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마주>

D-29
저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이 시간이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지, 특히 소설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지를에 대해많이 궁금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마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럿 있겠지만 팬데믹과 관련한 얘기 먼저 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사회가 공통으로 경험한 '방역의 시절'을 한 사람의 삶과 그가 속한 집단에서 어떻게 반영하고 발견했는지에 대한 얘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잠복결핵균 의심을 받는 '나'-코로나 확진을 받으며 격리된 적 있는 수미- 결핵 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딴산마을을 대표하는 만조 아줌마의 존재가 각기 별개인 듯 드러나다가 서서히 연결되는 과정이 좋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집중된 방식으로 몰입되기보다는 각 장이 단절될 느낌도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요.
<마주>의 결핵과 만조 아줌마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모두가 아닌듯 날카롭고 우울하던 그 시기가 다시 떠오를 만큼, 손에 잡힐 듯한 항상적 긴장이 잘 그려져 있었던 것 같아요. 혜진 평론가님이 언급하신 178-179쪽의 폭발은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요. 어떤 그...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뭔가 공감이 됐다고 할까요... 내 일도 아니고 내 권한도 아닌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때문에 분노가 걷잡을 수 없어지는 감각이, 근데 그게 사실은 밖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많이 향해 있고... 이것도 이야기할 부분이 많겠지만 아직 소설을 덜 읽었으니 조금 개인적인 감상을 먼저 남겨보면... 저는 만조 아줌마 캐릭터를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었는데요. 요즘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손이 부족하면 애들을 다른 어른들에게 맡기고 이런 일들이 많았잖아요. 저는 어릴 적에 엄마와 동생 이렇게 셋이서 지냈는데, 엄마가 일을 하느라 돌볼 사람이 없어서 '삼촌'들이 집에 많이 왔었어요. 특히 외삼촌(엄마 남동생) 친구였던 분이 있는데... 그때 생각으로는 엄청 어른인데 지금 생각하면 뭐 사실 그렇게 어른도 아니네요... 그런데 집에 와서 숙제 봐주고, 목욕탕 데려가고, 밥 먹이고, 그러다 어른들 사정이라 저는 잘 모르지만 점점 발길이 드물어지다 어느샌가 사이가 틀어져서 지금은 연락도 안 되거든요. 저는 어린 마음에 뭔가 양가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삼촌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어렸지만 엄마가 뭘 너무 많이 시킨다는 생각은 했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저랑 동생을 부담으로 느꼈다는 게 싫기도 하고, 보고 싶지만 도움을 받기 싫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ㅎㅎ 사실 대학에 입학한 뒤였나, 한 번 연락을 해봤는데 닿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뭐... 그 뒤로 저도 다시 연락드리지는 않았고 또 연락을 드린다 해도 받으실까 싶긴 한데요. 만조 아줌마와 나리의 관계를 보면서 새삼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렇게 불의의 사고가 있었는데도 둘이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게 좋아보이기도 하고... 사실 나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성인이 된 이후라도 그 감각은 비슷하게 느껴질 텐데, 어쩌면 결핵이 그런 감당할 수 없는 기억과의 어떤 연결고리가 되어준 거잖아요.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렇고, 결핵균이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따로 떼어놓는데 그런 와중에 어떤 다른 연결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거였지, 적다보니 그런 점도 최은미 작가님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저 역시 『마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된 건 팬데믹이라는 배경 자체였어요. 제 경우에는 소설에 나타난 작가의 기량이나 문학적 가치를 엄밀하게 논하고 헤아릴 깜냥이 없어서인지ㅎㅎ 아무래도 작품 표면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소재나 배경에 우선 주목하게 되는데요! 저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유례 없는 사태의 문학적 재현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논픽션이라는 업무 영역 때문인지 평소 계간지를 집어들 때도 작품보다 특집부터 찾아 읽다 보니 단행본으로 묶이기 이전의 작품들에 관해 다소 과문한 편인데, 그간 코로나 팬데믹을 배경으로 어떤 작품들이 등장했었는지도 『마주』를 읽으며 궁금했고요.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인물 또는 서사 차원의 독해나 분석까지 나아가기에 앞서, 소설 초반부에 묘사되는 팬데믹 풍경을 읽어나가는 것부터 하나의 재미 포인트로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배달 오토바이들이 차로를 오가는 소리가 예년보다 잦게 들렸다거나(59)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켜야 했다는(68, 코로나 아니었으면 엄마한테 등짝 맞을 짓) 이야기들이요. 특히 초등학생들이 출석 번호 짝홀별로 등교일이 달랐다거나(57) 종종 얼굴을 보여달라는 말로 선생님들이 화상 수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75)는 비혼/무자녀/1인 가구로서 알 수 없는 리얼리티/디테일이라 흥미로웠습니다ㅎㅎ
저는 하루키 소설은 다 읽었고, 이제 <마주>는 마지막 장만 남겨놓았는데요. 아마 내일 다 읽을 것 같아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한 짧은 감상을 먼저 남겨보면... 우선 그래도 양이 상당한 책인데 힘들지 않게 읽혀서 놀랐고요 ㅎㅎ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많이 다루어진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먼저 받았어요. 어떤 알 수 없는(하지만 어딘가 친숙한) 세계에 들어섰다는 느낌, 그 느낌을 일본의 좋은 작품들은 참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좋은 느낌이 이번 하루키 소설에도 있더라구요. 저는 소설에서 어떤 '미스터리'한 지점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조바심을 느껴서 빨리 읽고 싶다는 느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도시>는 아주 분명한 미스터리를 계속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런 조바심으로 독자를 붙들어놓기보다 지금 소설이 발을 딛고 있는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으로 설득한다고 느껴져서 편안하고 설레면서 소설을 읽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부분들은 차차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 지금은 이 정도의 감상만 남기겠습니다 ㅎㅎ
오늘 사진 작가 황예지의 전시 <부족한 별자리>에 다녀왔는데요. 전시장에 사진에 등장한 인물들과의 인터뷰집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펼쳐봤는데 거의 첫 장에 엄마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읽으면서 <마주>의 수미가 생각나서 얼른 사진을 찍어왔어요. <마주>를 읽기 전에 왔으면(그럴 수도 있었던 건데) 꼭 눈에 걸리지는 않았을 수도 있는 내용인데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내용이었어요. "아이와 맞바꾼 것은, 이제는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자꾸만 허공에 구멍같은 게 보이면서. 까만 구멍. 이 구멍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애를 갖고싶다고 말하며 울었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정말 본능처럼 피붙이 하나를 더 갖고 싶었다."
저는 이번에 이 두 작품을 함께 읽게 된 게 무척 공교롭게 느껴졌는데요, 분량은 <불확실한 벽>이 압도적이지만 읽는 시간은 <마주>가 훨씬 더 걸렸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두 작품이 장편소설로서 개별의 목표가 무척 달라서 그랬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무척 극과 극의 작품이라고 느껴졌고요. 일단 두 작품 모두 화자의 상태와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 소설 속 세계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무척 큰 역할을 하는데, 그 화자가 ‘현실 세계와는 거리감을 느끼는/미혼의/남성’ vs ‘현실에 큰 영향을 받는/기혼의/유자녀 여성’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발생했던 것 같아요. 설정된 인물이 이렇게 극과 극이다 보니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도 작품에 이입하게 되는 지점도 극명하게 갈라졌던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정서적 이입은 <마주>에서 훨씬 쉽게 일어날 법 한데, 의외로 몰입은 <불확실한 벽>이 더 잘 됐어요. 그건 아마 진술과 묘사 차이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불확실한 벽>의 경우 가상의 세계가 등장하고 환상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지만 의외로 하루키가 무척 꼼꼼하고 세심하게, 가끔은 집요하다 싶을만큼 묘사를 해서 그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내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면에 <마주>같은 경우 심지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실제로 겪은 일을 다루고 있는 데도 무척 파편적인 일화들이 이어져서 <불확실한 벽>보다 더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불확실한 벽>은 끝까지 읽고 난 뒤에 궁금한 것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마주>는 오히려 재독이 필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주>에 대해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저는 아무래도 2년 전에 단편소설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이번 장편을 읽은터라 어떤 지점이 다른지, 왜 단편에서 끝나지 않고 장편으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돼야 했는지를 궁금해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단편과 장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만조 아줌마와 딴산 마을, 그리고 나리의 어린 시절 얘기가 등장했다는 점일 것 같아요. 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몇 십년 전, 딴산 마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공간적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를 이어주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 지점에 주목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님이 최근 <채널예스>인터뷰에서 밝혀 주셨더라고요. 단편의 경우 실제로 작가님이 2020년에 밀접 접촉자가 되면서 겪은 일화들이 소설의 출발이 되었고, 나아가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야 되는, 밀접해져야 되는 관계. 그리고 훨씬 더 멀리 있지만 자신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어떤 관계. 그런 관계를 조금 더 풀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장편으로 확장해 쓰게 됐다고요. https://ch.yes24.com/Article/View/54815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작가 인터뷰를 읽으면 답안지를 확인하는 느낌이라 독서 토론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ㅎㅎ 그래도 함께 나누고 싶은 대목이 많아서 공유해봅니다. )
나는 딸의 세상을 최선을 다해 좁게 만들어온 여자의 면상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딸을 발바닥만 한 신문지 위로 밀어 넣은 채 뻔뻔하게 눈을 뜨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침을 뱉고 싶은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마흔네살이나 처먹은 주제에 둘째 어쩌고 하는 년을, 남편이 싫다고 징징거리던 주둥이로 아이 어쩌고 하는 년을, 비겁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한 년을,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178-179p
박혜진 선생님과 강보원 선생님이 언급해주신 178p-179p 대목은 저도 정말이지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읽었는데요. 특히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는 끔찍하게 미워하고 끔찍하게 사랑하는, 그래서 가끔 서로의 세상을 끔찍하게 만드는 엄마와 딸의 유구한 관계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서 무서운 쾌감이 들었어요 . 딴 얘기지만, 저는 모녀 사이를 떠올릴 때 ‘끔찍하다’는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끔찍하다’ 자체가 ‘1.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무섭다(horrible) 2.정성, 노력, 대우를 아주 많이 하는(devoted) 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뜻을 갖고 있더라고요. 광기와 애정 두 의미가 한 가지 단어에 속한다는 점에서 모녀 사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속성을 오늘날 소설에서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작가 중에 한 명이 최은미 작가라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코로나로 부모(특히 엄마)와 자녀가 집에 함께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갈등이 많이 생겼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소설에서 나리-수미만큼이나 나리-은채, 수미-서하 사이의 긴장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졌던 것 같아요.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주문처럼 중얼거린 적이 있다. 크지 말라고. 여자아이가 되지 말고 내 아기로 있으라고. 나만 보라고. (...)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운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문 너머에서 내 아이가 우는데, 나는 아이를 안지 못한다. 어느 날은 생각한다. 너를 처음부터 다시 키우고 싶다. 어느 날은 애걸한다. 은채야, 나 좀 안아줘. 어느 날은 홀로 사무친다. 은채야, 사랑해!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164p
그리고 이 대목이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비속어들이 마구 쓰여서였던 것 같아요. ㅎㅎ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면상'이라고 하기, 입이라고 하지 않고 '주둥이'이라고 하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년'이라고 하기. 작가님도 인터뷰에서 "똥과 간과 좆에 대해서 말을 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어른을 되게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라고 언급하는데, "쎄가 빠지게 일해도 남는 건 골병과 빚뿐인 삶(...) 기후가 지랄을 할 때마다 생계를 위협받는 삶"(95p) 처럼 '문학적이지 않은' 표현을 접할 때의 배반감과 쾌감들이 좋았어요. 어떤 뭉쳐있는 감정들은 비속어와 욕 같은 거친 말을 통해서만 터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처럼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가 생각나기도 하고, 확실히 한국어 욕설을 소설에서 접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아요.
한소범 기자님의 비교에 많이 공감하고 동의해요. 저 역시 <마주>가 갖고 있는 요소들이 친숙하고 공감도 높은 것에 비해서 빠르게 몰입하진 못했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역시 소범 기자님 의견처럼 파편적, 혹은 불연속적인 전개가 한몫하는 것 같고, 그와 더불어 인물들의 개성 혹은 캐릭터가 서사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것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또 그런 덕분에 생겨나는 서사적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작품의 외곽에는 나의 돌봄 공동체, 혹은 마을 공동체의 연결과 단절이 있고 그 안에 어린 시절 경험했던 만조 아줌마와 엄마를 둘러싼 돌봄 공동체, 혹은 마을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걸 연결해 주는 것이, 보원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코로나라는 극단적 거리두기, 단절의 사건이고요.
그래서 주인공이 품고 있었던 의문, 만조 아줌마는 왜 나를 그렇게 잘 돌봐 줬을까, 그저 동네 이웃집 애일 뿐인데, 하는 궁금증을 수미가 물어줬을 때 만조 아줌마가 들려줬던 이야기 (p.282) 가 많이 감동적이었고, 만조 아줌마를 포함해 딴산 마을 사람들이 집단 격리된 곳으로 주인공이 찾아갈 때 또 감동이 있었어요. 돌봄의 공동체라는 건 그렇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지속되며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해서 다시 현재의 나를 둘러싼 '육아맘'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불어 저도 조금 소소한 혼자만의 포인트를 이야기하자면, 사과밭이나 겨울밭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는데요, 저도 부모님이 사과밭을 일구시거든요. 그래서 4월에는 사과꽃 따러 가고, 9월에는 사과잎 따러 가고, 10월에는 사과 따러 가고는 해요. 사과원액 주스라든가 잼을 만드는 배경 이야기들이, 제가 체험한 적 있는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섬세하게 묘사만큼이나 디테일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읽었어요. 농촌의 모습이 드러나는 소설을 읽기가 쉽지 않아서 더 귀하게 여겨기지도 했고요 ^^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우문이라 대답할 말이 없다는 듯 만조 아줌마는 한가지 일화만을 애기했다. 겨울이었는데, 나리가 그때 학교에 들어갔을 땐가 모르겠다. 한겨울 아침에 애가 손등이 허옇게 터서는 강아지 밥그릇을 들고 울고 있는 거야. 강아지 밥이 꽝꽝 얼었다고. 꽝꽝 얼어서 강아지가 먹을 수가 없다는 거야. 아니 겨울에 밖에 내놨으니까 얼지. 들여놓으면 다시 녹는다고 해도 듣지를 않아. 얼마나 울음을 안 그치는지. 나를 보더니 계속 우는거야.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282쪽.
안녕하세요! 조금 늦게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는 이전에 최은미 작가님이 발표하셨던 <여기 우리 마주>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이번 책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요. 결론적으로는 기대만큼의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단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되었다면 단편을 읽었을 때보다의 더 좋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 눈에는 그게 잘 안 보였어요. 또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다소 산발적인 전개가 끝까지 소설로의 집중을 방해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만조 아줌마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일까 잘 붙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이 부분은 나중에 딴산 마을 이야기가 나오면서 납득이 갔던 것 같아요. 또 어떤 기억들은 내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갑작스레 문제가 되는 것처럼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ㅎㅎ
<마주>를 읽으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요즘 최은미 작가가 반복적으로 그리는 여성 인물에 대한 것이었어요. 이 소설도 그렇고,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는 <그곳>도 그렇고요. 다소 신경증적인 면모를 보이는 여성 화자가 재난 상황을 맞닥뜨린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 부분이 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에 이야기했던 전형성을 벗어나는 인물의 특성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 독자에게 분명한 쾌를 선사하는 서술도 그 때문인 것 같아서요. 여러분들이 말씀해주신 178-179쪽의 서술들도 같은 맥락에서 좋았어요.
저는 소설이 중후반부로 넘어가며 딴산이라는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질병을 매개로 형성된 공동체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면서 이 작품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단일한 사태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질병을 낙인찍고 차별해온 오랜 역사를 환기해주는 것 같아 좋았어요. 딴산이 결핵 환자들의 은둔처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 직전까지(219~220쪽)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소록도 같은 지명을 떠올린 분이 왠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비록 두 지역민들이 겪은 질병의 종류, 국가 폭력의 직간접성 등에는 차이가 있지만요.)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딴산 주민들이 국가로부터 방치, 소외, 배제의 경험을 반복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현대사의 일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 시대나 제도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는지(그리고 인물들이 이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하는 편인데요. 『마주』에도 주세법 같은 행정 조치가 만조 아줌마의 삶을 규제하고 뒤바꾸는 면면(238~239쪽)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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