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책읽기 말씀하신 101페이지에 보면 '송과선(pineal gland 혹은 pineal body-옮긴이)'이라고 적혀 있어요.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op_hty&fbm=0&ie=utf8&query=pineal+gland
네이버에 검색하면 바로 이렇게 뜨고요. 검색을 'pine gland'로 하셔서 그런 거 같아요. 'pineal gland'로 검색하시면 솔방울샘이라고 바로 나옵니다.
[책 증정(선착순)] 철학자 47인과의 대화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D-29
서쪽에뜨는달
작가와책읽기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Eins
@모임
첫 발제를 맡아주신 분께서 심오한 질문으로 시작하셨으니, 저는 보다 가볍게 살짝…! 묻어가볼까 합니다😁
5장, 스피노자의 "인간은 어떻게 '최고선'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읽어보셨는지요. 78쪽의 문장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칙을 강요해가며 자연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으로 인간 자신의 태도를 통제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소박함과 동요하지 않음에서 오는 평온을 추구했다고 보아도 좋을텐데요. 조금 비껴가 스토아철학의 난점에 주목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질문 1. 5챕터를 읽고, 스피노자의 "현자"상에 대한 선생님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질문 2. 우리는 진실로 "현자"의 동요하지 않는 마음, 모든 것을 평온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원하는 걸까요? "현자"는 나와 타자의 슬픔에도,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인간상일까요?
위버m
답변 1.
플라톤의 철인과도 비슷한 느낌입니다. 수동적 감정은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산의 영역입니다. 이를 따라 살아간다면 나는 언제나 외부 세계가 가져오는 우연적 일들에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다만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완벽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언제나 추구의 상태로 여겨지고, 그렇다면 아주 바람직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답변 2.
현자가 동요하지 않는 것은 정념이라는 수동적 정서에서 벗어나 능동적 정서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수동적인 것은 인간을 예속 상태로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현자가 아니지만 정념을 뒤로 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정당한 슬픔이나 고통이라면 충분한 공감과 연대가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정당하다’는 표현이 조심스럽지만요. 정념이 아닌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아주 단적인 예를 들어 살인자가 감옥에 갇혀 자유를 뺏긴 고통을 호소한다면 공감할 수 없겠지만, 누군가 자신이 세운 삶의 규칙을 지키지 못해 슬퍼한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연대의 영역이 달라지겠다 생각해요.
CTL
1. 스피노자는 삶의 규칙으로 쾌락이나 금전 등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 반드시 건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꼽았으니 요즘 시대 유행어를 쓰자면 '워라벨'을 굉장히 중요시했던 사람같아요. '과유불급'을 실제 생활의 모토로 삼았을 듯 하고요. 그러니 스피노자에게 '현자'란 '정념' 즉 지나친 열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도 수긍이 가고요. 마치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과정에서 말하는 세속의 집착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도 연상이 됩니다.
2. 스피노자의 '현자'는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아요.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MBTI의 철저한 T형 같은데 공감과 연대는 T형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고통이나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네가 이런 규칙에 따라 생활하지 않고 이성적인 절제없이 지나치게 해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지금 그런 거야.'라고 말할 것 같은 스피노자형 현자는 '현자'는 커녕 상처에 소금치는 인간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이 불교 교리 내용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은 점이 흥미로왔고, 신과 자연을 합일시 한 것도 드디어 기독교에서의 창조자로써의 신의 개념을 벗어난 점에서 사상의 새로운 지평선을 연 대단한 점이라고 보았고, 실제 본인의 생활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며 굉장히 실용적으로 살아간 점에 매력을 느낀 철학자입니다.
siouxsie
질문1.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이상향이지 않나 싶습니다. 스피노자도 현자가 되자라기 보다는 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행합일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질문2.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건 AI이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하기는 하죠. 하지만 개개인에 따라 평온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치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평온히 지낸다고 해서-내면엔 폭풍이 불고 있을 수도 있으나- 타자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할 것 같지 않습니다. 감성적으로 같이 울어주고 슬퍼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현자이고요. 행동으로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겠죠? ㅎㅎ
아이스
@벨1 안녕하세요, 벨1님! “서양철학의 오류”를 찾아 정정했다는 말은 감수의 말에 없습니다. “소소한 내용의 착오와 사 실관계가 틀린 부분들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 부분은 담당 편집자님께 확인해보니 역사적 배경, 생몰연도, 영문 표기 등이었습니다. 내용상 의문이 드는 내용들은 감수자 안광복 선생님과 의견을 나누고 수정했으니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BOGO
'소소한 내용의 착오와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들'..이라는 곳에 각주를 달고 하단에 '역사적 배경, 생몰연도, 영문 표기 등이 었다' 라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Clear 하지 않겠어요? 독자가 오해하게끔 감수자가 글을 썼어요.
서쪽에뜨는달
@CTL 철학 용어들은 일본식 표현이 많다고 하네요. 관련 기사 퍼왔습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8363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us) 나투라 나투라타(natura naturata)"라는 말을 그는 좋아한다. 일본인들은 이를 능산적 자연(能産的 自然), 소산적 자연(所産的 自然)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는 이걸 누가 제대로 알아듣겠느냐고 비판한다. 그래서 나온 그의 번역은 앞의 것은 "자연스럽게 하는 힘", 그러니까 저절로 하게 되는 힘, 그리고 뒤의 것은 "그 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위버m
@모임
✔️ 철학의 주요 흐름은 훑어만 보기도 벅찬데 주제별로 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여겨지는 1장, 2장, 3장부터 현실 속에서 숙고할 수 있게 하는 4장, 철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목표를 스스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5장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성을 따라 읽다 보면 이해도 빠르고 더 깊게 탐구할 수 있어요.
✔️ 더 알아보고 싶은 주제를 탐독할 수 있도록 관련서적을 소개해주는 것이 특히 좋습니다. 가독성 높은 책으로 골라주신 따뜻한 배려에 더 감사합니다.
✔️ ‘들어가며’ 부분에서 대중문화나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화두를 열어주는 부분이 정말 좋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숙고하며 철학하는 순간을 잡아 손을 끌어주는 느낌이에요. 자연스럽게 주제에 대한 흥미가 올라갑니다. 대머리지수도 재밌어요, 아이스 브레이크!
대머리 지수는 단순히 내용의 난해함 보다는 기존 철학의 명제를 얼마나 뒤집었느냐에 따라 잘 평가된 것 같습니다. 각자 느끼는 난이도는 다르겠지만, 철학사에서 줄기가 된 생각의 흐름을 따라 곁가지를 뻗거나 방법론을 심도 있게 연구한 내용은 대머리 지수가 낮은 편이고,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처럼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칸트와 헤겔은 대머리 지수가 높네요. (아직 뒷부분은 못 읽었습니다. 발제를 위해 맡은 부분부터 서둘러 읽었어요 ^^) 저는 언어철학 부분이 가장 어렵게 느껴졌어요.
1장을 읽다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주장이 보입니다. 조금씩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만 겹치는 부분도 꽤 있는데요. 2장으로 넘어가면 전혀 반대되는 주장도 있고요. 저는 여기에 집중해서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질문 1.] 필연적이고 예정된 자신의 존재와 그에 따라 사는 자유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 스피노자: 인간 자신을 포함한 세상 만물은 필연성에 따라 활동한다. 사물의 본성에는 그 무엇도 우연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현자는 자신과 신과 사물을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인식하며,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늘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누린다. (p77-78)
- 라이프니츠: 인간의 자유는 ‘임의 선택’이라는 의지적 결정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전 방향에 순응하면서 방해 없이 자아를 실현하는 것, 자신에게 예정돼 있는 존재로 되는 능력이 곧 자유라고 보았다. (p87)
- 헤겔: 인간의 자기의식은 자기 외부의 대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확립된다고 말한다. 자기의식의 확립에는 또 다른 중요한 단계가 있는데, 바로 또 다른 자기의식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승인은 종종 상호적이다. (P144)
[질문 2.]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절대적 도덕의 명제가 가능할까요?
(살인의 예를 든다면, 대부분 그것은 악이라고 판단하지만 a. 심각한 위협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 b. 전쟁터에서 적군을 향한 행동, c. 총기난사범을 제압하는 과정 등 수많은 예외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의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의도’의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도 수없이 의미가 달라지겠습니다.)
- 흄: 흄은 도덕적 판단은 이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으며 주관적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역할은 참/거짓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감정과 의지는 참/거짓과 아무 관련이 없고, 다만 사실 문제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p122)
- 프레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단어의 내포와 외연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게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해도, 둘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p163)
작가와책읽기
“ 철학자들은 언제나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자 한다. 니체는 특히나 더욱더 격렬하게 그러했다. 그는 울부짖기라도 하듯 고함치며 거칠게 사람들을 흔들어댔다. 철학자들을 가수에 비유한다면 칸트는 속사포 래퍼, 니체는 헤비메탈 록커 같달까. 그런 그의 가장 유명한 하드록 작품이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삶에 대해 미치도록 성찰했던 철학자 47인과의 대화』 --- 「33강 프 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저쥔 지음, 박주은 옮김, 안광복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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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책읽기
하루 10분,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삶에 대해 미치도록 성찰했던 철학자 47인과의 대화위대한 철학자 47인이 철학 고전에서 다루었던 문제들 을 그대로 주된 주제로 삼아 오늘날 우리의 삶을 꿰뚫는 중요한 질문 50가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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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ein
안녕하세요? 함께 나눠보고 싶은 것이 있어 발제로 제안합니다.
32강의 주인공은 쇼펜하우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생명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며, 삶은 욕망과 환상에 이끌려 굴러갈 뿐 다른 내재적 가치는 없다'(p.381)고 단언합니다. 이같은 비관적 세계에서 '종교인으로 존재하는 것'과 '예술과 철학에서 위로를 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탈출구도 제안하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두 가지 탈출구에 모두 동의하십니까? 제 경우, 종교인이지만 비종교인보다 더 욕망에 종속된 사람을 본 적이 있고, 예술가의 엘리트주의와 허위의식도 목도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탈출구로서의 근본적인 의미는 알겠으나 이를 실천하는 인간의 행태는 그렇지 못한 경우겠지요.
쇼펜하우어的으로 얘기하자면 고통과 권태 뿐인 이 삶에서 종교, 예술, 철학 이외 다른 탈출구가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같은 책을 읽고 나누는 책친구님들의 탈출구를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종교, 예술, 철학이 일개 필부인 저한텐 너무 크고 높고 광활해서요. 감사합니다.
공달복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정작 자신의 행복론에서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따라서 동일한 세계가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서 쇼펜하우어 자신도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한다기 보다는, 고통의 원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이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에 있고 이성적 능력을 이러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전개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수 있다고 말합니다.
poiein
공달복님, 안녕하세요? 코멘트 감사합니다.
저는 타인의 욕망과 제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는 게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직업을 구하고 직장을 선택할 때 , 학교와 학과를 선택할 때, 하다못해 아파트를 살 때 브랜드에 대한 부모님과 나이차 나는 형제의 조언에 흔들리지 않기가 무척 어려 웠어요. '감각적 욕망의 노예 상태'일 뿐 아니라 그 욕망의 주체가 타자에 의한 것일 때 한없이 작고 하찮아져서 울적하곤 했죠. 그래서 철학에 다가서고 싶었구요. 공달복님의 말씀을 접하고 오래 제쳐 두었던 라깡의 책을 어제부터 다시 펼쳤습니다. 고맙습니다.
CTL
쇼펜하우어를 다룬 장의 마지막에 '고독하지 않으면 저속해진다'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면서 살았다니, 자아를 단념하고 종교나 예술에 진정으로 귀의하는 것이 홀로 살아가면서 욕망에의 집착에서 오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나 봅니다. 저는 두 분야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는데 예술과 철학을 같은 카테고리에 넣고 '위로'를 구할 수 있다고 본 게 흥미로왔어요. 저자 본인이 철학 공부 에 일생을 바쳤으니 그런 것일까요? 예술은 그래도 일종의 감각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가치의 교감 내지 재현을 추구하는데 철학은 그러한 구체적인 도구가 없으니 좀 다른 분야가 아닌가 싶은데요...'철학'을 크게 보아서 '문학'에 포함시켜 본 것이라면 구태여 예술과 철학을 구분할 이유도 없었을 것 같고요.
poiein
그렇죠, 어떤 문학 작품은 웬만한 철학서보다 더 인생의 의미와 질문을 던지게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철학도 문학에 포함될 수 있을 테고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문학이 고향'이라는 발언이 나왔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제 짧은 생각에 종교, 철학, 예술 이 셋은 진선미를 향유케 하는 것들이라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탈출구로 제시한 것 같아요. 일상을 예찬케 하는 것들이구요. CTL님 덕분에 혼자 고요히 생각에 잠겨, 충만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위버m
종교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에서 홀로 배를 타고 나아갈(p.380)” 때 지표로 삼을 등대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등대를 보았다고 모두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종교인이지만 더 그릇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쇼펜하우어는 이런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삶에의 의지에 나오는 생식을 ‘단념’하는 것으로 벗어난다고 본 것 같아요. 이게 진정한 탈출인지는 좀 의문이 들지만요.
저는 이 부분도 참 재미있었어요. 같은 욕망을 스피노자는 정념passion이라 하고 쇼펜하우어는 의지will라고 이름 붙이고 관점도 달랐던 것이요.
-
예술에 대한 부분은 제가 생각이 복잡해서 정리가 잘 안되는데요. 쇼펜하우어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전이시킨 것을 예술이라 생각한 것 같아요. (object의 의미로 객체)
그래서 예술은 의지와 표상의 양면을 하나로 합일한 결과가 되고, 성취 이후에 오는 공허나 고통에서 벗어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은 poiein님이 적어주신 것처럼 근본적인 의미는 제시했으나 실천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졌다고 생각해요.
poiein
아.... 스피노자 챕터를 분명히 읽었는데 언급하신 부분은 제가 놓쳤네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이야~ 예술의 정의가 정말 멋진데요. 의지와 표상의 양면을 하나로 합일한 결과, 바로 그런 예술 앞에서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하는 경험을 갖는 것 같아요. 참! 닉네임 위버m은 위버멘쉬와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위버m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파숑루루
철학을 몰라 하나씩 읽기에도 좀 힘들어서 이름을 아는 사람들만 쏙쏙 뽑아 읽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하나 읽고 니체와 푸코 편 읽었는데, 철알못에게 딱인 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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