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

D-29
미니 이모가 그렇게 이야기하더구나. 암브로스 외삼촌이 자란 환경을 생각해보면 어린이로 살 수 있었던 때가 한번도 없었다고 해야 할 거야.
이민자들 p.97,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삼촌이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래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고통이기도 했고,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구원이자 가차없는 자기파괴이기도 했던 거야.
이민자들 p.126,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10월 중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코즈모는 창가에 서서 호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큰 전나무숲과 까마득한 높이에서 고르게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몇 시간이고 쳐다보았다. 그는 손수건을 말아서 쥐고 있다가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깨물었다.
이민자들 p.124,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책을 읽다 발견한 그믐달 올려봅니다
멋진 관찰력입니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저는 만일 한 사람이 당대의 비극을 어떤 식으로든 온전히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파괴되고 말거나 스스로 파괴되려고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자기 시대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은 역사의 걸출한 천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자기 시대는 자기 심장과 같아서 매순간 그것과 함께 하고 매순간 그것을 느끼지만 누구도 그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자기 시대를 타고 태어나지만 시대는 직접 증언되지는 않으며, 어쩌면 끝끝내 증언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식으로만 간접적으로 증언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망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택했다는 점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게서도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연상됩니다. 아델바르트는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히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기억은 되레 자신을 갉아먹기에 이릅니다. 동행하던 코즈모 쏠로몬이 죽고, 쏠로몬 가문이 몰락한 20세기 중반은 공교롭게도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시기와 시간대가 겹칩니다. 그래서일까요. 피니 이모의 언급처럼 아델바르트에게 과거를 얘기하는 것은 고통임과 동시에 자신을 해방하는 일이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델바르트는 그 또한 멈추고자 합니다. 아델바르트는 이서카로 향하고, 판슈토크 하의 정신병동으로 자발적으로 입원해서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합니다. 근데 이러한 행동은 앞서 장에서 본 '독일 민족의 집단적 망각'과는 조금 다르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델바르트의 망각은 수단이 아니라 결과에 가까워 보입니다. 현재를 우회하고 기만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목도한 파괴와 고통을 관통한 결과 말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포충망을 들고 나비를 잡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해서 목도합니다. 환영인지 유령인지 실재인지 제대로 나오지는 않지만,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정신병동에서 육체와 정신이 거의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도 나비 잡는 사람을 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희망적인 인간형에 대한 은유나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비관적이고 약간의 멜랑콜리를 동반하는 인상이며, 굳이 표현하자면 사라져가는 어떤 것에 대한 감상, 몽롱한 꿈속에서 느끼는 고양감 따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더 먼쪽에서부터 한줌씩 사위어가는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3장 마칩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누구도 이런 도시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건물도 참으로 많고, 식물들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소나무 우듬지들. 아카시아, 코르크나무, 무화과나무, 유칼리나무, 노간주나무, 월계수, 실로 나무들의 천국이다. 그늘진 비탈들, 졸졸 흐르는 개울과 우물이 있는 작은 숲들. 산책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아니 경악하게 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매번 다른 장관이 연출된다. 궁전 같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갑자기 협곡에서 끝난다. 극장에 갔다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오면 뜻밖에도 작은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갈수록 좁아지는 어두운 골목을 따라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 줄 알고 낭패감에 휩싸여,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모서리를 돌아서면 돌연 연단처럼 생긴 곳이 나타나 광활한 파노라마를 조망하게 된다.
이민자들 168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과거에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달랐다고 한다. 세상에 있는 호화로운 것들의 90퍼센트가 이 화려한 수도에 집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이 향신료와 보석, 비단과 금을 실어왔다. 야파와 아스칼론의 항구로부터 상품들이 넘쳐나도록 흘러들었다. 예술과 공업이 만개했다. 방벽 앞에는 세심하게 가꾸어진 풀밭들이 펼쳐져 있었고, 요사파트 계곡은 백양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개울과 우물,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 깊은 수로 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어디에서나 시원한 그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괴의 시대가 닥쳤다. 네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모든 마을이 초토화되었고, 관개시설들도 파괴되었으며, 나무와 숲 들이 베어지고 태워져 마지막 뿌리까지 말살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여러해에 걸쳐 예루살렘의 생명을 말살하는 사업을 계획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뒤로도 이 도시는 여러번 공격받았다. 해방과 화평과 파괴가 그렇게 반복되면서 마침내 도시는 완전히 황폐해져버렸고, 찬양받던 땅의 막대한 부는 사라지고 부석거리는 돌만 남았다. 이제 도시는 지구 전역으로 흩어져간 예루살렘 시민들의 머릿속에서만 아득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12월 4일. 오늘밤, 꿈속에서 나는 코즈모와 함께 요르단 지구의 번득이는 공허 속으로 들어갔다.
이민자들 181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막스 페르버⟩~] 마지막 장입니다. '나'는 1966년 가을, 22살이 되던 해에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영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하고서 클로텐에서 출발해서 맨체스터에 도착하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맨체스터에 있는 호텔 아로사에서 짐을 풀고서 본격적으로 그 주변을 탐방하기 시작합니다. 제발트의 다른 산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에도 화자인 '나'는 자신이 왜 하필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인지, 또 거기서 무얼하려고 하는 것인지, 왜 주변을 탐방하고 돌아다니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발트의 걷기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없고 따라서 목적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관광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굳이 목적을 꼽는다면 이동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자신이 맞닥뜨린 풍경을 약간은 거리를 둔 채 시니컬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세세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서 사연을 전해듣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 전체가 정처가 없습니다.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 앞의 운하를 걷다가 항구의 선창 쪽에서 만난 막스 페르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공유하면서 마지막 장 시작합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오후 3시 30분쯤이었다. 얼럼 부인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은접시에 낯선 전기제품을 얹어서 가지고 왔는데, 나를 환영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티스메이드(teas-maid)라고 부르는 차 만드는 기계였는데, 알람 시계도 달려 있었다. 상앗빛 양철받침 위에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몸체가 얹혀 있는 기계는 차를 끓일 때 수증기를 내뿜는 모습이 마치 발전소 모형처럼 보였다. 알람시계에 박힌 야광 숫자들은 새벽의 여명이 흘러드는 무렵이면 은은한 연두색 빛을 발산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그 빛은 밤마다 내게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맨체스터에서의 초창기를 떠올리면 얼럼 부인, 아니 그레이시(그녀는 내게 그레이시라고 불러달라[You must call Gracie]고 했다)가 내 방에 넣어주었던 차 만드는 기계가 내 생명을 지켜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삶에 작별을 고하고 싶은 기분에 빠질 때가 잦았다.
이민자들 194-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차 만드는 기계'가 너무 궁금했는데 책에 사진이 나와 있어 좋았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easmade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차를 끓이는 스테인레스 부분과 중앙에 시계형으로 타이머가 붙어 있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버전이 존재하지만 형태는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당시엔 대중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과거 60,70년대에 영국에서 사용되었고 지금은 사라지는 추세라고 보는 게 맞겠네요. 근 1,2세기는 정말 기계들의 역사 같습니다. 생겨났고 생겨나는 기계의 역사인 동시에 사라진 기계들의 역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요.
일요일에 호텔이 완벽한 적막에 잠길 때마다 모든 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듯한 공허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나마 얻고자 시내로 걸어가서, 19세기에 지어진 이래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새까맣게 변한 거대한 건물들 사이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이민자들 196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분명한 것은 영혼의 고통은 한마디로 무한하다는 걸세. 고통의 극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큰 고통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다시 떨어지는 거야.
이민자들 21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오래간만에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들춰보다가 연결해서 읽을 만한 지점을 발견해서 공유해드립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왜 하나 같이 합의하기라도 한 듯이 산책에 매달렸는지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다양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 '걷기'라는 가장 보편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그려본다. 걷기와 생각하기, 걷기와 문화 사이의 관계와 연결 고리를 찾아내며, 속도 위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걷을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보행에 역사가 있다면 그 역사는 무너져 내리는 굽이와 비슷한 지점에 이르렀다. 공적 공간이 없어지는 지점, 풍경이 아스팔트로 덮이는 지점,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여가를 오그라뜨리고 존재를 짜부라뜨리는 지점, 몸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니 건물이니 하는 일련의 실내에 존재하게 된 지점, 속도 숭배가 몸을 시대착오적이고 약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보행은 반쯤 버림받은 생각들과 경험들로 이루어진 풍경 속으로 접어드는 모종의 전복적 우회다.
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30쪽,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가끔씩 그는 자신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한층 더 가깝게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가변 연소실 설계도를 펼쳐놓고 고심하는 모습이나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연을 가지고 더비셔의 소택지에서 실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훨씬 이전의 사람들에게도 형제애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민자들 p.209,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결정해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부모님이 강제이송당한 것뿐만 아니라 그 믿기지 않는 사망 소식이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도착했던 것, 처음에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그 소식의 의미를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런 일들 말이야.
이민자들 p.240,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책을 다 읽고, 밑줄 그은 문장들과 그 이웃한 문장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거즘 십 오년 여만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책갈피로 꽂혀 있던 전시회 작가 명함도 다시 만났구요:) 책장에서 이 책과 함께 오래 직립해 있던 『토성의 고리』도 내친 김에 읽어보려 합니다.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다정한 안내와 공유하신 문장들, 함께 읽기의 힘을 보여주신 두 분의 대화 덕분에 중단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함께 읽자고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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