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발트 읽기] 『이민자들』 같이 읽어요

D-29
그의 목소리는 후두가 아니라 가슴 언저리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파울이라는 사람은 함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금속부품으로 조립해놓은 기계이며, 어느 한군데가 조금만 고장나도 영구히 복구될 수 없는 민감한 장치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민자들 p.48,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망골트라고 불렸던 그는 키가 아주 커서 거의 우리 두 배였지만, 그래도 우리와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는 우리가 과거나 미래의 아무 날이나 대면 즉시 그날이 무슨 요일인지를 맞히고는 더없이 뿌듯해했다. (…) 예컨대 교황의 탄생일이나 루트비히 왕의 탄생일을 가지고 그를 시험해볼 때도 있었는데, 그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그런 날들의 요일을 맞힐 수 있었다.
이민자들 p.54,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얼마 전 완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온 M*** 이란 이름의 소년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연의 일치가 재밌어서 밑줄 그어 봅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고교생 에세이 대회에서 만나 서로 좋아하게 된 그들은, 화창한 여름날 순수한 한쌍의 소년과 소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 살아.” 소년은 소녀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에 빠져든다.
저는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기억의 전체 푸네스'도 떠오르네요. 학창시절에 수학 문제 풀이로 몇 번 본 기억이 납니다. 심심해서 ChatGPT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푸네요. 생각해보면 간단한 풀이인데요! [윤년을 고려한 계산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해당 날짜가 속한 해가 윤년인지 아닌지 확인합니다. 2. 윤년이 아닌 경우, 해당 날짜가 속한 달의 첫 날이 무슨 요일인지 확인합니다. 3. 해당 날짜에서 첫 날을 뺀 후, 그 값을 7로 나누어 나머지를 구합니다. 4. 나머지가 0이면 해당 날짜는 첫 날과 같은 요일입니다. 나머지가 1이면 다음 요일, 2이면 다다음 요일, 3이면 다다다음 요일, 4이면 다다다다음 요일, 5이면 다다다다다음 요일, 6이면 다다다다다다음 요일입니다. 5. 윤년인 경우, 해당 날짜가 속한 달의 첫 날이 무슨 요일인지 확인합니다. 6. 해당 날짜에서 첫 날을 뺀 후, 그 값을 14로 나누어 나머지를 구합니다. 7. 나머지가 0이면 해당 날짜는 첫 날과 같은 요일입니다. 나머지가 1이면 다음 요일, 2이면 다다음 요일, 3이면 다다다음 요일, 4이면 다다다다음 요일, 5이면 다다다다다음 요일, 6이면 다다다다다다음 요일입니다. 예를 들어, 2023년 4월 5일이 수요일이라면 4월의 첫 날은 4월 1일 월요일입니다. 4월 5일에서 4월 1일을 빼면 4가 나오는데, 이를 7로 나누면 나머지가 4가 됩니다. 따라서 4월 5일은 4월 1일인 월요일에서 4일 후인 수요일이 됩니다. 2023년은 윤년이 아니므로, 위의 방법 중 2번부터 4번까지 따라 계산하면 됩니다.] 웃긴 건 예시가 틀렸다는 겁니다!
픽션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권. 기호학, 해체주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주요 현대 사상을 견인한 선구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대표작. 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으로, 일생 동안 단 한 편의 장편 소설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단편 전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적 정수를 보여 준다.
오, 저런 방법으로 계산하는 거였군요. 뭔가 마법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논리는 단순했군요. 하지만 여전히 위의 단계에서 2번을 넘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1960년 3월 29일이 무슨 요일인지를 알려면 일단 3월 1일이 무슨 요일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게...
파울은 외딴 마을 W에서 처음 정규교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아이들의 이름을 겨우 외울 수 있게 되자마자 갑자기 공문이 날아온 거예요. 파울도 이미 알고 있던 그 법규 때문에 교사직을 유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지요. 여름내 그의 가슴을 채웠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야말로 사상누각처럼 무너져버린 거예요. 미래라는 것의 그의 코앞에서 사라지던 그때, 파울은 처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어요. 그뒤로도 여러 번 그를 덮쳤던 이 패배감을 파울은 끝끝내 이겨내지 못했지요.
이민자들 p.64,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슬픈 소식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했고, 당시에 그는 일종의 판단력 마비증상에 빠져 바로 다음날 일을 미리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파울은 1935년과 1936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오랫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어두운 시절을 거들떠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민자들 p.71,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1939년과 1945년에 파울이 독일로 돌아갔던 것은 그가 뼛속 깊이 독일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아마도 그로서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는 알프스 아래의 고지에 위치한 고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이민자들 p.74,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두 번째 산문은 총 46페이지 정도라고 알려주셔서 양이 많지 않으니 오히려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실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먹먹해져 다른 일이 손에 쉽게 잡히지 않네요. 읽으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저도 @russist 님처럼 제발디언이 될 것 같네요. 다 읽고 나서 ‘제발트’, ‘노벨상’을 검색해 봤다가 작가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이미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지만 제발트의 작풍에 한번 익숙해지면 꽤 읽을 만하고 심지어 웃긴 부분(?)도 있답니다!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읽어보시길 바랄게요:)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라는 부제에서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snow)인지 사물을 식별하는 눈(eyes)인지 궁금해서 원문을 찾아봤어요. 원문에서는 "Es gibt einen Nebel, den keiner je durchdringen wird"로 기록되어 있고 직역하면 "어떤 사람도 통과하지 못할 안개가 있다"라는 뜻이라는데 직역이 저는 조금 더 좋은 것 같아요.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에 이어 다음 이민자로 넘어갑니다.
그러게요. 독일어에 문외한이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의역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면서 읽어봐야겠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 ~⟨파울 베라이터⟩] '나'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S시에서 파울을 조사하던 도중 파울의 장례식을 책임졌던 란다우 부인을 만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파울의 몰랐던 배경을 알게 됩니다. '나'가 유년의 기억 속에서 파울 베라이터 선생이 이따금 내비쳤던 슬픔과 우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던 울분 뒤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을 전해듣고, 그 배면에 놓인 역사적 상황도 유추해보게 됩니다. 란다우 부인은 파울이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 시기를 거치면서 반(半) 유대인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반의 반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마저 잃게 된 사연을 전합니다. 이런 요약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장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 인물이 자기 국가로부터 소외되어 중간인으로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나치 하에서 암묵적으로 공모한 독일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한 인간이 소외되고, 급기야 독일 내부의 이민자가 되어 육체와 정신 양쪽에서 추방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란다우 부인의 입을 빌려 동시대의 독일인들의 침묵과 다분히 의도적인 집단적 망각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번 장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바로 전반부에 '나'가 유년의 기억을 서술하는 부분과 후반부의 란다우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부분입니다. '나'라는 화자의 진술에서 란다우 부인이라는 타인으로 진술이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나'에서 '나의 기억'으로 또 '나'가 만난 란다우 부인이 말하는 '나'로 진술이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3인칭이 은폐된 1인칭이기도 하며, 1인칭은 거꾸로 은폐된 3인칭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특유의 서술이 소축적과 대축적을 오가는 역사적인 서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듯합니다. 제발트의 산문은 아주 작은 것들의 역사를 다룸으로써 그것의 총합들인 더 큰 역사를 환기합니다. 비극 그 자체를 직접 다루지 않고 그것이 파생한 효과와 사건을 멤도는 방식으로 서술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나'가 끊임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와 맞닿아 있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또 무의미한 것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황현산 선생이 문학은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재능이기도 하다고 하신 말씀도 떠오르네요. 이로써 2장 마칩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들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이민자들 6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 인물이 자기 국가로부터 소외되어 중간인으로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나치 하에서 암묵적으로 공모한 독일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한 인간이 소외되고, 급기야 독일 내부의 이민자가 되어 육체와 정신 양쪽에서 추방되고 있는 것입니다" 써주신 글을 읽으니 명료해지네요. '파울 베라이터'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비극적인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거든요.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한 일들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잖아요. 하지만 파울의 삶은 다른 측면에서 저에게 울림이 있었는데요, 적어주신 것처럼 내가 살던 국가에서 이민자가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의 피에는 유대인(1/4)보다 아리아인(3/4)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 갑자기 섞여 들어온 집단도 아니고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그 곳에 살아왔었죠. 사유재단 박탈과 직업자유의 제한 같은 국가의 폭력도 그를 무력하게 하고 피폐하게 만든 요소였겠지만 그의 영혼을 더 크게 파괴시킨 건 함께라고 생각했던 공동체 구성원들의 “비극을 고소해하는 태도(p.72)” 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3.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하루 늦었습니다. 세 번째 장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사실 뭐라고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이번 장부터 호흡이 조금 길어지고 등장인물도 많아지고 구성도 복잡해집니다. 이번 장을 읽으면서 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작가나 책을 일컬어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런 수사들을 볼 때면 과장스러운 사람을 보는 것처럼 거북스럽고 싫어지기까지 합니다. 이런 표현이 오해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세 번째 장은 화자인 '나'가 테오 이모부의 죽음을 접하고 홀로 남겨진 피니 이모를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유년의 한 때를 떠올리면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를 궁금해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나'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와의 접점은 1951년 어느 일요일 오후 한 식당에서 친척들이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커피 모임을 가졌던 것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피니 이모와 카지미르 삼촌의 불분명한 기억을 경유해서 아델바르트 할아버지라는 인물을 조금씩 구성해갈 수밖에 없는데요, 비유컨대 기억의 미궁의 최외각에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심부로 접근해가는 구조를 띠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중심부에 도달해도 거기에는 텅 빈 풍경만 놓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화자로서 '나'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메모장 속 '나'가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고 있는데 이는 의도된 혼란으로 보이며, 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한 구절을 공유하면서 세 번째 장 시작합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185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지루한 수업시간이나 저녁때가 되면 나는 미국에서 보내게 될 나의 미래를 아주 다채롭고 자세하게 상상해보곤 했다.
이민자들 p.89,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저도 어렸을 때 다른 세상에서의 저의 미래를 공상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반가워 밑줄그어 봅니다.
세번 째 이민자,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다섯 살때 장에 나가 나무 열매를 파는 일을 시작으로 호텔 사환, 일본 사절단의 시종, 전 세계를 떠 돌며 온갖 일을 한 암브로스 외삼촌의 삶은 정말 고된 노동 그 자체입니다. 다른 가족들의 삶 역시 궁핍하고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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