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징조들』 혼자 읽기

D-29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이러한 문제들이 뚜렷이 보이지만, 당시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든 금융위기가 신용 버블에서 시작되지만, 모든 신용 버블의 종착점이 금융위기는 아니다. 당시 금융 시스템은 21세기 초반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2005년은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도산한 은행이 없었던 첫 번째 해였다. 경기 호황은 악화되는 소득 불균형, 장기간 증가하지 않는 임금, 느린 생산성 증가, 노동 가능 연령층의 노동시장 참여율 감소 등 미국을 오랫동안 심각하게 괴롭혀온 경제 과제들을 가려놓았다.
위기의 징조들 제1장 일촉즉발의 시장 상황, 벤 버냉키, 티머시 가이트너, 헨리 폴슨 주니어
그러나, 미국 경제는 전반적으로 튼튼해 보였다. 설혹 경제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금융 시스템 자체에 회복력이 있어 별문제 없을 거라는 확신 또한 만연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심각하지 않은 경기 침체와 다양한 경제적 어려움들에 제법 잘 대처하면서 생긴 이 같은 믿음으로 은행들은 경기 침체에 대비해 손실을 감당할 만큼 충분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몇몇 경제학자는 파생상품 같은 금융 혁신 상품들이 시장의 위험을 더 잘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금융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낮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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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금융위기는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즉, 언젠가는 반드시 발생한다.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가 발견한 바와 같이 장기간의 시장 안정은 과도한 자신감을 유발시키는데, 이는 오히려 시장의 불안정성을 초래하는 단초가 된다. 이런 상황들은 주로 경기 호황기 때 발생한다. 유동성이 무제한 공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자산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처럼 보이는 호황기에 투자자들은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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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업과 다른 제조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기업들은 제품 원가와 품질에 사업 성공 여부가 좌우되는 반면, 금융기관의 성공 여부는 시장의 신뢰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신용credit’은 라틴어 ‘믿음credo’에서 유래한 단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예금’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 즉 일부 금융기관을 ‘신탁trust’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금융의 취약성을 감추면서 은행의 안전성과 영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적인 은행 건축물이 화강암으로 외벽과 기둥을 세우는데 치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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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융기관은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신뢰는 쉽게 사라진다. 신뢰는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이유로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신뢰는 대개 별것 아닌 이유로 쉽게 흔들리지만, 한 번 흔들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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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기관들은 부동산 가격이 무한정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다. 주택담보대출 붐을 일으킨 근본 요인은 결국 부동산 시장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대출 조건을 완화시켰으며, 이는 부동산 가격을 재차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상호작용했다. 대출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대출을 활용해 그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대출을 상환하는 게 어려워지면 추가 대출을 받거나 차익을 남기고 집을 팔아치우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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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몇 년 동안은 그런 장밋빛 가정이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2014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 중개인과 월가의 은행가들조차 호황기 내내 자신들의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 이들은 MBS에 투자한 사람들만큼이나 광증에 빠졌다.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임원들도 비슷한 착각에 빠졌는데, 대형 주택 회사인 아치스톤 스미스 트러스트가 이미 파산의 길에 들어섰을 때 이 회사를 220억 달러에 매입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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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부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신규 주택담보대출은 금융 시스템의 안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택담보대출의 직접적인 손실은 그 자체적으로는 문제가 될지 몰라도, 그래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를 기초로 하는 유가증권 상품을 만드는 유동화증권은 통화와 담보물의 일반적인 형태가 될 정도로 호황을 누리면서 금융 시스템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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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기 버블이 금융 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이 터졌을 때, 펫츠닷컴 같은 도산한 인터넷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돈을 잃었지만, 파급 효과는 별로 없었고 단지 가벼운 불황으로 끝났다. 진짜 문제는 대규모 환매 사태에 쉽게 노출되는 자금으로 만들어지는 버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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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리지 투자는 매력적이다. 레버리지 투자는 이익을 최고로 극대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레버리지 없이 자산을 사기 위해 100달러를 쓰고 그 자산을 다시 120달러에 팔면 20퍼센트의 이익이 남는다. 만약 100달러 중 자기 돈 5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95달러는 빌려서 같은 자산을 사 들인 다음 120달러에 팔면 400퍼센트의 이익이 난다. 레버리지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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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 사람은 이 사실이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 셋은 새로운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에 기관 내에 새로운 위기관리위원회와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금융 시스템 위기에 대처하려고 노력을 집중했다. 우리는 금융위기가 과거의 흔적일 뿐이라는 관념에 반박하며, 테일리스크(발생 가능성은 적으나 한번 발생하면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해 보다 강력한 위기관리 능력 및 겸허함을 갖춰야 하며, 금융시장에 만연해 있는 시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위험을 제한하기 위해 창조적이거나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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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어느 누구도 어떻게 했을 때 그런 위험들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과거 여러 번 위기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악의 위기를 예상하는데 실패했다. 후일 연준 의장인 벤은 그를 가장 놀라게 한 위기 경험은 “2008년 금융위기”라고 답했다. 우리 모두는 엉망이고 복잡한 금융 시스템과 관련, 안전성과 건전성을 명확하게 분석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을 걱정했지만, 금융 공황이 임박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는 했지만, 그 일이 발생하기 몇 달 전까지도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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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금융기관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는 초단기자금시장에 갑자기 대규모 환매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조달되는 자금은 대부분 담보가 있어서 부도가 나더라도 투자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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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측에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일부는 상상력 부재 때문이었고, 일부는 정부 내 조직의 실패 때문이었다. 금융 시스템의 위험을 감시하고 다루는 책임과 의무를 갖는 포괄적인 정부 조직이 없었다. 조각조각 끼워 맞춰놓은 규제 시스템은 권한이 너무 분산되어 있어서 금융시장에서 발생하는 상당수의 일들이 감독당국의 관리 범위 밖에 있거나, 다른 감독기관의 일들로 치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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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는 특히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한두 가지 명확한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레버리지의 폭발적 증가, 대규모 환매 사태에 쉽게 노출되는 초단기 자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그림자 금융으로의 리스크 이전, ‘대마불사’ 기관들에 대한 우려, 그리고 도처에 널려 있던 엉터리 모기지를 담보로 한 불투명한 파생상품들 등이 2008년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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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이 문제였다. 만약 서브프라임이 금융 공황을 촉발시키지 않았다면 단순히 서브프라임 대출자들과 서브프라임 대출기관만의 문제로 끝났을 것이다. 미국 주택 관련 손실의 절반 이상이 파산, 그리고 파산 직전까지 갔던 2008년 9월 이후에 발생했다. 금융 공황이 없었다면, 서브프라임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이슈들은 잘 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이런 독립된 이슈들이 전체 시스템에 걸쳐 나타난 금융위기를 촉발하게 한 것이다. 금융위기의 심리적 근거들을 개별적으로 보면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금융위기를 막는 데 실패했다. 금융 시스템의 운명은 정책 당국이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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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유동성을 투입하면 시장이 안정되는데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준의 “재할인 창구에서 대출 받기(come-and-get-it)”라는 메시지는 은행들이 재할인 창구 제도를 활용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들은 재할인 창구 제도를 활용하게 되어 징벌적 금리를 지불했다는 것이 시장에 알려지면 은행들이 그만큼 취약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판단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위기의 징조들 제2장 화마의 습격을 당하다, 벤 버냉키, 티머시 가이트너, 헨리 폴슨 주니어
정부의 도움이 전체 금융 시스템의 안전성을 위해 필요한 상황인데도 낙인 효과로 인해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도움을 꺼리게 된 것이다. 연준은 징벌적 금리를 낮추고 대출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재할인 창구 대출이 은행들에 더욱 쉽게 받아들여지게 만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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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버블이나 시장의 충격이 재앙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피해를 감내할 수만 있다면 한동안 금융위기가 지속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다. 왜냐하면 금융위기는 부실 기업이 퇴출되고 금융시장의 안전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산 버블이 터진 이후에는 어느 정도 금융 손실을 입는 것이 불가피하다. 모든 디레버리징을 막거나 또는 지속 불가능한 좀비 기업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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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심각한 금융 공황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지나치게 커지면 위기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정책 입안자들이 그다지 크지 않은 위험이라고 판단하거나, 도덕적 해이를 막는 것에 너무 신경 쓰거나, 정치적 악영향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바람에 너무 늦게 위기에 대응하면 부작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늑장 대처로 불거진 시장의 공황은 무분별하고 부실한 기업뿐만 아니라 신중하고 강한 기업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되고, 과도한 레버리지 투기 세력뿐만 아니라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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