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

D-29
산문 『토성의 고리』에 이어서 네 편으로 구성된 연작 산문집 『이민자들』을 읽습니다. 이로써 제발트의 작품 중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은 다 읽게 되는 셈입니다:) ※ 『이민자들』은 총 네 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략 일주일에 걸쳐서 한 장씩, 총 29일간 읽어보려고 합니다. ※ 한 장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안 읽고 얘기하셔도 좋고 아는 척하셔도 좋고 생판 딴 얘기하셔도 좋습니다. ⏤참여 인원과 관계없이 23/11/3에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돌아온 제발디언 @russist 님, 반갑습니다!! 『이민자들』 은 제발트 전작들을 읽지 않아도 이해에는 어려움이 없을까요?
넵! 저는 제발트의 모든 작품이 그 입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출구는 없습니다:) 마음껏 헤매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임시작] 안녕하세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래간만에 다시 그믐을 찾았습니다. 전에는 못 보던 기능들이 많이 생겨서 좋습니다. 각설하고 시작하자면 이 모임은 23년 11월 3일에 시작해서 23년 12월 2일(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끝이 납니다. 이 책이 끝나면 23년 한 해도 지나가겠군요. 모쪼록 마음껏 헤매면서, 각자의 헤맴에 대해서 얘기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은 총 네 편의 연작 산문집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재밌게도 각 산문의 길이가 다릅니다.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긴 산문이 나옵니다. 페이지를 단순 산수로 계산하면 각 장은 30, 46, 104, 117페이지 정도가 됩니다. 차츰 더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페이지 수에 구애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 편을 읽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각자 자유롭게 원하는 속도로 내키는 만큼 읽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첫 장과 세번째 장이 끝나면 하루 쉬겠습니다. 1.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11/3-11/9 (*11/10 쉼) 2.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11/11-11/17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11/18-11/24 (*11/25 쉼) 4.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11/26-12/1 늘 하는 말이지만, 이 모임은 아무런 의무도 강제도 없습니다. 다만 자발적으로 신청하신 모임인 만큼 이 책이 끝날 즈음에는 각자 무언가를 얻어가길 바랍니다:)
'풀잎을 세느라 정신이 없었네요.'라며 그는 우리를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해 해명했다. '일종의 취미 같은 것인데, 괜히 정신만 사나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가닥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의 동작들은 뻣뻣했지만 완벽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헨리 쎌윈 박사라고 소개하는 방식도 이미 오래전부터 볼 수 없었던 구식 예절을 따르고 있었다. (...) 그는 아내가 집주인이고, 자신은 그저 정원에 기거하는, 일종의 장식용 은둔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민자들 p.11~p.12,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반갑습니다:)
저는 '제발트'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진득하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이라면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책장을 펼쳐봅니다. 개인적으로는 20대에 호주로 이민을 갔던 경험이 있어 <이민자들>이라는 책 제목이 유난스레 저에게 다가오기도 하네요. 읽다가 생각나는 단상들 띄엄띄엄 올려 볼게요.
호주로 이민을 가셨군요. 저는 생활 반경을 벗어나는 것을 꺼리고 피곤해하는 타입이라서 외국에서 조금이라도 살다 오신 분을 만나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앞으로도 재밌는 얘기 많이 들려주세요:)
책의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 읽기 시작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일단 산문 제목부터 쭈욱 훑어보았습니다. 그냥 읽었을 땐 무슨 의미인가 짐작이 어려웠는데 첫 번째, 헨리 쎌윈 박사를 통해 사람 이름인가보다 싶은 힌트를 얻어 봅니다. 그냥 봤을 땐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지명 같기도 하고 낯선 언어라 짐작이 어려웠어요. 각 제목이 사람 이름-그리고 부제로 구성되어 있군요. 4명의 이민자들이 주인공일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1. ⟨헨리 쎌윈 박사⟩~] 조금 늦게 시작합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책도 펼쳐보고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요즘에는 책뿐만 아니라 뭐든지 오래 두고 반복해서 보려고 합니다. 여러 책을 보기보다는 한 권을 여러 번 보는 게 좋네요. 그래서 조금 늦어졌다고 핑계를 대봅니다😅 첫 번째 산문을 읽으면서 제가 유심히 본 부분은 화자의 세밀한 시선이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등장하는 고유명사들의 잔가지들을 걷어내면 작고 소박한 길이 드러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잔디무덤과 딱총나무와 루시타니아 월계수 나무 같은 단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잠시 멈춰서 그 단어들을 검색해보고 모양도 살펴보고 특징도 읽어보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식물들을 한 데 뭉뚱그려서 쉽게 '녹음'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 수려하면서도 세밀한 시선은 제발트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작가들은 무한대로 펼쳐진 현실의 압도적인 규모 앞에서 어느 정도로 묘사를 할 것인지 그 한계선을 정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선의 위치가 작가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낼 테고요. 책으로 돌아가 보면, 짧은 단락 하나에도 무수한 수종이 열거됩니다. 나무 이름을 이토록 많이 알고 그 각각의 세세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근방에서 가장 큰 축에 속했던 그 집은 교회 근처였는데, 스코틀랜드 소나무와 주목(朱木)들이 늘어선 잔디묘지가 교회를 에워싸고 있었다. 조용한 길가에 자리잡은 그 집은 촘촘히 엉켜 있는 딱총나무 무리와 루시타니아 월계수들, 그리고 사람 키 높이의 담장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 약간 내리막길이 널찍한 진입로를 걸어내려가 작은 조약돌들이 고르게 깔린 앞마당을 지나갔다. 오른쪽 외양간과 헛간 뒤로는 청명한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너도밤나무들이 높이 솟아 있었고, 나뭇잎들이 이따금 살랑거렸다.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까마귀들이 틀어놓은 둥지가 보였지만, 이른 오후여서인지 새들은 없었다. 고전주의 양식으로 널찍하게 지어진 집의 전면은 온통 포도넝쿨로 뒤덮여 있었고, 현관문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놋쇠로 만든 구부러진 물고기 모양의 고리를 잡고 여러번 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민자들 9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1. ~⟨헨리 쎌윈 박사⟩] 전작에서도 그렇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요, 헨리 쎌윈 박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헨리 쎌윈 박사의 아버지는 뉴욕행 선박 티켓을 샀지만 어쩐 일인지 런던에 떨어지고 맙니다. 헨리 쎌윈 박사는 그런 아버지를 둔 이민자 2세대로서, 영국에 정착해서 케임브리지 의학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이자 의사입니다. 1920-30년대에 개인병원을 운영하기도 하고 대학병원의 외과의로 일하면서 호화로운 결혼 생활을 유지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2차세계대전이 지난 뒤에는 환자를 내팽게친 채 아내와도 이혼하고 현재는 식물과 동물을 돌보면서 점점 졸아드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품 전반에 나오는 배경과 상황과 인물이 그렇듯이, 쎌윈 박사는 어떤 꺾여올라간 극점을 찍고 난 뒤에 완만한 내리막을 걷고 있습니다. 쎌윈 박사의 정원 남쪽 가장자리의 덤불을 지나서 당도한 테니스장은 이제 황폐해져 있고, 그 옆에는 방치되어서 "이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점점 함몰되는" 채마밭이 보이는 식입니다. 쎌윈 박사를 둘러싼 것들은 아주 조금씩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묘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결말도 정해진 수순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화자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나'는 끊임없이 듣는 사람입니다.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잘 작동하는 수음기처럼요. 사람들이 풀어놓는 수다를 중단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책을 읽는 사람도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저자의 이야기를 사실로 '읽어야/들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읽는/듣는 사람은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게 이 들음/읽음을 통해서 '나' 역시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저도 모르게 바꿔 나가니까요. 이번 장의 형식은 다분히 다큐멘터리적이지만, 결말을 마무리 하는 방식은 익숙한 단편 소설의 그것이 떠올랐습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가지를 뻗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디테일을 툭툭 쌓아나가다가 마지막 결말에서 방점을 찍듯이 그간의 디테일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습니다(큰 들짐승 사냥용으로 제작된 장총이 끝끝내 활용되는 것, 또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한 네겔리의 시신이 회수되는 뉴스기사를 접하는 것이 그랬습니다). 대다수 인간의 생몰이 급하게 상승했다가 완만히 하강하는 곡선을 그린다면, 그런 인간들의 집합인 역사 또한 다르지 않은 곡선을 그리게 될 테죠. 단지 이번 산문에서는 그 사라짐(죽음)과 돌아옴(죽음 이후)의 왕복 운동이 좀더 아이러니하고 극적으로 보이게끔 장치됐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재밌게 읽은 부분을 인용하면서 ⟨헨리 쎌윈 박사⟩ 마칩니다. 진도는 마치겠지만 얘기는 계속 열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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