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번에 이 두 작품을 함께 읽게 된 게 무척 공교롭게 느껴졌는데요, 분량은 <불확실한 벽>이 압도적이지만 읽는 시간은 <마주>가 훨씬 더 걸렸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두 작품이 장편소설로서 개별의 목표가 무척 달라서 그랬던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모로 무척 극과 극의 작품이라고 느껴졌고요.
일단 두 작품 모두 화자의 상태와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 소설 속 세계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 무척 큰 역할을 하는데, 그 화자가 ‘현실 세계와는 거리감을 느끼는/미혼의/남성’ vs ‘현실에 큰 영향을 받는/기혼의/유자녀 여성’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발생했던 것 같아요. 설정된 인물이 이렇게 극과 극이다 보니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도 작품에 이입하게 되는 지점도 극명하게 갈라졌던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정서적 이입은 <마주>에서 훨씬 쉽게 일어날 법 한데, 의외로 몰입은 <불확실한 벽>이 더 잘 됐어요. 그건 아마 진술과 묘사 차이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불확실한 벽>의 경우 가상의 세계가 등장하고 환상성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지만 의외로 하루키가 무척 꼼꼼하고 세심하게, 가끔은 집요하다 싶을만큼 묘사를 해서 그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내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면에 <마주>같은 경우 심지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실제로 겪은 일을 다루고 있는 데도 무척 파편적인 일화들이 이어져서 <불확실한 벽>보다 더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불확실한 벽>은 끝까지 읽고 난 뒤에 궁금한 것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마주>는 오히려 재독이 필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마주>
D-29
범한소
범한소
<마주>에 대해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저는 아무래도 2년 전에 단편소설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이번 장편을 읽은터라 어떤 지점이 다른지, 왜 단편에서 끝나지 않고 장편으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돼야 했는지를 궁금해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단편과 장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만조 아줌마와 딴산 마을, 그리고 나리의 어린 시절 얘기가 등장했다는 점일 것 같아요. 왜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몇 십년 전, 딴산 마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공간적 시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를 이어주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 지점에 주목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가님이 최근 <채널예스>인터뷰에서 밝혀 주셨더라고요. 단편의 경우 실제로 작가님이 2020년에 밀접 접촉자가 되면서 겪은 일화들이 소설의 출발이 되었고, 나아가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야 되는, 밀접해져야 되는 관계. 그리고 훨씬 더 멀리 있지만 자신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어떤 관계. 그런 관계를 조금 더 풀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장편으로 확장해 쓰게 됐다고요.
https://ch.yes24.com/Article/View/54815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작가 인터뷰를 읽으면 답안지를 확인하는 느낌이라 독서 토론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ㅎㅎ 그래도 함께 나누고 싶은 대목이 많아서 공유해봅니다. )
범한소
“ 나는 딸의 세상을 최선을 다해 좁게 만들어온 여자의 면상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딸을 발바닥만 한 신문지 위로 밀어 넣은 채 뻔뻔하게 눈을 뜨고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침을 뱉고 싶은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마흔네살이나 처먹은 주제에 둘째 어쩌고 하는 년을,
남편이 싫다고 징징거리던 주둥이로 아이 어쩌고 하는 년을,
비겁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한 년을, ”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178-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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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소
박혜진 선생님과 강보원 선생님이 언급해주신 178p-179p 대목은 저도 정말이지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읽었는데요. 특히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는 끔찍하게 미워하고 끔찍하게 사랑하는, 그래서 가끔 서로의 세상을 끔찍하게 만드는 엄마와 딸의 유구한 관계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서 무서운 쾌감이 들었어요 .
딴 얘기지만, 저는 모녀 사이를 떠올릴 때 ‘끔찍하다’는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끔찍하다’ 자체가 ‘1.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무섭다(horrible) 2.정성, 노력, 대우를 아주 많이 하는(devoted) 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뜻을 갖고 있더라고요. 광기와 애정 두 의미가 한 가지 단어에 속한다는 점에서 모녀 사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속성을 오늘날 소설에서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작가 중에 한 명이 최은미 작가라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코로나로 부모(특히 엄마)와 자녀가 집에 함께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갈등이 많이 생겼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소설에서 나리-수미만큼이나 나리-은채, 수미-서하 사이의 긴장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졌던 것 같아요.
범한소
“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주문처럼 중얼거린 적이 있다. 크지 말라고. 여자아이가 되지 말고 내 아기로 있으라고. 나만 보라고.
(...)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운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문 너머에서 내 아이가 우는데, 나는 아이를 안지 못한다.
어느 날은 생각한다.
너를 처음부터 다시 키우고 싶다.
어느 날은 애걸한다.
은채야, 나 좀 안아줘.
어느 날은 홀로 사무친다.
은채야, 사랑해! ”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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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한소
그리고 이 대목이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비속어들이 마구 쓰여서였 던 것 같아요. ㅎㅎ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면상'이라고 하기, 입이라고 하지 않고 '주둥이'이라고 하기,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년'이라고 하기. 작가님도 인터뷰에서 "똥과 간과 좆에 대해서 말을 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어른을 되게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라고 언급하는데, "쎄가 빠지게 일해도 남는 건 골병과 빚뿐인 삶(...) 기후가 지랄을 할 때마다 생계를 위협받는 삶"(95p) 처럼 '문학적이지 않은' 표현을 접할 때의 배반감과 쾌감들이 좋았어요. 어떤 뭉쳐있는 감정들은 비속어와 욕 같은 거친 말을 통해서만 터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범한소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처럼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가 생각나기도 하고, 확실히 한국어 욕설을 소설에서 접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아요.
박혜진
한소범 기자님의 비교에 많이 공감하고 동의해요. 저 역시 <마주>가 갖고 있는 요소들이 친숙하고 공감도 높은 것에 비해서 빠르게 몰입하진 못했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역시 소범 기자님 의견처럼 파편적, 혹은 불연속적인 전개가 한몫하는 것 같고, 그와 더불어 인물들의 개성 혹은 캐릭터가 서사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것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또 그런 덕분에 생겨나는 서사적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작품의 외곽에는 나의 돌봄 공동체, 혹은 마을 공동체의 연결과 단절이 있고 그 안에 어린 시절 경험했던 만조 아줌마와 엄마를 둘러싼 돌봄 공동체, 혹은 마을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걸 연결해 주는 것이, 보원 평론가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코로나라는 극단적 거리두기, 단절의 사건이고요.
박혜진
그래서 주인공이 품고 있었던 의문, 만조 아줌마는 왜 나를 그렇게 잘 돌봐 줬을까, 그저 동네 이웃집 애일 뿐인데, 하는 궁금증을 수미가 물어줬을 때 만조 아줌마가 들려줬던 이야기 (p.282) 가 많이 감동적이었고, 만조 아줌마를 포함해 딴산 마을 사람들이 집단 격리된 곳으로 주인공이 찾아갈 때 또 감동이 있었어요. 돌봄의 공동체라는 건 그렇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지속되며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해서 다시 현재의 나를 둘러싼 '육아맘'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혜진
더불어 저도 조금 소소한 혼자만의 포인트를 이야기하자면, 사과밭이나 겨울밭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는데요, 저도 부모님이 사과밭을 일구시거든요. 그래서 4월에는 사과꽃 따러 가고, 9월에는 사과잎 따러 가고, 10월에는 사과 따러 가고는 해요. 사과원액 주스라든가 잼을 만드는 배경 이야기들이, 제가 체험한 적 있는 이야기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섬세하게 묘사만큼이나 디테일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읽었어요. 농촌의 모습이 드러나는 소설을 읽기가 쉽지 않아서 더 귀하게 여겨기지도 했고요 ^^
박혜진
“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우문이라 대답할 말이 없다는 듯 만조 아줌마는 한가지 일화만을 애기했다.
겨울이었는데, 나리가 그때 학교에 들어갔을 땐가 모르겠다. 한겨울 아침에 애가 손등이 허옇게 터서는 강아지 밥그릇을 들고 울고 있는 거야. 강아지 밥이 꽝꽝 얼었다고. 꽝꽝 얼어서 강아지가 먹을 수가 없다는 거야. 아니 겨울에 밖에 내놨으니까 얼지. 들여놓으면 다시 녹는다고 해도 듣지를 않아. 얼마나 울음을 안 그치는지. 나를 보더니 계속 우는거야. ”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두번째 계절 #2』 최은미, <마주>,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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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정
안녕하세요! 조금 늦게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는 이전에 최은미 작가님이 발표하셨던 <여기 우리 마주>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이번 책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요. 결론적으로는 기대만큼의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일단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되었다면 단편을 읽었을 때보다의 더 좋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 눈에는 그게 잘 안 보였어요. 또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다소 산발적인 전개가 끝까지 소설로의 집중을 방해했다고 생각했어요.
소유정
처음에는 만조 아줌마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일까 잘 붙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이 부분은 나중에 딴산 마을 이야기가 나오면서 납득이 갔던 것 같아요. 또 어떤 기억들은 내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갑작스레 문제가 되는 것처럼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ㅎㅎ
소유정
<마주>를 읽으면서 들었던 또 다른 생각은..요즘 최은미 작가가 반복적으로 그리는 여성 인물에 대한 것이었어요. 이 소설도 그렇고,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는 <그곳>도 그렇고요. 다소 신경증적인 면모를 보이는 여성 화자가 재난 상황을 맞닥뜨린다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 부분이 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에 이야기했던 전형성을 벗어나는 인물의 특성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 독자에게 분명한 쾌를 선사하는 서술도 그 때문인 것 같아서요. 여러분들이 말씀해주신 178-179쪽의 서술들도 같은 맥락에서 좋았어요.
김지운0
저는 소설이 중후반부로 넘어가며 딴산이라는 지역, 그리고 그곳에서 질병을 매개로 형성된 공동체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면서 이 작품이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단일한 사태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질병을 낙인찍고 차별해온 오랜 역사를 환기해주는 것 같아 좋았어요. 딴산이 결핵 환자들의 은둔처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 직전까지(219~220쪽)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소록도 같은 지명을 떠올린 분이 왠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비록 두 지역민들이 겪은 질병의 종류, 국가 폭력의 직간접성 등에는 차이가 있지만요.)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딴산 주민들이 국가로부터 방치, 소외, 배제의 경험을 반복하는 장면에서는 실제 현대사의 일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이야기를 읽거나 볼 때 시대나 제도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옭아매는지(그리고 인물들이 이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주목하는 편인데요. 『마주』에도 주세법 같은 행정 조치가 만조 아줌마의 삶을 규제하고 뒤바꾸는 면면(238~239쪽)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강보원
다른 분들처럼 저도 초반부를 집중하기 힘들었는데요, 저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게 신기하네요. 저는 다소 산만한 이 이야기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어떤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결핵이 힘든 질병이라지만 왜 이렇게까지 외상적으로 다뤄지는지, 화자인 나리가 겪었던 '여성적 이미지'와의 불화, 어머니와 딸의 관계, 판데믹 시국 이야기, 나리와 수미의 관계, 중간중간 등장하는 만조 아줌마 이야기, 수미와 딸의 관계, 등등... 이것들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각각 중심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만조 아줌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 소설이 안정되었다고 느꼈는데요, 김지운 편집자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결핵이라는 질병도 코로나와 연결되었을 때 제 자리를 찾았다고 느꼈어요. 사실 딴산 이야기가 나오고, 그것이 코로나의 격리 상황과 연결되기 전에는 결핵이 뭔가 너무 추상적인 상징처럼 다가왔었거든요. 질병을 그것 자체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어떤 정신적인 상태의 상징으로 쓰는 경우를 종종 봤던 것 같은데 저는 그런 식의 사용에 공감이 잘 안 되어서요. 그런데 딴산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면서 소설 속에서 결핵이라는 질병이 갖는 의미가 뚜렷해지면서 확장되고, 현실의 다른 여러 부분들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층위의 의미들이 함께 다가왔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연결이 드러나는 부분을 꼭 이렇게 숨겨두었다가 보여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103쪽까지도 "만조 아줌마도 지금을 겪고 있다. / 나는 그 당연한 사실에 가볍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문장이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화자가(혹은 소설이) 서사적인 완급조절을 위해 뭔가를 말 해주지 않는다고 느껴지면(물론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답답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알고 봐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정용준
제가 가장 늦게 감상을 말하게 되는 것 같네요. 우선 선생님들 의견 하나 하나 읽어가는 재미가 있네요. 각자 밑줄긋거나 인상 받은 부분이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해서 소설의 완성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생각도 해봤습니다. 저도 동의했던 부분들을 먼저 나눠보자면 코로나 시절의 생생함이 가장 먼저 보였습니다. 저는 역사의 어떤 시절을 기록하는 것에 있어서 소설은 정말 뛰어난 형식이라고 믿고 있는데요.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시절을 통계와 자료가 아닌 감각과 감정의 영역으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정서와 한 사람의 공포와 불안을 또한 고립과 단절을 소설적으로 잘 표현해서 대단하는 생각과 함께 고맙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정용준
저도 <여기 우리 마주>를 떠올리며 소설을 읽어나갔어요.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정적으로 동의하면서 또 충격을 받아가면서 읽었던 부분은 엄마의 정체성. 풀어서 말해보면 아이를 키우는,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너무 사랑하고 하지만 너무 힘든, 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것을 낯설어하고 괴로워하고 경우에 따라 분노에 이르는 장면과 인식이 정말 좋았어요. 어떤 부분에서는 갑작스럽게 울컥, 하며 목 윗부분에서 뜨거운 물 같은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정도로 좋았어요. 감동이라는 것이 대부분 긍정적이고 아름 다운 가치로 사용되지만 감정이 움직인다는 뜻만 봤을 때 이 소설은 제게 삶과 현실에 관한 부정적이고 잔인한 방향으로 마음이 함께 요동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그 부분에서 큰 동의가 됐습니다
정용준
캐릭터를 하나의 명제와 하나의 에피소드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인 자극과 반응을 배치하여 도리어 그 점에서 인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습니다. 최은미 작가가 최근에 계속 보여줬던 인물의 모습이었지만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는 느낌 보다는 새로운 디테일을 잡아 다른 면을 혹은 같은 면이지만 더 깊은 심도를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정용준
아쉬운 점을 조금 말해보자면 저 역시 만조 아줌마 부분이 중심서사와 만나는 부분이었는데요. 만조 아줌마와 함께 했던 에피소드와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발생된 감정과 생각같은 것들은 독자적으로 놓고보면 좋았고 아름다운 부분도 많았지만 그것이 중심 서사와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가 조금 단순하거나 감정을 좋은 쪽으로 해소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마지막에 이르러 딴산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리는 부분은 뾰족하게 솟아오르며 긴장이 생겨서 좋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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