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D-29
흐름이 막히면 글이 잘 안 써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너무 배부르면 안 써지기 때문에 오히려 글을 시작할 때는 약간만 먹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쓴 다음엔 정식으로 밥을 먹습니다. 글을 쓸 때 지금의 생각을 마구 토합니다. 타자가 느린 게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는 그 생각 덩어리를 다 토한 다음에 맞춤법이나 글의 흐름 같은 걸 고칩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빨리 토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생각 덩어리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염려 안 해도 되는 게 그때 생각해 글로 옮기지 못한 것은 다른 글을 쓸 때 다시 재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계속 글을 쓰다보면 생각이 더 발달하고 글이 또 생각을 받쳐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글과 생각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 같습니다.
나는 유명 작가의 이런 게 부럽다. 그는 편집자와 상의하며 이런 트렌드가 있으니 이렇게 다듬으면 좋겠다, 표지는 이런 게 유행이니 그렇게 디자인하면 아마도 더 많이 독자들이 서점에서 집을 것이다. 이름 없는 난 이런 게 없다. 어차피 관심도 없고 팔리지도 않을 거 나도 그렇고 출판사의 편집자도 별로 기대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쓴다. 그러나 유명 작가는 조언을 해주고 상의를 해주는 게 부럽다. 하긴 나 같은 경우는 팔리는 것은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내 생각을 책에 집어넣은 것뿐이니까. 아, 유명작가들 부럽다. 옆에서 조언해주는 부인이 있고 책에 관심이 많은 주로 독자층의 대표랄 수 있는 30대 여성이 코치해주고 전문 편집자가 글을 다듬어주니. 일단은 이유가 어떻든 책은 많이 팔려 독자가 많이 읽어줘야 작가도 힘이 나고 탄력을 받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문학상에 당선 되는가? 교과서에 실릴만한 모범적인 글인가? 아니면 한국어를 아름답게 다듬은 작품인가? 심사자들이 대개는 이런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자기가 걸어온 길과 비슷한 작가의 작품을 고를 것 같다. 누구나 자기와 다른 인간을 좋아할 리 없으니까. 이것도 카르텔이다. 수상하는 작품의 틀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팁만 익히면 능히 당선될 수 있을 것이다. 좀 이상한 작품이 수상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심사자 풀도 다양해야 할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카르텔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외부에선 그게 자기들끼리만 해먹는 카르텔인지 너무 잘 아는데, 그 속에 속한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는 거다. 겉으로 봐서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외부에서 위화감이 잔뜩 들면 그 집단은 카르텔이고 발전을 못하고 나중엔 고인 물이 썩어 겉으로까지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 조직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조직은 겉에서 무너뜨리는 것이 더 힘들다. 안에서 자기들끼리의 알력으로 붕괴된다. 박정희가 심복인 김재규에게 총살을 당해 드디어 무너진 것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그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데모를 그렇게 해도 안 무너진 정권이 하루아침에 주저앉았다.
글은 글쟁이가 제일 잘 쓰는 것 같다. 손흥민보다 지금 작가 지망생이 더 흥미진진하게 축구에 대해 쓸 수 있다. 이걸 보면 글쟁이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어야 가장 잘하고 있는 거라 본다. 글쟁이가 체험을 한답시고 축구를 실제 해보거나 전쟁터에 참전하거나 교통사고의 그 순간을 느껴보겠다며 도로로 갑자기 뛰어든다면, 그냥 집에서 글이나 쓰는 사람보다 결국 글을 더 못 쓰게 될 것이다. 정신이 산란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렇다. 글 쓰는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허비한 것이다. 글에선, 지금 글을 쓰는 일이 가장 잘하는 일이고, 글이 더 나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축구 선수는 축구를 열심히 해야 잘하는 것이고, 택시 운전사는 세상 돌아가는 말을 손님에게 지껄이는 게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손님을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게 가장 잘하는 일이다. 손님은 그런 말 들으려고 택시를 탄 게 아니다.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은 것이다. 택시 운전사가 정치에 관해 입을 신나게 푼 다음, 엉뚱한 곳에 손님을 뚝 떨어뜨려 놓으면 그게 뭔가. 운전보다 말에 더 심혈을 기울여 그렇다.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 몰두하는 기사가 훨씬 더 멋있다. 영화 <드라이브>에서 라이언 고슬링의 과묵하게 운전하는 모습,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멋진가. 글쟁이가 딴짓을 하면 그건 글을 배신하는 거다. 식당에 갔는데 웬 꽃집처럼 화분이 사방에 늘어서 있고 벽마다 그림이 걸려 있다면 그 식당은 맛으로 승부를 거는 것에서 도망친 것이다. 죽도 밥도 아니다. 자신의 본업을 망각한 것이다. 꽃 기르기나 그림 전시는 집에서 해도 충분하다. 괜히 식당 손님만 잃는다.
분단이라는, 우리나라에만 특화된 글쓰기를 멈추면 안 될 것 같다. 다른 나라는 이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래 잘 쓰지도 못한다. 우크라이나나 하마스에 대한 것은 그것을 직접 겪는 작가들이 잘 쓰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통해 간접적으로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분단된 지 거의 80년인데, 이것에 대해 펜을 놓으면 안 된다고 본다. 직무유기이고 책임 회피다. 바로 우리 곁에 언제나 있고, 우리와 상관 안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면해도 외면이 안 되니까 그런 것이다. 신경 안 쓰려고 해도 계속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러니 정면으로 맞서는 게 맞다고 본다. 계속 외면만 하면 문학적 성과 면에서도 승산이 없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것에 대해 붙잡고 다루겠나. 그리고 북한의 독재와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계속 글로 언급해야 한다. (젊은 놈은 담배를 피우며 배를 쑥 내밀고 웃으며 서 있고, 늙은 부하들은 그것을 수첩에 열심히 적는 척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이런 그림만 봐도 얼른 드는 생각이 한 놈만 자유롭고 나머진 자유가 없는 독재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 사각지대의 전형으로 세계에 보도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한민족이라는 게 너무나 창피하다.) 보기에 따라선 지금까지 분단문학을 너무 많이 다뤄 진부하고 식상하다며 자기는 이전 문학과 거리를 두고 다른 것을 실험한다며 전위적(前衛的)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지금도 종전이 아닌 휴전 중인, 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곳, 이곳에 대해 다루지 않으면 누가 다루겠나? 그리고 사실 현실적으로도, 북한 관련 뉴스가 안 나오는 날이 어디 하루라도 있었나. 동시에 이런 것도 분명 있다. 박정희 시대에 학생과 순진한 주민을 상대로 북한에 대해 안 좋은 표현을 너무 많이 했다. 그곳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사회인데 마치 괴물이나 살 것 같은 괴뢰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때 받은 어두운 기억이 아직도 내 뇌리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도 부인 못 한다, 그래 우리가 과거에 너무 했다는 반성에 기반한 반발 작용으로 북한에 대해 다른 나라보다 더 너그러운 건지도 모른다. 이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냉정한 분단을 직시하면서 외면하기 어려운 우리에게 주어진 쓸거리를 놓지만 않는다면 세계적인 문학상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나처럼 30년 이상 공기업에 다니며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좀 있고 책에 과도하고 심하게 관심과 애정이 많은 인간은 책에서 점점 멀어지는 큰일날 세상에서 한 1000명 중 한 명도 안 될 것이다. 나는 책에 지나치게 미친 인간 중 하나다. 나 같은 좀 모자란 인간이라도 책에 관심 갖고 그나마 세상이 좀 좋아지도록 책을 통해 노력하는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 때문에 잃은 것도 많았지만 이런 걸 보면 그 잃은 것을 다 보상하고도 남는 뿌듯함이 분명 있다.
사람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좋아 다 찾아 읽고 그중 중요한 글귀는 메모도 하고 내 글에 인용도 하며 그랬는데 그가 칭찬하는 다른 작가의 책을 읽으면 별로이고 실망까지 하는 경우가 흔하다. 너무 나와 안 맞아 읽기를 중도에 포기한다. 읽다 보면 지루하고 내 취향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된다. 그 작가의 책은 그래서 다른 것까지 안 읽는다. 전에 읽은 게 트라우마로 박힌 것이다. 새 책도 전의 책과 비슷할 거라 보는 것이다. 그럼 그는 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쓴 거고 그가 좋아하는 책은 왜 나와 안 맞는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글을 나는 왜 좋아하지 않는가. 이상하다. 이해가 안 간다. 그 글들이 비슷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두 작가의 문체가 달라 그런 것 같다. 보면, 같은 말을 해도 말투로 인해 듣기 좋거나 아니거나 하는 게 있다. 자기만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가 따로 있다. 톰보이 같은 중성적인 낮은 목소리에 무뚝뚝한 말투, 지적인 전문직 이미지의 세미 정장 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배우 신현빈 같은 여자.
국민들이 그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개돼지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계속 물고들어져야 하는데, 다른 연예인 마약 기사로 하던 걸 한눈 팔고 그만둬 버린다. 이태원도 마찬가지다. 조작된 것과 눈속임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권력층은 국민들이 아주 모범적으로 말려들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역시, 개돼지들은 할 수 없다니까." 할 것이다. 누가 나에게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며 강요해도 보지 말고 지금 하건 걸 계속 파야 한다. 그들의 주무름에 내가 꼭두각시로 놀아나선 안 된다. 그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안 된다. 괴물과 악마에겐 더 악랄한 괴물과 악마가 되어 싸워야 한다. 고분고분은 나를 시스템에서 노예로 만드는 행위다. 그 돌아가는 시스템과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통령실 의전비서관 학폭은 연예인 마악과 별개로 계속 끈질게 물고늘어져야 한다. 그들의 수작에 내가 마구 놀아나면 기분이 어떤가.
나는 직장 생활하면서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곧장 책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그걸 대비해 책을, 늘 가방에 넣고 다니고 직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아마 남들 눈엔 “업무에 소홀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란 대개 보이는 것으로 우선 판단하니까. 그러나 나는 오히려 안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게 해서 창의적으로 더 신나게 업무에 전보다 더 잘 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업무 몰입도가 향상됐다고 본다.) 그래서 내 업무 자리는 독서 하는 책상도 겸한다. 책꽂이엔 내가 지금 읽는 책이 꽂아져 있고, 파티션 벽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달의 책’이 붙여져 있다. A4용지에, 한글의 표를 이용해 상하로 나눠 위쪽은 그 책 표지 그림을 넣고 아래는 본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넣는다. 그게 한 달 동안 거기에 게시되어 있다. 이번 11월엔 ‘이달의 책’으로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과 거기서 발췌한 “아마 내 안에 인격이 여럿 있고, 책을 읽고 쓰는 일과 관련해서도 자아가 서너 개쯤 있는 모양이다. 진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소설가 장강명은 찜찜하거나 도발적인 주제, 소재에 끌린다. 거기에 정면으로 달려들어 부딪치고 싶어 한다.”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사실 책을 너무 많이 읽고, 읽은 책을 어디에 둘 곳이 없어 바로 알라딘 같은 곳에 팔아버린다. 꽂거나 쌓아둘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전엔 “내가 책을 이 정도로 많이 읽는다” 하며 과시용으로 읽은 책을 전부 책꽂이에 꽂아두기도 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지금은 깨달아서 그냥 바로 팔아버린다. 역시, 직원들은 그것을 보았겠지만 나에게 책 읽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지 묻지도 않는다. 이게 요즘 세상의 책 풍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나를 위로하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강한 희열을 느낀다. 이젠 이 짓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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