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 5문5답] 33. 소설 쓰는 지영입니다

D-29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지영입니다. 저는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썼고,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앤솔로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 참여했습니다. 매일 아침 메일로 그믐레터를 받는데 ‘그믐’에 한 권의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설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인생 맛집, 인생 여행지, 인생 영화 같은 게 없는 사람이에요. 인생 책 역시 없고,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책, 종종 생각나는 책,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입니다.
Q2 이 책이 인생책인 이유에 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헛된 기다림』은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대에 위치한 ‘우샤’라는 마을,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 책들이 못 박혀 있는 집, 거대한 돌부처의 머리가 쓰러져 있는 향수 공장을 배경으로 그리운 이를, 또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담아낸 이야기인데요,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와 사회, 또 이슬람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세밀화처럼 그려내고, 또 고통스럽고 잔인한 현실을 담담하게 풀어내기도 하는 점이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아프가니스탄을 ‘9.11 테러’나 ‘탈레반’과 함께 떠올렸어요. 언젠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전 그곳 여성들은 지금의 부르카와는 전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거든요.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에서 강의를 듣던 여성들은 이제 그곳에서 찾아 볼 수 없죠. 언젠가 직접 보고 싶었던 불교 유적들도 바미얀 불교 유적처럼 파괴되어 사라졌고요. 저에게 아프가니스탄은 파괴와 절망을 양손에 쥐고 서 있는 폐허 같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헛된 기다림』을 읽고 나서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됐고, 또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 미군이 철수한 후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들뿐이지만, 그럼에도 희미한 희망을 품고 헛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저 역시 그곳과 이곳에 어제와는 다른 내일이 올 것이라 믿고 있어요. “인간의 품격은 가족의 범위를 얼마나 크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구절이 오래 마음에 남았었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우리’의 범주에 넣을 때 비로소 각자의 조각들이 이어져 우리 모두의 내일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기도 합니다.
Q3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신 거예요?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와 사연이 궁금합니다.
여행 중에 목적지 없이, 지도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걸을 때가 많아요. 가끔 책이나 연극 공연을 사전 정보 없이 표지나 포스터, 제목만 보고 선택할 때도 있고요. 『헛된 기다림』도 그랬습니다.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는데 대체 어떤 기다림이었기에 헛되다고 말하는지 그 연유가 궁금해서 책을 꺼냈고, 못이 관통한 낡은 양장본 사진이 마음을 뚫고 들어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슬픈 사랑 이야기이지 않을까, 책이 매개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슬픈 사랑 이야기가 맞았어요. 또 슬픈 사랑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넓은 천장에는 수백 권의 책이 쇠못에 박힌 채 걸려 있다. 못 박힌 역사, 못 박힌 사랑, 못 박힌 성전(聖典).”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사람들의 사랑, 어떤 가르침들이 부서지고 파괴되었지만 못 박힌 채로라도 남아 이제 이 소설을 읽는 저에게 자기를 꺼내 읽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책을 구입한 후로도 종종 읽었어요. 완독하기도 했고, 어디든 펼쳐서 읽기도 했고요. 책을 언제 어디에서 읽었는지 기록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16년 1월에 쿠알라룸푸르, 시엠립, 방콕, 싱가포르, 말라카를 여행하면서도 읽었더라고요. 아마도 낯선 골목길을 헤매던 오후에 읽었을 거예요. 제가 5년 정도 한국 밖에서 살았는데 챙겨가지 않아서 후회하기도 했고요. 작년에 귀국했을 때 책장에서 가장 먼저 꺼낸 책이기도 합니다.
Q4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어떤 분들께 추천하시겠어요?
『헛된 기다림』은 피폐해진 땅 위에서 목숨을 잃고, 소중한 것을 잃어야 했던 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넘어 타인의 상처를 지켜보고, 서로 어루만지며 절망적일지라도 계속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라라가 읽은 책 중에 ‘살아 있다’에서 ‘살’자가 빠진 부분이 있었어요. 못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라라의 눈은 기억의 도움을 받아 ‘살’자를 붙여 넣어요. 못 박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책들은 “잔혹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고”, 그래서 “몸서리가 쳐질 때”도 있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고개 돌리지 않고 직시하며, 또 기억하고 함께 나눕니다. 그렇게 구멍은 채워지고, 상처는 다독여집니다. 공백을 완벽하게 메울 수 없을지라도, 상흔이 영원히 남을지라도요. 기다림은 헛되었으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이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낯선 아프가니스탄이 배경이라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고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네요. 저도 그랬지만 관련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도 역사적·사회적·문화적·종교적 배경이 잘 설명되어 있으니 부담은 살짝 내려두시고 이 책을 펼치시길 추천합니다.
Q5 마지막으로 책에서 밑줄 그은 문장을 공유해 주세요.
“그녀가 떠날 때 천장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선물로 줄 것이다. 이 집에 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한 권씩 줄 생각이다.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형제. 상처를 안고 사는 친구. 이곳에선 모두가 철저하게 혼자다.” “편지와 소식과 방문은 떠난 자들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가끔씩, 아주 잠깐씩, 죽은 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는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다가, 곧 마음이 현실을 기억해 내고 어떤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1,1-디메틸시클로헥산 분자에서 탄소 원자 한 개를 빼고 규소 원자 한 개를 넣으면, 상큼한 풀 향기가 악취로 바뀐다. 이 소년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작은 일을 달리 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까? 어떤 작은 실수를 범한 것일까? 함정과 채찍질에 잡히거나, 다른 동물에 의해 부상을 입거나, 총에 맞거나, 간질 발작을 보이는 새끼들처럼, 이상 행동을 보이는 늑대들은 다른 늑대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따라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어야 한다.” “7월에 라라에게서 편지가 왔다. 황금색 방 바닥에 모아 놓은 벽화 조각 모자이크는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뒤 모자이크를 살펴보니, 조각 하나가 빠져 있었다. 두 연인의 얼굴이 맞닿은 부분이었다. 러시아로 가져간 것이다. 그 모자이크 조각, 그리고 천장에 박혀 있던 책 한 권. 상처를 나눈 친구. 아무가나 가져가겠다더니 『황금 양털』을 가져갔다. 죽은 자들은 진실만을 말할 것이다. 그 진실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해도.”
[인생책 5문5답] 인터뷰에 함께 해 주셔서 진솔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책을 소개해 주실 분들은 아래 주소에 입장하여 참여해 주세요. https://www.gmeum.com/gather/template/1 전 국민이 자신의 인생책 한 권씩 소개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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