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고향 마을에 들를 때면 나는 이무기가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 없다면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변해버린 지질과 환경에 혼란스러워하며 어두운 땅속을 헤맬지, 슬픔에 빠져 헤어진 연인을 찾고 있을지.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북명 너머에서-,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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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남편의 주위를 떠도는 유령은 누구일까. 그의 과거?전우들?그럼 내 유령의 이름은 뭘까. 조옥?구덩이? 혹은 이런 것들. 에꼴드빠리, 엘튼 존, 작은새, 모닝커피. 그리고 청자와 추자와 이무기가 몸속 어딘가에 고여 어떤 기술로도 빼낼 수 없듯 박혀 있다면.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북명 너머에서-,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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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ulove
“ 가끔 이무기가 살던 연못이나 연인들이 나오는 꿈을 꿀 때면 그곳에 내가 있었다는 환시가 아침까지 생생하게 이어졌다. 꿈에서 연못의 물은 흘러넘쳤고 사랑에 빠진 이무기와 수많은 사람들이 환한 대낮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무기를 떠난 처녀가 나였더라면 우리는 옛날이야기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 구덩이를 사랑했다는 걸, 절망한 이무기와 이별과 실패한 오욕이 고인 빈 연못을 한없이 원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이 뭔지도 모를 때부터. 새벽마다 마음 졸이며 아버지가 죽거나 사고를 당한 건 아닐까 괴로워하던 어머니처럼. 그게 사랑이라면 날마다 지나치는 구덩이를 향해 뛰어들고 싶은 마음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얼마나 많은 시체와 이루지 못할 마음이 묻혔든지 간에. 저 텅 빈 구덩이만큼 안락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그것만으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고 매일 아침마다 생각했다면.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시간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겪고 또 겪었다면.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p.242-243,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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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ulove
“ 내가 구덩이라면. 혹은 진흙이라면. 물과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면, 진득한 몸으로 어디든 달라붙을 수 있다면. 아니 연못이라면. 흐르고 넘쳐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뛰어들 수 있다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 이성자가 아닌 무엇이라면. 내가 조옥이라면. 그런 열망이 예기치 않게 급습할 때면 오한이 나듯 몸이 떨리고 추위가 밀려왔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몸의 허락이 필요했다. 자꾸 나에게 묻고 비밀을 되새겨야 했다. 바깥은 봄인데 내 몸 어딘가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 갔다.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p.250,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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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ulove
“ 나는 구덩이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여 안을 들어다봤다. 골목 끝에서 커진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구덩이 안을 비췄을 때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곳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빛에 반사된 물방울이 반짝거리며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이무기가 살던 멀고 먼 옛날처럼, 연못이 흘러넘치던 꿈속 풍경처럼. 나는 무릎을 꿇고 구덩이 바닥에 고인 검은 웅덩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어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가로등이 꺼지고 온 세상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이무기가 돌아올 때까지.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p.270,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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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나
무언가를 이루려면 허락이 필요했다. 자꾸 나에게 문고 비밀을 되새겨야 했다. 바깥은 봄인데 내 몸 어딘가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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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 동생들이 모두 대학에 가면 좋겠지만 가도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 사촌이 백화점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어떤 기회가 왔다는 것을, 살다 보면 한 번쯤 만나는 그런 행운이 스물셋의 봄, 나에게 찾아온 것을 직감했다.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p.239, <북명 너머에서> 중,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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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 내가 구덩이라면. 혹은 진흙이라면. 물과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연. 진득한 몸으로 어디든 달라붙을 수 있다면. 아니 연못이라면. 흐르고 넘쳐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뛰어들 수 있다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 이성자가 아닌 무엇이라면. 내가 조옥이라면. ”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p.250, 안보윤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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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나는 손톱만 한 스푼으로 커피를 저어 노른자를 건져 먹는다. 비리고 뭉근한 형체가 남의 혀처럼 입 안을 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