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

D-29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이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이민자들 240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한번 읽기 시작하면 일단 시작한 작업을,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회상과 쓰기와 읽기를 도무지 멈출 수 없는, 그리고 결국에는 가슴을 옥죄어 지극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동화 말이다.
이민자들 243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독일 동화'에 대한 설명인데요, 저에게는 제발트의 글이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목숨을 부지해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수수께끼다.
이민자들 27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나는 이 여자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진을 오래 보지 못한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로자, 루이자, 레아였을까, 아니면 노나, 데쿠마, 모르타(고대 로마신화의 운명의 여신들) 였을까. 방추와 실과 가위를 들고 나타나는 밤의 딸들 말이다.
이민자들 300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담백한 문체로 풀어내는 끔찍한 기억들의 편린. 다쳤다기보다는 깨어졌다고 표현해야 할 인물들의 슬픔과 피폐가 다가옵니다. 그들을 <이민자들>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한국에 처음 소개된 제발트의 문학작품이 <이민자들>라고 하는데 저도 마침 이 작품으로 제발트를 처음 알게 되네요. 여유 있는 독서 모임 일정으로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한 작품 한 작품씩 잘 읽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 주신 모임지기님 감사합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모임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랫동안 잊은 후에도 갑작스럽고 느닷없이 떠오르는 법이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이런 사실을 더 뚜렷하게 실감하고 있다.
이민자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3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막스 페르버⟩] 네 번째 장은 훗날 제발트의 작품 곳곳에서 보게 될 특징들이 보입니다. 이번 산문에서도 듣는 행위가 유독 도드라집니다. 그게 재밌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흔히 작가라고 하면 할 말이 많은 사람, 쓸 것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제발트의 산문을 읽으면서 조금 달리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작품 속 '나'는 끊임없이 듣고 있고, 그로써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을 전해듣고 그렇게 듣는 사람으로서 써야할 의무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전달받거나 듣는데, 이번 장 말미에서 페르버의 어머니인 란츠베르크의 일기를 전달받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는 ⟪아우스터리츠⟫에서 '나'가 아우스터리츠로부터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건네받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어쩌면 쓰기는 듣는 사람의 부차적인 윤리이기도 하고 의무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제발트의 화자는 할 말이나 할 수 있는 말이 많기보다는 해야만 하는 말이 많은 셈입니다. 제가 재밌게 본 점은 막스 페르버의 작업 방식입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한 다음에 화폭에서 물감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소묘 과정도 예외가 아닌데요, 극도로 느리게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소묘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전날 그린 그림을 지워버리기도 부지기수입니다. "연속적인 파괴로 인해 이미 상당히 훼손된 배경에서 결국은 불가사의로 남을 수밖에 없는 표정과 눈매를 발굴해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페르버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페르버의 그림은 까뒤집어진 천의무봉이라고 할 만합니다. 꿰멘 접합부와 솔기만으로 이루어진 옷감 덩어리가 연상되기도 했는데요, 그것들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결과로 수렴해갈 뿐이거나 결과 자체를 거듭해서 그르치는 불완전한 과정의 총합이자 어떤 실패의 총체처럼 느껴집니다. 페르버의 작풍이 왜 그러한 경향을 띠는지는 이후에 나오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시 페르버를 잊고 살다가, 1989년 11월 말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페르버의 그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봉인돼 있던 과거의 기억이 일순 해방됨을 느끼면서, 불현듯 과거 자신이 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모종의 불안을 느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과 성장과정에 대한 대화를 무의식적으로 회피했음을 떠올리고 다시 멘체스터로 가서 막스 페르버를 조우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나'는 페르버에게서 1930년대에 불우했던 독일의 시대 상황을 전해듣습니다. 페르버는 당시 독일인이 정직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삼촌 레오만이 "시대상황이라는 것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면서, 1933년 뷔르츠부르크의 레지덴츠 광장을 찍은 신문기사 속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페르버의 부모님들은 나치스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를 공격했던 '수정의 밤' 이후에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적 있으며, 그 이후 페르버는 부모님과 독일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어쩐지 자신과 레오 삼촌만 영국에 당도하게 되었고 나중에 부모님은 강제이송 당해서 죽음을 맞이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습니다. 중간 이후에 막스 페르버가 '나'에게 전해준 어머니 란츠베르크의 기록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깁니다. 하지만 이 삼십 페이지 분량의 기록이야말로 제발트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일기에서 묘사하는 지극히 평화롭고 일상적인 내용은 이 일기가 페르버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맥락과 극명히 대비되며 그 비극성을 심화하고 있습니다. 페르버는 일기 속에서 어머니가 누렸던 생활, 나아가 그 삶 전체 속에 잠복해 있던 비극의 징조를 읽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속에서 어머니가 끝끝내 누렸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삶을 떠올리고 고통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한편 어머니의 일기 속에서도 '나비채를 든 아이'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데요, 마치 지진운의 아름답고 기하학적인 무늬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비극의 징조처럼 활용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발트의 화자들이 왜 자꾸 걷는지 한번 제 생각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말하면 제발트의 산책의 핵심은 목적지가 아니라 '이동' 그 자체에 있는 듯합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머물렀던 자리를 살펴봄과 동시에,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제발트 본인부터가 나치에 부역한 아버지를 둔 (1) '독일인'이자 (2) 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있었던 '백인 남성 지식인'으로서 이중으로 특권화돼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좀더 개인적인 배경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작가'라는 특수한 위치에 착안해서 말해보고 싶습니다. 작품에서 제발트로 추정되는 '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고 그 인물이 말한 바를 하나로 취합하는 서술자의 지위에 놓입니다. 즉 자신의 특권된 위치를 지적하고 서술할 때조차 서술자로서 그의 위치는 특권적이라고 지적할 여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동이 끊이지 않는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게 아닌가 합니다. 화자는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끝내 정주하려고 걷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이동, 그 버림 와중에 있으려고 한다는 인상입니다. 그의 산책은 어딘가에 닿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가 점유한 자리를 뒤로 밀어내고, 뒤돌아보며 확인하고, 눌러앉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제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산책자적 시지포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로써 네 번째 장 마칩니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벤치에 앉아 물의 연극을 보고 들었다. 그리고 소금물이 농축되면서 실로 기묘한 석화와 결정의 형태들을 만들어내는, 그 모요하고 오랜 과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형태들은 자연을 모방하면서 동시에 보존하고 있었다. 1990녀에서 1991년 사이의 겨울 내내, 나는 대개 주말과 밤에만 허락되는 얼마 되지 않는 자유시간에 앞에 적어놓은 막스 페르버의 이야기를 집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때로 몇시간 혹은 며칠 동안 전혀 진척이 되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 심심찮게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해야 하는 매우 힘겨운 작업이었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나는 점점 더 소심해졌고, 그럴수록 작업을 전혀 진척하지 못하는, 일종의 마비상태에 빠져드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소심해져간 것은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묘사하는 대상을 적절하게 재현하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글 쓰는 행위 자체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민자들 293-94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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