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한 세기씩 읽으면서 훗날 있을 잘 알려진 사건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14세기를 읽으면서 그 점이 두드러졌습니다. 이후 헨리 8세가 로마가톨릭과 갈라서는 것도 (물론 결혼 문제도 있겠지만) 갑툭튀가 아니라, 에드워드 3세때부터 프랑스인 교황과 긴장 관계였다던가, 혹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역어가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지방 군주들의 후원을 얻는 분위기가 퍼진 14세기부터 시작된게 아닐까, 하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덧붙여, 이제껏 저는 단테의 <신곡>이 라틴어로 쓰인 줄 알았답니다?!
[책걸상 함께 읽기] #번외. <변화의 세기>
D-29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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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사병은 7개월 넘게 계속되면서 온 나라를 파도처럼 휩쓸었고 잉글랜드 인구의 약 45퍼센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연간으로 따지면 사망률이 77퍼센트에 달한 셈이다. 즉 1348~1349년의 사망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200배나 높았다. ”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47 ch. 14세기,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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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사병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교황청 관료들은 기독교인 2,400만 명이 사망했다고 계산했는데, 이 숫자가 전체 기독교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사망률은 이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 60퍼센트가 사망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사망률이 60퍼센트를 살짝 넘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카탈루냐와 나바라에서는 60퍼센트, 이탈리아에서는 50에서 60퍼센트가 사망했다. ...... 그러나 1347년 이후로 유럽 사람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유럽인들은 계속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했다. 흑사병은 이 범유행 전염병의 첫 번째 파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전염병은 1361~1362년, 1369년, 1374~1375년에 돌아왔으며, 이후 3세기 동안 평균 8년에서 12년마다 돌아왔다. ”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2,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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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의 가장 중요한특징은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음에도 사람들은 재산소유권을 내던지지도, 파종과 수확을 멈추지도 않았다. ”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3,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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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0년 경에는 서유럽 거의 모든 곳에서 농노제가 무너졌다. 부자유 소작농들이 영주에게 지불해야 했던 소작료는 1374~1375년에 있었던 제4차 페스트 범유행 이후로 줄어들었다. 땅은 충분 한데 소작농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 노동자들을 토지에 묶어두었던 봉건적 구속은 제정적 의무로 대체되었다. 강요된 충성심을 돈이 대신했다. 시골에서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도시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미 완승을 거둔 뒤였다. ”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56-157,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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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의란 개념의 뿌리는 중세시대에 있으며, 이는 14세기에 강력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당시에는 민족주의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민족주의는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고향에서 먼 곳으로 떠났거나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자신이 어떤 민족이라는 식으로 집단적으로 묘사했다. 둘째, 교회의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온 고위 성직자 집단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맥락에서는 왕과 백성들이 특정 지역이나 귀족 집단, 왕실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연합할 때 민족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
『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p. 165-166,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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