의존한 면이 크고.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세계문학상 수상작 중 가장 인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장편 공모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었다.

출판사 투고로 이 장편이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 

공모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접할 기회도 없었을 테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차무진 장편소설 『엄마는 좀비』(생각학교)

작가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물 <인더백>을 손에 땀을 쥐며 읽은 기억이 있어 이 작품의 제목을 보고 외면하지 못했다.

<인더백>에서 처절한 부성을 그려낸 작가가 엄마를 좀비로 그린 청소년소설을 썼다니.

<인더백>과 다른 착한 결말일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어떻게 엄마를 그렸을지 궁금해 책을 펼쳤다. 


'중2'만큼이나 무섭다는 '중3'인 주인공은 엄마와 단둘이 산다.

아빠의 불륜 때문에 가족이 해체됐고, 엄마는 아빠의 도움을 완전히 거부한다.

주인공도 가족 해체의 원인이 아빠에게 있음을 잘 알지만. 그 책임을 손쉽게 엄마에게 돌린다.

주인공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엄마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좀비로 변하고,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주인공은 엄마를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 과정에서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며 철이 든다.

예상대로 이 작품의 결말은 착했다.

마치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린 좀비 로맨스 영화 <웜 바디스>처럼.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이니까 생략한다.

<인더백>과 비교해 읽어보면 '갭모에'가 느껴져 슬쩍 웃음이 날 것이다.

엄마는 좀비 - 엄마가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할래?
엄마는 좀비 - 엄마가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할래?
서윤빈 소설집 『파도가 닿는 미래』(허블)

한국과학문학상은 김초엽, 천선란 등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며 SF를 넘어 기존 문단에서도 주목하는 신인 등용문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SF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낯선 시공간 위에 현재가 겹쳤을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비감 때문이다.

수상자의 첫 단행본을 읽는 일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을 살피는 일임과 동시에 이 사회의 문제점을 다른 필터로 살피는 일이기도 할 테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주제는 대부분 불안정한 일자리다.

일러스트레이터가 AI에 밀려 다른 진로를 찾고('페가수스의 차례'), 해녀가 바다 대신 우주에서 숨비소리를 내며('루나'), 자율주행 AI 때문에 보험 업계 종사자가 일자리를 잃는다('마음에 날개 따윈 없어서').

작가는 토크쇼 '아침마당', 가상화폐, 밴드 넬(NELL), 청계천 등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를 적극 끌어와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을 넓힌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은 때로는 흥미롭고 때로는 섬칫하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한 지 꽤 됐다.

저 멀리 동해안의 물횟집이나 제주도의 해장국집에서도 키오스크가 주문을 받고 로봇이 음식을 테이블로 나르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MZ세대 젊은 작가가 바라보는 미래는 마냥 어둡진 않다.

작가는 결국 사람은 결국 사람을 믿어야 불안정한 세계를 무사히 돌파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막막한 우주에서 자신의 명줄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명줄을 풀고 그 우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루나').

재미있게 읽었다.


P.S. 작가의 말을 읽다가 단편 '유전자 가위 시대의 부모 되기'에 영감을 준 영화가 <삼거리 극장>이라는 언급을 봤다. 준면 씨가 출연한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을 여기서 다시 만나 반가웠다.


파도가 닿는 미래
파도가 닿는 미래
설송아 장편소설 『태양을 훔친 여자』(자음과모음)

2015년 겨울, 평생 비참하게 살았던 한 여성 '봄순'이 평양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고 자신의 목숨도 잃는다.

그렇게 이 세상과 바이바이 하는가 싶었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1998년 신혼 무렵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봄순은 과거로 돌아왔다.

화폐개혁, 장마당의 탄생, 시장경제의 활성화 등 미래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모두 아는 상태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뚫고 기업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봄순은 온갖 노력 끝에 받은 훈장을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떡 장사를 해 종잣돈을 마련하고, 그 종잣돈으로 주유소를 세워 큰 돈을 번다.

봄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항생제 제조까지 뛰어들어 돈을 쓸어담는다.

하지만 자신보다 잘 나가는 봄순에 열폭한 남편이 불륜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치는데 이어 그녀의 돈을 가로채고자 모함한다.

모든 걸 잃고 감옥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신세에 놓이는 봄순은 과연 어떻게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고 무대를 북한으로 옮기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의 디테일은 <재벌집 막내아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여성의 지위, 부패의 끝을 달리는 공산당 간부들의 탐욕, 죽지 못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생활상 묘사가 마치 눈앞에서 바라보듯 생생하다.

일부 언론이 출처 불명의 정보로 쓰는 북한 관련 기사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다.

작가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이력을 살펴보니 탈북자 출신이다.

이러니 디테일이 엄청나지.


탄탄한 장편이라는 말은 솔직히 못하겠다.

과거로 회귀한 이유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는 등 허술한 부분이 보이고, 문장도 굉장히 거칠다.

출판사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봤을 정도다.

하지만 엄청난 디테일이 이 모든 단점을 덮는다.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편이다.


태양을 훔친 여자
태양을 훔친 여자
임제훈 장편소설 『1그램의 무게』(북레시피)

이보다 하이퍼 리얼리즘 장편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작품의 주제는 마약(그중에서도 필로폰)이고, 작가는 실제로 캄보디아에서 마약을 밀수하고 SNS로 판매하다가 검거돼 4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다.

심지어 주인공 이름까지 저자와 같다.


이 작품은 그동안 막연하게 알려졌던 마약의 위험성을 진짜 '업자'의 시각으로 잘 보여준다.

작가는 캄보디아에서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된 순간부터 한국으로 송환돼 감옥 살이를 하는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낸다.

시간순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풀어내기에 느껴지는 현장감이 장난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마약 유통이 어떻게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았다.

더 무서운 사실은 마약 사범이 고등학생, 가정주부, 취준생 등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란 점이다.

마약을 국내로 밀수해 포장하고 유통하는 과정, 배달하는 수법, 마케팅 방법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를 읽으며 내가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회의 아름다운 면만 보고 살았다고 한탄했다.


주인공인 처음에 그저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감옥에서 실제 마약 중독자들을 만나며 자신이 대한민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데 일조했음을 깨닫고 자기 혐오에 휩싸인다.

이 작품이 묘사하는 마약 중독자의 모습을 보며 기가 차서 자주 한숨을 쉬었다.

작가는 대한민국 사회의 바닥으로 보였던 현실 아래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지하실이 있음을 보여준다.

욕심이 두려움을 이기는 순간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드는지를 보면 공포스럽다.


마약에 관한 다른 의견을 담은 책으로 오후 작가가 쓴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동아시아)가 있다.

이 책은 세계 각국의 사례와 통계를 바탕으로 마약을 법으로 금지했을 때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크다고 논쟁적인 주장을 한다.

우리가 마약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편견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소설과 비교해 함께 읽어보길 추천한다.


1그램의 무게
1그램의 무게
문지혁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민음사)

독자는 자주 작품과 작가의 삶을 동일시한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작품 내용이 정말 본인의 경험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고 답할 뿐이다.

그 말이 가장 진실에 가깝기도 하고.

그런데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를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이지?

나는 일인칭 시점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도, 두 작품이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초급 한국어>는 주인공 '문지혁'이 미국의 모 대학에서 현지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강의하는 일상을, <중급 한국어>는 주인공이 귀국해 강원도의 모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상을 그린다.

 

나는 <초급 한국어>를 몇 년 전에 읽었다.

당시에는 그냥 가볍게 읽고 묻어뒀던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일탈 없이 바르게 살아오다가 어른이 된 모범생 같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내가 읽기엔 지나치게 착하고 무해한 글이었다.

가끔 소소한 아재 개그가 튀어나와 피식 웃게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중급 한국어>도 <초급 한국어>와 결이 크게 다르진 않다.

하지만 주인공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대상이 한국인이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겼기 때문에 일상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전작보다 더 깊고 생활에 밀착한다.

불안한 일자리를 붙들고 쉽지 않은 육아를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중심을 지키고 자신만의 소설을 완성하려는 40대 가장의 분투.

나는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초급>보다 핍진한 <중급>이 훨씬 더 좋았다.

특히 자신의 애매한 처지를 고백하고 또 극복하는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다.

이미 알려졌듯이, 작가는 이른바 등단도 안 한 채 책을 낸 '무면허 작가'다.

책을 냈으니 작가는 작가인데, 이 바닥에서 인정하는 등단을 하진 못했으니 작가로 자칭하긴 겸연쩍은.

 

여러 차례 실패를 맛본 작가, 아니 주인공의 선택은 "그냥 내 이야기를 쓰자. 나를 쓰자"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다.

"일단 아무거나 쓰고, 그걸 소설이라고 우기세요."

최근에 읽은 모든 소설의 문장 중에서 가장 위로가 된 문장이었다.

초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이서수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은행나무)

올해 초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보수) 결과’를 보면, 2021년 12월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333만 원이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면 평균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지난 2013년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국회의원 평균 재산은 94억9000만 원이었다.

국회의원을 엄청난 자산가처럼 보이게 만든 원인은 정몽준 전 의원 때문이었다.

정몽준 한 사람의 재산이 전체 국회의원 재산 합계보다도 많았으니까.

그를 제외하고 평균을 내면 23억3000만 원으로 뚝 떨어졌다.


진짜 보통 사람의 소득 수준을 알아보려면, 평균소득이 아니라 임금근로자를 소득순으로 줄 세웠을 때 중간에 위치하는 값인 중위소득을 살펴야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중위소득은 250만원이다.

즉 대한민국 전체 근로자의 절반 이하는 250만원을 벌지 못한다는 말이다.

20대 청년 세대의 평균 소득은 윗세대보다 한참 낮아서 250만원 수준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중위소득은 그보다도 훨씬 이하일 테다.

그게 대한민국 청년 세대의 명백한 현실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면 다들 골프를 치고, 오마카세를 먹고, 호캉스를 하고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스타그램뿐만이 아니다.

나는 동시대 한국 소설을 정말 많이 찾아 읽는 독자라고 자부하는데, 신간을 읽을 때마다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이서수 작가는 김의경 작가와 더불어 평균소득이 아니라 중위소득 이하에 속한 청년의 일상과 심리를 핍진하게 들여다보는 몇 안 되는 젊은 작가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역시 현재 대한민국을 사는 '진짜' 청년 세대의 주거, 노동 문제 등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그린다.

이 소설집 자체를 청년 세대를 위한 정책을 만들기 위한 사례집이나 보고서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말이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실제 청년 세대가 어떤 삶을 사는지 알고 싶다면 이 소설집을 들여다보라.


젊은 근희의 행진
젊은 근희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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