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

D-29
그러게요. 독일어에 문외한이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의역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읽어봐야겠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 ~⟨파울 베라이터⟩]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S시에서 파울을 조사하던 도중 파울의 장례식을 책임졌던 란다우 부인을 만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파울의 몰랐던 배경을 알게 됩니다. '나'가 유년의 기억 속에서 파울 베라이터 선생이 이따금 내비쳤던 슬픔과 우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던 울분 뒤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을 전해듣고, 그 배면에 놓인 역사적 상황도 유추해보게 됩니다. 란다우 부인은 파울이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 시기를 거치면서 반(半) 유대인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반의 반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마저 잃게 된 사연을 전합니다. 이런 요약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장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 인물이 자기 국가로부터 소외되어 중간인으로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나치 하에서 암묵적으로 공모한 독일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한 인간이 소외되고, 급기야 독일 내부의 이민자가 되어 육체와 정신 양쪽에서 추방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란다우 부인의 입을 빌려 동시대의 독일인들의 침묵과 다분히 의도적인 집단적 망각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번 장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로 전반부에 '나'가 유년의 기억을 서술하는 부분과 후반부의 란다우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부분입니다. '나'라는 화자의 진술에서 란다우 부인이라는 타인으로 진술이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나'에서 '나의 기억'으로 또 '나'가 만난 란다우 부인이 말하는 '나'로 진술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3인칭이 은폐된 1인칭이기도 하며, 1인칭은 거꾸로 은폐된 3인칭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특유의 서술이 소축적과 대축적을 오가는 역사적인 서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듯합니다. 제발트의 산문은 아주 작은 것들의 역사를 다룸으로써 그것의 총합들인 더 큰 역사를 환기합니다. 비극 그 자체를 직접 다루지 않고 그것이 파생한 효과와 사건을 멤도는 방식으로 서술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나'가 끊임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와 맞닿아 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또 무의미한 것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황현산 선생이 문학은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재능이기도 하다고 하신 말씀도 떠오르네요. 이로써 2장 마칩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들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이민자들 6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 인물이 자기 국가로부터 소외되어 중간인으로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나치 하에서 암묵적으로 공모한 독일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한 인간이 소외되고, 급기야 독일 내부의 이민자가 되어 육체와 정신 양쪽에서 추방되고 있는 것입니다" 써주신 글을 읽으니 명료해지네요. '파울 베라이터'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비극적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거든요.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한 일들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하지만 파울의 삶은 다른 측면에서 저에게 울림이 있었는데요, 적어주신 것처럼 내가 살던 국가에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의 피에는 유대인(1/4)보다 아리아인(3/4)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 갑자기 섞여 들어온 집단도 아니고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그 곳에 살아왔었죠. 사유재단 박탈과 직업자유의 제한 같은 국가의 폭력도 그를 무력하게 하고 피폐하게 만든 요소였겠지만 그의 영혼을 더 크게 파괴시킨 건 함께라고 생각했던 공동체 구성원들의 “비극을 고소해하는 태도(p.72)” 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하루 늦었습니다. 세 번째 장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사실 뭐라고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이번 장부터 호흡이 조금 길어지고 등장인물도 많아지고 구성도 복잡해집니다. 이번 장을 읽으면서 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작가나 책을 일컬어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런 수사들을 볼 때면 과장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처럼 거북스럽고 싫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런 표현이 오해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세 번째 장은 화자인 '나'가 테오 이모부의 죽음을 접하고 홀로 남겨진 피니 이모를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유년의 한 때를 떠올리면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를 궁금해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나'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와의 접점은 1951년 어느 일요일 오후 한 식당에서 친척들이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커피 모임을 가졌던 것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피니 이모와 카지미르 삼촌의 불분명한 기억을 경유해서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라는 인물을 조금씩 구성해갈 수밖에 없는데요, 비유컨대 기억의 미궁의 최외각에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심부로 접근해가는 구조를 띠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중심부에 도달해도 거기에는 텅 빈 풍경만 놓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화자로서 '나'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메모장 속 '나'가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고 있는데 이는 의도된 혼란으로 보이며, 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구절을 공유하면서 세 번째 장 시작합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18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지루한 수업시간이나 저녁때가 되면 나는 미국에서 보내게 될 나의 미래를 아주 다채롭고 자세하게 상상해보곤 했다.
이민자들 p.89,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저도 어렸을 때 다른 세상에서의 저의 미래를 공상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반가워 밑줄그어 봅니다.
세번 째 이민자,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다섯 살때 장에 나가 나무 열매를 파는 일을 시작으로 호텔 사환, 일본 사절단의 시종, 전 세계를 떠 돌며 온갖 일을 한 암브로스 외삼촌의 삶은 정말 고된 노동 그 자체입니다. 다른 가족들의 삶 역시 궁핍하고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미니 이모가 그렇게 이야기하더구나. 암브로스 외삼촌이 자란 환경을 생각해보면 어린이로 살 수 있었던 때가 한번도 없었다고 해야 할 거야.
이민자들 p.97,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삼촌이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래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고통이기도 했고,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지. 말하자면 구원이자 가차없는 자기파괴이기도 했던 거야.
이민자들 p.126,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10월 중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코즈모는 창가에 서서 호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큰 전나무숲과 까마득한 높이에서 고르게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몇 시간이고 쳐다보았다. 그는 손수건을 말아서 쥐고 있다가 절망감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을 깨물었다.
이민자들 p.124,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책을 읽다 발견한 그믐달 올려봅니다
멋진 관찰력입니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저는 만일 한 사람이 당대의 비극을 어떤 식으로든 온전히 기억한다면 그 사람은 파괴되고 말거나 스스로 파괴되려고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자기 시대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은 역사의 걸출한 천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자기 시대는 자기 심장과 같아서 매순간 그것과 함께 하고 매순간 그것을 느끼지만 누구도 그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자기 시대를 타고 태어나지만 시대는 직접 증언되지는 않으며, 어쩌면 끝끝내 증언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식으로만 간접적으로 증언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망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택했다는 점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게서도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연상됩니다. 아델바르트는 "수많은 일을 아주 정확히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기억은 되레 자신을 갉아먹기에 이릅니다. 동행하던 코즈모 쏠로몬이 죽고, 쏠로몬 가문이 몰락한 20세기 중반은 공교롭게도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시기와 시간대가 겹칩니다. 그래서일까요. 피니 이모의 언급처럼 아델바르트에게 과거를 얘기하는 것은 고통임과 동시에 자신을 해방하는 일이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델바르트는 그 또한 멈추고자 합니다. 아델바르트는 이서카로 향하고, 판슈토크 하의 정신병동으로 자발적으로 입원해서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합니다. 근데 이러한 행동은 앞서 장에서 본 '독일 민족의 집단적 망각'과는 조금 다르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델바르트의 망각은 수단이 아니라 결과에 가까워 보입니다. 현재를 우회하고 기만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목도한 파괴와 고통을 관통한 결과 말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포충망을 들고 나비를 잡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해서 목도합니다. 환영인지 유령인지 실재인지 제대로 나오지는 않지만,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정신병동에서 육체와 정신이 거의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도 나비 잡는 사람을 봅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희망적인 인간형에 대한 은유나 상징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비관적이고 약간의 멜랑콜리를 동반하는 인상이며, 굳이 표현하자면 사라져가는 어떤 것에 대한 감상, 몽롱한 꿈속에서 느끼는 고양감 따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더 먼쪽에서부터 한줌씩 사위어가는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3장 마칩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누구도 이런 도시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건물도 참으로 많고, 식물들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소나무 우듬지들. 아카시아, 코르크나무, 무화과나무, 유칼리나무, 노간주나무, 월계수, 실로 나무들의 천국이다. 그늘진 비탈들, 졸졸 흐르는 개울과 우물이 있는 작은 숲들. 산책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아니 경악하게 하는 것들이 나타난다. 매번 다른 장관이 연출된다. 궁전 같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갑자기 협곡에서 끝난다. 극장에 갔다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나오면 뜻밖에도 작은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갈수록 좁아지는 어두운 골목을 따라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 줄 알고 낭패감에 휩싸여,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모서리를 돌아서면 돌연 연단처럼 생긴 곳이 나타나 광활한 파노라마를 조망하게 된다.
이민자들 168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과거에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달랐다고 한다. 세상에 있는 호화로운 것들의 90퍼센트가 이 화려한 수도에 집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이 향신료와 보석, 비단과 금을 실어왔다. 야파와 아스칼론의 항구로부터 상품들이 넘쳐나도록 흘러들었다. 예술과 공업이 만개했다. 방벽 앞에는 세심하게 가꾸어진 풀밭들이 펼쳐져 있었고, 요사파트 계곡은 백양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개울과 우물,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 깊은 수로 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고, 어디에서나 시원한 그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괴의 시대가 닥쳤다. 네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모든 마을이 초토화되었고, 관개시설들도 파괴되었으며, 나무와 숲 들이 베어지고 태워져 마지막 뿌리까지 말살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여러해에 걸쳐 예루살렘의 생명을 말살하는 사업을 계획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뒤로도 이 도시는 여러번 공격받았다. 해방과 화평과 파괴가 그렇게 반복되면서 마침내 도시는 완전히 황폐해져버렸고, 찬양받던 땅의 막대한 부는 사라지고 부석거리는 돌만 남았다. 이제 도시는 지구 전역으로 흩어져간 예루살렘 시민들의 머릿속에서만 아득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12월 4일. 오늘밤, 꿈속에서 나는 코즈모와 함께 요르단 지구의 번득이는 공허 속으로 들어갔다.
이민자들 181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4. ⟨막스 페르버⟩~] 마지막 장입니다. '나'는 1966년 가을, 22살이 되던 해에 "여러모로 궁리한 끝에 영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하고서 클로텐에서 출발해서 맨체스터에 도착하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그리고 맨체스터에 있는 호텔 아로사에서 짐을 풀고서 본격적으로 그 주변을 탐방하기 시작합니다. 제발트의 다른 산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에도 화자인 '나'는 자신이 왜 하필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인지, 또 거기서 무얼하려고 하는 것인지, 왜 주변을 탐방하고 돌아다니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발트의 걷기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없고 따라서 목적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관광의 개념과는 많이 다릅니다. 굳이 목적을 꼽는다면 이동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자신이 맞닥뜨린 풍경을 약간은 거리를 둔 채 시니컬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세세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서 사연을 전해듣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 전체가 정처가 없습니다.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 앞의 운하를 걷다가 항구의 선창 쪽에서 만난 막스 페르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대목을 공유하면서 마지막 장 시작합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오후 3시 30분쯤이었다. 얼럼 부인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은접시에 낯선 전기제품을 얹어서 가지고 왔는데, 나를 환영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티스메이드(teas-maid)라고 부르는 차 만드는 기계였는데, 알람 시계도 달려 있었다. 상앗빛 양철받침 위에 번쩍거리는 스테인리스 몸체가 얹혀 있는 기계는 차를 끓일 때 수증기를 내뿜는 모습이 마치 발전소 모형처럼 보였다. 알람시계에 박힌 야광 숫자들은 새벽의 여명이 흘러드는 무렵이면 은은한 연두색 빛을 발산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그 빛은 밤마다 내게 설명하기 힘든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맨체스터에서의 초창기를 떠올리면 얼럼 부인, 아니 그레이시(그녀는 내게 그레이시라고 불러달라[You must call Gracie]고 했다)가 내 방에 넣어주었던 차 만드는 기계가 내 생명을 지켜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삶에 작별을 고하고 싶은 기분에 빠질 때가 잦았다.
이민자들 194-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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