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공부를 위한 모임입니다! :)
여공1970 혼자 읽기
D-29
허수수모임지기의 말
허수수
“ *'중성적' 노동사?: 민주노조 담론 비판
-한국에서 씌어진 대부분 노동 운동사에서 주된 행위자들이 여성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중성적 혹은 변형된 남성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단적인 예가 '전투성'인데, 1970년대 청계피복 노조의 9.9 투쟁이나 동일방직의 나체투쟁, YH무역의 농성 등이 전투성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80년대 씌어진 노동사들은 대부분 1987년 혹은 이전 시기 정치적 노동운동과의ㅣ 대비를 통해 1970년대 노동운동의 한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노동자 한계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여성 노동자들은 결혼 후 퇴직이나 가족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담론이었다. 나는 이런 지배적인 담론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의 '부차, 주변화'라는 당대 지식인(특히 운동 진영 지식인)의 기획과 의도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지배적 담론들은 '만들어진 담론'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담론은 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한 의도와 목적 하에서 만들어졌고 지배적인 지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중요한 점은 여공을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화시키는 당대 혹은 후대 '담론의 형성 방식'이다. 여성 노동자들 대부분이 학력이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당수 유인물이나 노조의 요구사항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경험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콤플렉스는 있었을지라도 자신이 무식해서 못났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여성 노동자들이 '무식'해서 돈도 더 못주겠고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담론이 유포되었나? 내 생각에는 여성은 비생산적이고 열등하다는 그래서 언젠가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배적 담론이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산업화 시기 국가는 '산업전사'라고 여성 노동자들을 부추겼지만 여공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그녀들이 비생산적인 집단인 동시에 생산과 절약에 복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군다나 남성 사업장에 비해 쟁의와 투쟁이 빈번했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윤리적 규정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생산성 담론'이 표명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여성 노동자들의 신체는 모순적이고 복잡한 담론에 의해 규정되었다. 한 축으로 미래의 어머니이자 건강한 노동력을 생산해야 하는 신체로 규정되었고, 다른 한편 생산성 향상을 위해 다른 곳으로 낭비되면 안되는 신체이기도 했다. 이 점이 도덕적인 규율과 금욕주의가 합치되었던 지점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유아 유기, 사창가 출입, 부업으로 유흥가 출입 등은 '더러운 신체'로 간주되어 퇴사가 강요되었다. 하지만 더러운 여성 노동자라느 ㄴ여성 노동자의 육체에 대한 담론은 상당 부분 국가 정책 및 지식인 등 도덕담론을 강조하는 측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유교 담론에 기초한 도덕적 육체, 생산적 육체라는 담론은 작업장 밖에서도 여성의 육체 위를 횡단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의 무의식을 휘저어 놓았다. 이처럼 이미 정해진 잣대로 여성 노동자들의 육체는 분할되었고 고착된 담론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공장 내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은 '더러운 욕망 덩어리'처럼 규정되었다. 대부분 작업장에서 '여공 중에 처녀는 없다' '공단 여공은 모두 따먹혔다' '잔업 배분은 담임과 동침 여부에 달렸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담론들에 대한 사회의 시각이었다. 노조와 국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성 윤리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으며 이것은 재야나 지식인층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다른 한편 고용주는 타락하기 쉬운 여성 노동자들의 신체를 기숙사와 공장 내에 감금함으로써 치유하고자 했다. 이것의 표현이 주휴의 금지와 기숙사 감금 등의 정책이었다. 주목할 점은 두 입장 모두 그 방법이 달랐을 뿐, '생산적 육체'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교육을 통한 훈육을, 후자는 감금을 통한 억제를 강요했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중성적'노동사?: 민주노조 담론 비판,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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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우선 여성은 대부분 꽃, 진달래, 민족, 흙 가슴 등으로 은유된다. 특히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여성 전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여성을 '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총을 든 진달래 같은 여성 전사"는 상상해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민족의 꽃'이라는 부차적 주체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진 가사다.
또한 여성의 남성과의 관계를 묘사한 구절도 무척 눈에 거슬린다. "남성 전사 산 오를 때 함께 오르며", "궂은 일도 마다 않고 해방을 위해"란 구절을 보자. 여성 전사는 남성이(아마도 빨치산을 의인화한 듯하다) 지리산을 오르면 같이 오르고, '궂은 일'(가사노동)도 마다 하지 않는 희생의 화신이다..식민지 시기 한국과 일본에도 이런 '궂은 일'에 대한 일화는 많다. 당 세포가 신분을 위장하고 동조자 여성과 결혼을 가장해서 동거할 때 협력자 여성에게 가사노동은 물론 성적인 협조까지 얻은 사례조차 있었다. '운동의 대의'는 이런 궂은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구절은 후렴인 "흙 가슴 열어젖히고 민족의 영원한 꽃"이다. 여기서 왜 흙 가슴이란 상징이 등장하는지 '여성전사=민족의 꽃'으로 의인화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른바 '민족문학'에서 '흙=대지=어머니(혹은 여성)=민족의 안식처=가족'으로 상징되는 것이 보편이었다. 남성의 시선에서, '젖가슴=생명의 근원'으로 상징되는 것은 공공연히 여성의 신체를 남근적 시각에서 왜곡하는 셈이다.
남성에게 가족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안식처이자 자신의 강제력이 행사 가능한 사적 영역이다. '가족=사적 영역'이란 공적, 사적 영역 분리 담론의 가장 큰 효과는 남성지배의 장으로서 가족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궂은 일을 묵묵히 인내하는 가정의 꽃인 여성, 이것이 근대 남성이 상상하는 가정이자 '여성유폐적인 가족'의 실재이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호명하는 상당수 담론도 여성의 정체성과 무관한, 여성의 신체, 여성권을 '남성=민족'에 종속시키려는 남성적 시각에 기초한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여성전사: 전사, 투사론,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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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1987년 역사, 사회과학 서술들은 산업화와 노동문제 사이 몇 가지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다. 사회과학에서 사용해온 인과적인 역사적 해석과 방법은 '과학적 방법'에 기초해 있다고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들 사이의 인과적 연관관계의 탐구와 이를 정형화시키는 작업은 특정한 담론과 지식들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반대편의 담론과 지식을 배제해왔다. 특정한 변수를 통해 설명 가능한 사건을 연구자가 선택하고 이런 연구 방식이 관행화되는 것은 지식을 둘러싼 권력이 작동한 결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특정한 인과론에 기초한 설명 자체가 하나의 담론이자 텍스트이다. 지식이 일련의 절차를 걸쳐 과학적으로 검증된다는 가정은 특정한 담론을 형성하거나 배제하는 권력 효과를 내장하고 있다...
나는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노동사와 노동운동사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특정한 입장과 담론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루는 사업화시기 객관적인 역사(혹은 지배적 담론의 역사) 역시 역사가들이 만든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것을 객관적 진실로 지지해주는 것은 지배적인 지식체계와 권력이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6. 푸코를 만나다:계보학을 통한 여공 담론 분석,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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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베리 스마트의 '마르크스주의와 미셀 푸코의 대화'를 보면 계보학에 대해, "보편적 이론 속에서 탈루되거나 무시되어온 역사들의 목소리를 내어주며,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던 여러 형식의 지식들을 불명예에서 구출...특히 계보학적 분석은 과학을 수단으로 하여 지식을 위계화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위계화가 끼친 영향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근대 과학이 이룬 총체성과 이를 유지하는 위계적 담론 질서는 위계질서 그 자체와 이것이 미치는 효과에 의해 재생산되어왔습니다. 특정 자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대상과 그 담론은 배제되어 '망각'되어 집니다.
위생학 혹은 성에 대한 규율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이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가족 양식과도 접합된 문제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신체나 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도시 공간의 전염병, 질병 등 담론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위생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특히 안정되고 생산적인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감시와 관리, 규율이란 담론이 '공장담론'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푸코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신체와 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을, 그들이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도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단적인 예로, 도시 위생학이나 주거개선, 금주운동 등의 박애주의자들의 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규율과 권력 그리고 지식간의 관계 및 효과에 지속적으로 천착한 인물이 바로 푸코입니다. 푸코는 '권력'이 생산양식 등 큰 덩어리들을 규성하며, 규율은 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각인된 권력이자, 이를 통해 개인의 시공간을 노동력으로 전화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흔히 사회적 시간이나 공간은 텅 빈, 역사가 없는 대상이 아니라 권력과 그 전략이 작동하는 시선이 모이는 곳입니다. 규율이 근대 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 바로 작업장입니다. 작업장은 분진과 먼지 등으로만 기억되지만 공장담론을 통해 작업장 규율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신체에 각인되는지는 아주 중요한 이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조야한 폭력으로 보였지만, 그 안에는 권력의 시선이, 특정한 장치를 통해 개인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간이 작업장입니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6.푸코를 만나다: 계보학을 통한 여공 담론 분석_푸코읽기(1):계보학,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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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푸코가 비교적 일관적으로 유지한 기획은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간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동일자는 한마디로 이성의 내부이자 '정상'과 동의어이며, 타자는 여기로부터 배제되는 경계 '밖'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경계가 확정되는 방식과 주체이다. 푸코가 초기에 탐구한 광인과 정상인간의 경계문제가 그러하다. 정상인이라는 틀에서 광인을 보고 판단한다면 광인은 항상 광인이고, 이들 간의 경계는 유지된다. 문제는 이러한 점, 바로 광인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동일자의 시각을 허물어 내는 일이다.
하지만 푸코의 의도는 광인을 정상인으로 돌려놓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푸코는 '타자'로 일컬어지는 광인, 흑인, 동성연애자, 범죄자, 이민자 등으로 대표되는, 동일자에 가려서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영역을 다시 재고할 수 있는 인식의 변환을 추구했다. 과학이나 치료라는 잣대로 합리화되던 이러한 경계를 허무는 작업은 역사적 근대를 파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기서 푸코는 두 가지 경계 허물기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동일자=정상'의 내부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동일자를 해체하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와 경계의 틀 안에서 그들이 내지 못한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전략이다.
다음으로 계보학을 살펴보면, 널리 알려진 '감시와 처벌'의 여러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푸코의 목표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계를 유지시켜주는 무엇인가가 근대 세계에서 존재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는 과학이나 담론의 형태로 존재해왔다. 여기서 담론은 대상을 주체화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지식, 권력 그리고 담론에 덧붙여, 이들의 제도적 물질성을 보장 해 주는 '장치'들이 산재한다. 담론은 스스로 작동불가능하며, 권력이 지식에 의해 정당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경계가 유지되는 것 역시 아니다. 일상적으로 타자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타자들이 경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장치가 필요하다. 계보학은 동일자가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권력(과 그 장치)의 효과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앞서 말한 고고학이 경계선이 만들어진 역사를 따라 타자의 숨겨진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라면, 계보학은 경계를 재생산하는 담론-지식-권력의 '공모현상'을 파헤친다.
중세 인간의 신체에 대해 가해진 처벌은 신체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었다.이는 전제권력이 권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공포의 순환장치이기도 했고, 범죄를 예방하려는 '보복'의 효과를 지니기도 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근대에 이르면 이러한 보복과 공포의 주입이라는 주체화 방식이 규율이라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제 범죄자도 인간이라는 주체로 재생될 수 있는 재활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범죄자도 법적인 개인으로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감시 메커니즘이 근대의 시공간에 각인된다. 시간표, 신체 및 동작의 규격화, 시간통제, 공간의 분리, 사회적 제재의 정교화 규칙화 등이 근대적 공간이 공장, 감옥, 학교, 군대, 병원 등에서 하나의 원칙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처럼 푸코에게 권력은 지식과 결부된 실체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실체이다. 아마도 푸코는 이것을 '생체권력'이라고 부른 듯싶다. 이제 권력은 억압적인 것이 아닌, 생산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전후 한국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경계는 '국민-비국민'과의 경계선이다. 노동자들 역시 산업화 시기 노동자로 불리지 못했고, '근로자'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주체로 호명되어 왔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6. 푸코를 만나다:계보학을 통한 여공 담론 분석_푸코읽기(2):계보학,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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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여공 담론'은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1970년대 여공의 담론이다. 이는 작업장, 주거, 노동운동 등에 대한 여공들의 익명적 지식 등을 포괄하는 '여공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이다이. (2) 1970년대 당대에 만들어진 ㅓ'여공에 대한 담론'. 이 경우 1970년대 고용주, 국가 기관, 교회 등 여공을 둘러싼 담론 생산자들이 1970년대에 생산했던 담론들이다. (3) 1970년대 이후에 노동사 연구자들과 노동운동가 등에 의해 만들어진 '여공에 대한 담론'을 마지막으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1970년대 여공 및 여공에 의해 주도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평가 및 해석이 중심이 된 담론들이다.
1970년대 노동운동 및 노동 현실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1980년대 초반기에 출간되었다. 이들 자료는 1980년대 운동이 지향한 '변혁지향성'이라는 목적을 전파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1980년대 중반 정치적 노동운동 및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평가를 둘러싼 노선 갈등이 심했던 것으로 미루어, 1980년대 노동운동의 '반면교사'로서 1970년대 노조운동을 상정하고, 1970년대 노조운동 및 주변 상황 가운데 특정한 사실과 경향을 부각시키기 위해 임의적으로 수기가 작성된 면도 적지 않았다.
한국 여공의 경우, 문맹률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기록한 자료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신문이나 정부 통계는 왜곡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노동자 상을 그려내는 경우가 많았다.
여공의 담론 분석을 통한 계보학적 연구는 여공에 대한 지배적 담론의 지층 밑에 숨겨진 의미와 맥락, 관행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숨겨진 비공식적 지식을 드러내는 작업은 또 다른 공식적 역사를 쓰는 것과는 '정반대의 작업'이다. 바로 사료에 대한 '도구적인 사용'이 계보학의 전제조건이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프롤로그_7. 왜 '여공'인가?:여공담론의 대상과 사료,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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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이 점에서 식모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보는 의미는 산업화 시기 식모의 존재 조건 뿐만 아니라 식모라는 되는 주변부 여성을 둘러싼 담론들 사이의 갈등과 각축을 분석함으로써 이들이 '주변화, 타자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모의 존재를 가정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요보호 여성'(혹은 잠재적 윤락여성)으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정신적 계몽을 강조했던 국가의 담론과 식모에 대한 사회범죄의 원인을 은폐하고 단순히 '사건화'시켰던 남성 지식인들의 담론, 가정 내부에서 식모의 존재를 전업주부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가족 형성의 장애물로 사고하며 당시 군사 정권의 가부장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와 공모했던 중심부 여성의 담론 등은 분리된 것이 아닌, 산업화 시기 새롭게 등장한 식모라는 주변부 여성을 둘러싼 '각축전'이었다.
*식모:그들은 누구였는가?
19세기 서구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담론은 남성과 여성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강조했다. 반면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는 그 양상이 다소 달랐다. 한국에서 근대화 프로젝트 역시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함에 있어 존재론적인 차이에 근거한 성별 분업이라는 관점을 고수했다. 동시에 여성을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하는 '적극적인 동원'의 대상으로 변형시켰다. 하지만 성별 분업 내지 성별 영역을 허물지 않는 상태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의 '보조적 노동력'만으로 의미를 지녔다.
*산업화 시기 여성의 고용상황
1960년대 당시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 형태 등을 간략히 살펴보면 1970년에 14세 이상 생산연령 인구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91만 2천여 명이 더 많았으며, 여성 취업자들은 연평군 3.1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산업별로 보면 제1차 산업 종사자가 57.2%, 제2차산업(12.2%), 제3차 산업(21.6%) 순이었다...그 결과 구이 및 구직자의 직종은 대부분 접객부를 요구했고, 취업의 상당수가 요식업, 서비스업계 개통이었다.
특히 산업화 초기 여성들은 제조업 등 안정적인 직장에 종사하기 보다는 육아와 가사를 동시에 병행할 수 있는 그리고 통계상 파악이 어려운 직종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한 버스표 팔기, 인형 옷 만들기, 봉투 만들기, 레이스 달기, 수놓기, 가정부, 행상 등이 그것이었다...
미혼 여성들이 대규모로 이농한 결과, 서울시 전체 가구의 31.4퍼센트가 가정부(식모)를 두고 있었으며, 그 수가 무려 24만 6천 명으로 추산될 정도였다. 식모 혹은 가정부들은 '기타 서비스업'이란 항목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식모의 가사노동ㅇ르 가치 없는, 또는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한 지배담론의 반영물이었다. 서울시 통계조사(1963~66년)에서는 식모 및 유모로 취업한 남성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가사보조 노동=여성노동'이란 인식의 반영물이었다.
*'무작정 상경'과 농촌 출신 누이들
-신압화 시기 여러 통계를 보면 여성의 경우 14~19세 미만의 미성년 노동자들의 비중이 증가한 반면, 남성은 진학 인구 확대와 함께 같은 연령의 취업자 구성비는 낮아졌다. 여성 취업 증가가 보여주는 점은 개별 가족의 생계가 압박을 받은 경우 가장 먼저 노동시장으로 방출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산업화 시기 이후 그 양상은 변했다. 저소득층 가족일수록 교육 기회에 있어서 아들과 딸 사이에 차별이 분명해졌고, 이 과정에서 가족 내 젠더 관계의 불평등이 재생산되었다. 이들 가족의 생존 전략과 신분 상승 전략은 가족 성원 간의 성차별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처럼 하층계급 가족들은 가족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남성' 자녀 이른바 '미래의 가부장'의 교육에 가족성원의 소득 및 자원을 공동 출자하는 경향이 강했다.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미혼 딸들의 기여는 매우 크고 중요했며, 그 대표적인 예가 가족이 생계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딸의 취학을 중단시키거나 어느 아들보다 먼저 노동시장에 방출하고, 결혼을 늦추는 등 가족의 생계책임을 거의 딸에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1969년을 고비로 농촌 인구의 절대 수가 감소하고 사상 초유의 인구 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가 도시 빈민 등 비공식 부분을 대규모로 양산한 정책은 농촌 인구의 광범위한 이농을 유도하여 이들을 도시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무서운 서울 역전"
-한편 '무작정 상경' 여성이 급증하던 1960년대 서울역에서는 속칭 '뚜쟁이'에 의한 상경 여성의 매춘 여성화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영세 농어촌 부녀자 혹은 소녀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역 주변을 배회하다 곤경에 처했을 때 펨푸, 불량배, 사설 직업소개소 등의 농간에 넘어가 윤락의 길로 빠지곤 했다. 이 와중에 무작정 상경 여성들을 '커미션' 5백 원에서 5천 원에 팔아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린 소녀들이 서울로 몰려든 이유는 무엇일까? 1968년 1월부터 9월까지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 600명 가운데 425명에 달하는 65퍼센트 정도가 도시에 대한 동경 때문에 무단가출했거나 부모의 무관심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취직, 친구의 유혹, 친척 찾기, 기술 습득, 서울 구경, 교육 등의 이유로 상경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이유들로는 가정불화로 상경한 사람이 23퍼센터, 마지막으로 생활고를 못 이겨 상경한 경우가 10퍼센트 내외였다.
*식모와 요보호 여성
-주목해야할 사실은 산업화 시기, 특히 1970년대 이후 '공순이'라고 여성 노동을 천시했던 지배적 담론이 1950~60년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50~60년대의 경우 여공은 천대받는 식모보다 훨씬 안정된 직업이었다...하지만 소녀들이나 부모들은 공장환경에 대해 두려워했으며, 차라리 가정부 생활이 어린 소녀들을 보호하고 미래에 그녀들이 해야할 가정의 현모양처로서의 역할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요보호 여성이라고 불린 여성들을 보호하던 <희망의 집>에서도 도덕적 타락을 우려, 여성들이 가정생활을 익힐 수 있고 살림살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하우스 메이드'(가정부)로 보내는 것이 가장 안심이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부녀'라는 이름
-산업화 시기 여성은 여성이 아닌 다른 이름, '부녀'로 불렸다. 부녀라는 용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부녀는 가장의 아내이자 딸로서 여성을 의미했다. 바로 독자적인 자율성 및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닌 가부장 및 관련 제도, 이데올로기의 종속, 부속물로 여성은 간주되었다. 부녀 정책이라는 당시 용어도 여성에 대한 국가 담론을 함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녀 정책"으로 명명된 당시 정책 가운데 부녀복지 상담 사업은 서울역전을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상담 활동을 전개해서, 귀향 및 취직 알선, 친척 안내 등이 이루어졌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1장. 식모는 위험했다.,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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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당시 부녀 보호 산업의 기본적인 입장은 주변부 여성들의 존재가 '건전한 가정의 질서와 사회 기강 및 윤리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산업화 시기 부녀 보호 정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보호 대상인 요보호 여성의 위치와 실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결여된 점과 이 여성들 대부분을 경제, 가정적으로 불우하고 주변적인 여성 집단, 다시 말해 모자 가정이나 윤락여성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근대화 시기 식모들에 대한 국가의 지배적인 담론은 1950년대 그리고 1970년대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윤락 여성'이자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이런 시각을 보여주는 예가 식모 '신상카드'였다. 1965년에는 각 파출소에 식모가 있는 가구를 골라서 '신상카드를 작성할 계획임을 밝히며, 이런 신상카드를 만드는 이유를 무단가출과 이에 따른 타락, 유괴, 절도, 범죄 예방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요보호 여성', 잠재적 윤락 여성
한편 1970년대 들어서 기혼 부인의 노동, 연소 소녀의 노동, 미호놈, 윤락 여성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이전의 '요보호 여성'을 중점으로 하던 부녀복지 활동은 '부녀자 일반'으로 확장되었다.
요보호 여성을 둘러싼 이런 인식의 전환은 무엇을 뜻할까? 한마디로 말해서 기존 부녀 행정이 관심을 지니지 않았던 식모, 여차장, 밤거리, 여성, 농촌 여성 등까지 요보호 여성의 범주에 포함시킨 의미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요보호 대상의 확장이 아닌, 조국 근대화라는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이들을 포괄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미였다. 이제 주변부 여성에 대해 국가는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기 위한 '정신적 계몽'이란 방향으로 돌아섰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보호'는 이들의 권리에 대한 조치가 아닌, 가족 단위의 부양 체계에서 탈락한 자들에 대해 '도덕적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 '보호받는 국민'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며, 때문에 '요보호자'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소비적인 무상 구호'가 아닌, 도덕적인 교화와 지도, 자활이 가능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추게 하는 정신계몽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농촌 출신 하층여성들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식모, 여차장 등의 경로를 거치면서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런것도 여의치 않으면 이른바 '호스티스'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에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에는 '호스티스 영화'라는 특이한 장르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의 방송과 영화에서 공장, 특히 부정적으로 그려진 공장이 등장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를 주인공 혹은 대상으로 한 창작물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 대체물로 자리 잡은 것이 호스티스 문학과 영화였다.
도시 과물화, 비공식 부문의 급격한 팽창, 주거 및 고용이 불안정했던 주변부 사회집단의 거대화가 낳은 생계형 매춘의 급격한 증가는 매춘 여성뿐만 아니라, 식모로 대표되는 주변부 여성 노동 일반을 윤락 행위를 하거나 현저히 그러한 우려가 있는 자로 규정했다. 그 결과 이들 대부분은 '가출 여성', 다시 말해 가부장의 '보호'로부터 이탈한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주변부 여성 노동을 사회적으로 위험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타자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또한 여성을 보호할 일차적 책임은 국가가 아닌 가족에 있으며, 가족에서 이탈한 '요보호 여성'이라 지칭되는 주변부 여성 노동에 대해서는 '교화되고 지도받을 의무'만이 강조되었다.
유괴, 절도, 살인, 폭행 등의 '범죄'로 해석된 식모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하층 사회 여성들이 지닌 욕망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지배적 담론은 식모만이 아니라, 버스 여차장 누나, 사환 누나, 술집에 다니는 여성들을 포함하는 하층 사회의 가난한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런 담론이 지배적이게 된 이유는 하층 여성들이 중산층, 지배, 지배 게급에게 '이질적인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중산층 가족들은 이런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가시적으로 그녀들을 '범죄시하는 단어와 담론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식모로 상징되는 하층 계급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한편으로는 가족 내부의 식모에 대한 학대와 비인간적인 면을 무각시키며, 인간적인 대우를 호소하는 '인간주의' 담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층 사회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 안에는 식모로 대표되는 하층 사회 여성의 욕망, 중산층 가정 파괴에 대한 공포가 착종되어 있었다.
사건 목록에서 보여 지듯이 식모에 대한 정신과 육체적 폭력, 임금 체불, 성적 유린 등을 둘러싼 내용보다 식모에 의한 '범죄'가 더 비중 있게 보도되었다. 따라서 '사건'자체의 보도를 통해 식모는 가정에 위험한 존재이고, 따라서 식모가 당하는 폭행, 임금 체불, 성폭력 등을 '당연시'하는 담론을 형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식모 범죄의 실질적 원인은 불미스러운 관계 혹은 성적인 학대나 성폭행, 주인집에서 맡아둔 임금의 체불 등 비인간적인 대우와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다.
*중산층 가족 형태와 '식모폐지론'
산업화 시기 '여성'에 대한 지배적 담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여성 지도자들이 여성, 바로 표준적 여성'의 재현은 50년대 여성성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60년대 후반 장한 어머니, 모성애의 상징으로 칭송되었던 여성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남편과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자식(대부분이 남성)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표준적 여성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 산업화 시기에 들어서 50년대 '모 중심 가족'하에서 초보적으로 형성된 근대적 모성이란 관념이 점차 구체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은 두 가지 영역에서 재현된다. 한편으로는 중산층 가족의 초기적 형성 과정에서 보여 지듯이, 소비를 향한 여성의 욕망은 좌절되고 근검절약하는 전업주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으로 재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둘러싸고 한국 여성들은 근면한(혹은 근면해야만 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은 내핍과 근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 윤리를 내면화하도록 주체화된다. 이것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제기된 '민족 개조를 위한 근대적 노동윤리의 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군사정권은 경제 서장을 위한 총동원 체제로 사회를 재편하는 동시에, 이전 시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상구호를 낭비적이며 비생산적인 정책으로 간주해 최소화시키고, 전후 난립한 구호시설을 감축했다. 근대적 가치는 곧 계획성, 계산 가능성, 효율성 등으로 표상되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가족 계획과 피임약 보급 등의 조치였다.
*'근대적 노동윤리'와 근검절약하는 여성
이러한 근대적 가치의 전 사회적 확산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주부의 각성이 제기되었으며, 그에 뒤지지 않도록 여성에 대한 지도와 계몽이 강조되었다. 여성에 대한 의식 개혁, 문맹 퇴치, 생활 개선, 가정살림의 합리화 등이 당시 부녀 행정의 규범적 기초였다. 특히 여성과 가정생활은 '경쟁적인 근대적 시장'과 구별되는 전통의 영역이자, 미풍양속을 지켜가는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부녀 행정의 목표는 '과학과 윤리가 조화되는 가정'이었고, 여기서 가족 윤리란 남성 가장 중심의 가부장적 규범을 뜻하는 것이었다. 50년대 '모 중심 가족'을 경제 성장을 위한 '남성 생계부양자' 형태로 변환하는 것이 근대화 프로젝트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과소비로 상징되는 가정주부의 반대 항에는 저축과 근검으로 상징되는 '알뜰한 주부'라는, 가정을 과학적으로 설계하는 이상적 주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알뜰한 생활=식모 없는 가계 운영'이란 식으로 칭송하였다.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근대적 모성
동시에 강조된 것은 이른바 "핵 가족론"이었다. 한국사회의 핵가족화는 61년 가족계획 사업으로 인한 소가족화 현상과 인구 증가, 경제 성장, 산업 구조의 변화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 및 경제적 자원을 독점했던 가부장권의 약화란 이데올로기적 조건 변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의 복지 및 보호 기능은 '가족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선 가족 후 복지'가 강조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한국 사회에 강력하게 자리 잡은 '유교 가족주의'는 가족을 중시하고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의 생활보장을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특히 60년대 이래 강력하게 추진된 산업화 정책은 자본 축적의 극대화를 위한 성장 제일주의에 따라 국가복지를 사실상 방기했다. 반면 국가는 그 부담을 개별 가족으로 전가하기 위해 유교 가족주의를 활용했다. 이념형으로 가족 임금은 노동자 가족에게는 실제적으로 적용이 불가능한 범주였으며, 대부분 저임금 여성 노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한국에서의 가족 임금 역시 76년을 전후로 해서 중산층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결국 이것은 모성으로서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정책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처럼 60~70년대 육아를 전적으로 여성이 책임지게 되었다...결국 산업화 시기 가족은 사회적 문제를 예방하는 기능을 해야하며, 좀더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모든 사회적 부작용을 가족, 더 정확하게는 '가족 내 여성'에게 전가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족 내부 여성의 역할이 가정 내부 감정 노동, 전문적인 자녀 교육 등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이는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중산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핵가족'이데올로기의 전면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식모 폐지론'을 둘러싼 담론
중산층 가족 내 사생활, 과학적 모성, 자녀 육아 등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 '식모 폐지론'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59년대 그리고 산업화 시기 식모의 존재는 중산층 가족을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만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부터 기존에 가사노동을 보조했던 식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의 조력자'에서 '과학적이고 근대적 가족 형성의 방해물'로 식모의 의미가 옮겨간 것이다.
가정은 사생활의 공간이자 가부장인 남편의 '휴식'공간이라는 '핵가족 관념'이 강조된다. 가정이 사회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혹은 사회와 '대립'되는 안식처란 의미를 획득하면서 유휴 노동력으로 표상되던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위상이 변하게 된다. 바로 '근대적-과학적 모성'이란 이데올로기가 가족 내부에 주입된 것이다.
더 나아가 지배 담론은 식모의 존재를 핵가족에서 전업주부가 맡아야만 하는 중요한 역할인 자녀의 양육과 교육 등과 연결시켜 사고했다. 따라서 식모를 대신해서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모성의 양성을 위해 주부들의 남는 시간들은 가정과 국가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육아'는 주부에게 있어서 어떤 종류의 역할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실제적인 일상 생활보다 '어머니 노릇'을 강조한는 담론이 강화되었다...이처럼 식모 폐지론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정주부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이고 과학적이며, 국가가 제시하는 '근검절약'이란 모토를 내면화한 '모성의 창출'이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 시기 부녀 정책도 기본적으로 여성을 가족과 동일시하면서, 여성에게 가족 안에서의 역할, 즉 건전한 주부상을 부각시켰다. 이는 50년대 '모 중심 가족'에서 근대화시기에 들어서는 경쟁적이면서 자녀 교육, 근검절약하는 가정 등의 전문가적 면모를 가진 현모라는 지배적인 모성 담론으로 이동한 것이다. 한편 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식량 부족, 열악한 주거 환경, 높은 유아 사망률 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캠페인이 구식 결혼 풍속 및 가족 관습 해체, 전통적인 가부장 가족 비판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안에는 봉건적인 식모 제도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과학적인 모성과 육아에 대한 지배적 담론은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핵가족이란 가족 형태를 통해 관철되었으며, 이는 위생학, 규율 지도, 교육 지도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과학적 모성 담론은 국가에 의해 제기되고, 중산층의 가족임금 확보를 통해 그 물질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녀 중심적이며 감정 소모적, 노동집약적이고 소비적인 모성 이데올로기가 핵가족 내에 장착된다. 바로 과학적, 근대적 모성은 자녀의 양육과 교육이란 역할로 재구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식모 등 주변부 여성들의 중산층 가정으로부터 '배제'와 노동 시장의 '참여'가 중첩되었다.
이와 같이 식모 폐지를 둘러싼 담론은 중산층 여성들에게 가정주부로서의 책임을 강조했고 근대적 모성과 남성생계부양형 모델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담론화 과정에서 식모의 존폐 여부가 중산층 주부의 가사 노동을 둘러싼 '여성의 가정 내부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모 폐지론이 식모라는 가사보조 노동력의 존재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내 성별 위계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지 못하고, 중산층 여성들은 자녀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모성으로 스스로를 주체화시켜야 한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1장 식모는 위험했다.,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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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수
“ 남성노동자의 작업장 폭력을 둘러싸고 은폐된 담론이 중산층 남성에 비해 남성 노동자들이 강하게 지닌 '남성다움'에 대한 강조였다. 작업장 폭력은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남성성을 폭려고가 일치시킴으로써, 공장에 다니는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남자다움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중시해야 할 것은 고용주와 남성 노동자들이 작업장 내 '성적 통제'를 통해 여성노동자들을 규율했다는 점이다. '성적 통제'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아래에서 자본이 성을 매개로 해서 여성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교섭력 및 조직역량을 약화시키려는 통제 양식을 말한다. 이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합리적인' 통제 전략이었다. 성과 연관된 담론, 장치 등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산업화 시기 여성 사업장에서 보편적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적 통제는 어느 특정한 부분에서만 발생하는 예외적인 통제 양식이 아니라, 자본의 '보편적인 통제 양식'이었다.
특히 남성들은 물리적 폭력만이 아닌,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드러냈다. 이것은 젠더불평등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학습, 재생산된 남성이자 미래의 가부장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작업장 성별 위계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남성 노동자들의 폭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성적 정체성에 근거한 폭력의 행사가 '남성적 역할의 수행'에 국한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남성적 정체성의 본질은 남성과 대립적 존재인 여성에게 여성적 정체성에 부합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유교담론에 기인한 '여성다움'이란 가치가 여성에게 부가되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유교 담론에서 여성다움이란 남성에 종속된 그리고 집안일에 충실할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이러한 여성다움이 지속적인 훈련과 학습에 의해 내면화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성은 사물과 상황의 원리를 파악하고 추상화 이론화하는 능력을 기르고, 여성은 이미 합법화된 원칙을 수용, 실행하는 도구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는 원리를 깨우치거나 추상화하는 능력을 여성에게 허용치 않겠다는 의미이다.
산업화 시기 공장 내부 관리자와 남성 노동자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성노동자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맺은 뒤, 모든 책임을 그녀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수법으로 작업장 및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성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는 점은 실제 성 폭력의 여부와 무관하게 당사자를 일반적 여성과 다른 여성으로 위치시켰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순결이란 규범을 파괴한(혹은 파괴당할 가능성이 높은) 여성으로 담론화되었던 것이다.
남성에 의해 여성노동자에 대해 가히졌던 폭력은 '관례적' 폭력이 아닌 남녀 성별 분리와 차이-즉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는-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 가운데 한 가지였다. 남성노동자에 의한 관례적 폭력은 성에 대한 여성노동자의 일상적 공포와 자기검열을 무의식적으로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잔업과 장시간 노동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벌이를 통한 경제적 조건의 개선과 교육 등 자아실현 때문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가난한 가족과 가족의 생계, 동생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머지 모든 것들을 유예할 수 있었다는 희생양 담론은 만들어진 담론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 산업화시기 고용주와 국가에게 여성노동자의 노동 혹은 일은 게약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의 노동은 국가와 가족에 대한 도덕적이자 윤리적인 관계로 인식되었으며, 이를 매개해주는 것이 성별이라는 은유엿다. 이것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오도하는 것은 서별 분업 담론을 정당화해주느 ㄴ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가족(혹은 가족주의)에 대한 강조는 여성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족을 위한 것으로만 회귀시키기 쉽다. 실제로 여성노동자들은 회사를운명공동체와 '동일시'하지도 않았고, 작업 자체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높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반장의 지위에 섬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작업장 위계질서를 인정했다. ”
『여공 1970 그녀들의 반 역사』 4장 힘세고 건강한 소녀들,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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